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입춘부

含閒 2021. 2. 4. 12:37

입춘부



고로쇠 나무에 등을 기댔더니, 어느 순간 서늘한 손길
아, 요녀석이 내게 지금 기를 보내오는구나
고로쇠나무 잎으로 손부채를 만들어
고로쇠나무의 물을 한 모금 먹었더니, 뱃속이 서늘해진다
요녀석이 지금 내 뱃속을 제 세상으로 만드는구나
머잖아 내 눈, 내 입, 내 귀에도
푸른 눈이 트고, 고로쇠나무의 어린 잎이 하나 둘 돋아나겠구나
이 봄엔 아예 나도 고로쇠나무가 되어
뿌리 아래 갇혀 있던 봄 기운을
물관이 터질 듯 타고 오르는, 이 솟구치는 노래를
전해주어야겠다
그리운 이가 등을 기대면.


詩 박제천(朴堤千)

1965~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동국대 국문과 졸업/
시집 '장자시''SF-고감' 등 10권 '박제천 시전집(전 5권)/
한국시협상 등 수상/ 현재 문학 아카데미 대표/
성균관대.추계예대.동국대 등 시창작 강의 출강


*시작노트*

<입춘부>는 근래의 내 작품중에서 비교적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초기시는 어렵다는 소리가 많은데 비해 이 작품은
구성도 간결하고 그 내용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생명의 순환을
말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내게는 슬픈 작품이다. 이 작품을 쓸 무렵, 아내와 함께
지리산으로 고로쇠 물을 먹으러 갔었다. 위암 투병중의 그녀에게
좋은 물이라 해서 한달음에 달려갔지만 막상 아내는 그 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이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고로쇠 물은 언제나 남아서 그녀를 떠올리게 한다.
여담 하나, 물이 나올 무렵의 나무에는 잎이 하나도 달려있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식물학적 사실일 뿐, 의도적 오류라는 말도 있지만
그날이나 지금이나 내게는 고로쇠 잎이 선명하게 보인다.


'월간 墨家'2월, 창간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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