시(詩) 814

安 否

安 否 이선희 소슬한 바람이 마음에 불어 나비인 듯 날아 마음이 닿는 곳 마음 같지 않은 세상 그 마음 다 알아 줄 수는 없지만 늘 곁에 함께 있다오 오늘 하루 어떤가요 밤새 안녕하신가요 하루가 멀다 일들이 있어 그대 安危에 마음이 쓰였소 별 일이 없어 좋은 그날 소소하여도 좋은 그날 숨 한번 쉬고 마음 내려놔 주오 아무 일 아니라오 담지 마오 오늘 하루 어떤가요 그대 安危에 마음이 쓰였소 밤새 안녕했냐고 묻는 가벼운 安否 들려오는 목소리 그 속 가득한 당신의 걱정 쉽게 헤아릴 수 없는 당신의 한숨 그대가 물어봐 준 나의 하루 그 작은 한마디에 많은 것이 눈부시게 빛나고 녹아내려 사라지죠 계절은 끝없이 변하고 시간은 잡을 수 없어도 그대가 원한다면 언제든 다 들어줄 수 있어요 안녕했냐고 묻는 가벼운 안부..

시(詩) 2021.02.10

입춘부

입춘부 고로쇠 나무에 등을 기댔더니, 어느 순간 서늘한 손길 아, 요녀석이 내게 지금 기를 보내오는구나 고로쇠나무 잎으로 손부채를 만들어 고로쇠나무의 물을 한 모금 먹었더니, 뱃속이 서늘해진다 요녀석이 지금 내 뱃속을 제 세상으로 만드는구나 머잖아 내 눈, 내 입, 내 귀에도 푸른 눈이 트고, 고로쇠나무의 어린 잎이 하나 둘 돋아나겠구나 이 봄엔 아예 나도 고로쇠나무가 되어 뿌리 아래 갇혀 있던 봄 기운을 물관이 터질 듯 타고 오르는, 이 솟구치는 노래를 전해주어야겠다 그리운 이가 등을 기대면. 詩 박제천(朴堤千) 1965~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동국대 국문과 졸업/ 시집 '장자시''SF-고감' 등 10권 '박제천 시전집(전 5권)/ 한국시협상 등 수상/ 현재 문학 아카데미 대표/ 성균관대.추계예대.동..

시(詩) 2021.02.04

시래기

시래기 도종환 저것은 맨 처음 어둔 땅을 뚫고 나온 잎들이다. 아직 씨앗인 몸을 푸른 싹으로 바꾼 것도 저들이고 가장 바깥에 서서 흙먼지 폭우를 견디며 몸을 열 배 스무 배로 키운 것도 저들이다. 더 깨끗하고 고운 잎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가장 오래 세찬 바람 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 저들이다. 그나마 오래오래 푸르른 날들을 지켜온 저들을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 사람들의 까다로운 입맛도 바닥나고 취향도 곤궁해졌을 때 잠시 옛날을 기억하게 할 짧은 허기를 메꾸기 위해 서리에 젖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

시(詩) 2021.01.04

내 몫이라면

내 몫이라면 외로움이 내 몫이라면 외로운 대로 살겠습니다. 그리움을 안고 살라면 그렇게 살겠습니다. 어떻게 살았는지 뒤돌아 보고도 싶지 않습니다. 후회할 시간에 더 많이 사랑을 해야 하니까요. 한때는 무능한 환경 탓을 하며 슬픔으로 가득 차, 원망과 불만으로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 때도 있었습니다. 시련도 겪어야 반성도 하고 소중함을 느끼며 사는 거 같아요.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인생의 마지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생각하며 순간순간 가슴으로 살겠습니다. 나를 미워하고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다 해도 슬퍼하지 않겠습니다. 잘난 사람 틈에 끼어 잠시 소외감을 느꼈어도, 난 내 모습 이대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끼며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시(詩) 2020.12.28

산산조각. 정호승

산산조각/ 정호승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시집 ‘이 짧은 시간 동안’(창비, 2004)

시(詩) 2020.12.17

첫 마음 ,정채봉

첫 마음 정채봉(丁埰琫 1946-2001) 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처음 눈이 맞던 날의 떨림으로 내내 계속된다면.. 첫 출근하는 날, 신발 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 일을 한다면.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한 공기 속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 세례 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 나는 너, 너는 나라며 화해하던 그날의 일치가 가시지 않는다면. 여행을 떠나는 날, 차표를 끊던 가슴 뜀이 식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그때가 언제이든지 늘 새 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가 새로우..

시(詩) 2020.12.04

12월의 기도

12월의 기도 윤영초 마지막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아쉬운 시간 저 멀리 지나가 버린 기억 차곡차곡 쌓아 튼튼한 나이테를 만들게 하십시오 한 해를 보내며 후회가 더 많이 있을 테지만 우리는 다가올 시간이 희망으로 있기에 감사한 마음을 갖게 하십시오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감사 안부를 띄우는 기도를 하게 하십시오 욕심을 채우려 발버둥쳤던 지나온 시간을 반성하며 잘못을 아는 시간이 너무 늦어 아픔이지만 아직 늦지 않았음을 기억하게 하십시오 작은 것에 행복할 줄 아는 우리 가슴마다 웃음 가득하게 하시고 허황된 꿈을 접어 겸허한 우리가 되게 하십시오 맑은 눈을 가지고 새해에 세운 계획을 헛되게 보내지 않게 하시고 우리 모두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모두가 원하는 그런 복을 가슴마다 가득 차게..

시(詩) 2020.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