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과 死

채명신 별세,월남전·6·25전쟁 영웅

含閒 2013. 11. 26. 12:12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편히 쉬소서

 

채명신 별세,월남전·6·25전쟁 영웅…인민군 총사령관 생포‘참군인’


'월남전 영웅'채명신 전 주월 한국군사령관(예비역 중장)이 25일 향년 87세에 숙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지난 1965년 8월 맹호부대장 겸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을 맡았다.1969년 4월 월남전 당시 헬리콥터로 이동 도중 베트콩의 공격을 받고 국군 28연대 주둔지역인 투이 호아에서 헬기가 추락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1969년 귀국한 이후 2군사령관으로 부임, 한국군의 위상을 세계에 떨친 주역으로 유명하다.

고인은 황해도 곡산에서 항일운동가였던 아버지와 독실한 크리스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진남포 소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소련군 주둔 이후인 1947년 공산주의를 피해 가족들과 생이별하고 홀로 월남,1948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제5기로 임관했다.

6·25전쟁 때에는 육군 중령으로 한국군 최초의 유격대로 불리는 ‘백골병단’을 이끌고 신화적인 전공을 세웠다.인민군 중장이자 빨치산 총사령관인 길원팔을 육박전 끝에 생포하기도 했다.

휴전 후 9사단 참모장이던 박정희 당시 대령과 인연을 맺은 인연으로 5·16 군사쿠데타에 가담했다. 5사단장이던 그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동대문 근처까지 진출, 박정희 당시 소장을 도왔다.

당시 혁명 5인 위원회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참여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그에게 3차례에 걸쳐 자신을 도와 정치를 같이하자고 했지만, 군인의 길을 계속 걸었다.

군 복무기간 6·25전쟁과 베트남전에서 세운 공로로 태극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등의 훈장을 받았다. 베트남 최고2등훈장, 미국 공로훈장, 타이완 공로훈장, 필리핀 명예훈장, 태국 왕관훈장, 브라질 문화훈장 등 외국 훈장도 많이 받았다.

퇴역 후에는 스웨덴, 그리스, 브라질 대사 등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태권도 보급에 공을 세웠다. 고인은 대한태권도협회 초대 회장과 월남전참전자회 명예회장도 역임했다.

 


고인의 저서로는 ‘베트남전쟁과 나(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 등이 있다. 유족으로는 부인 문정인 여사와 1남 2녀가 있다. 장례는 육군장으로 치러진다. 28일 발인을 거쳐 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실. (02)3010-2631.

채명신 별세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은 “채명신 별세,명복을빕니다. 조국의명예 드높였었다.”, “채명신 별세, 장군님이 강조하신 6.25전쟁의 3대 교훈을 되새겨 봅니다.”, “채명신 별세, 월남전의 영웅이셨네”등 다양한 반응으로 고인에 애도를 표했다.

[Why뉴스]채명신 장군은 왜 사병묘역 안장을 원했을까?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영웅이면서 생활에서도 타인의 귀감노컷뉴스|입력2013.11.28 09:45|수정2013.11.28 10:51

뉴스의 속사정이 궁금하다. 뉴스의 행간을 속 시원히 짚어 줍니다. [Why 뉴스]는 CBS 라디오 < 김현정의 뉴스쇼 > 를 통해 들을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지난 25일 별세한 채명신 에비역 중장, 비록 돌아가신 분의 얘기지만 타의 귀감이 되는 모습을 보여 듣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 마련된 일반 병사들 묘역인 제 2묘역에 마련된 고 채명신 장군 묘자리. 윤성호 기자

채명신 장군은 초대 주베트남 한국군사령관을 지낸 예비역 중장이다. 그런데 이 채명신 장군이 별들의 무덤 대신 사병묘역을 선택했다. 계급은 다르지만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전우들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고 그 유언이 실현됐다.

군 장성출신이 사병묘역에 안정되는 건 채명신 장군이 처음이다. 채명신 장군은 살아서는 '전쟁영웅'으로 죽어서는 '참군인'으로 후배군인들의 귀감이 되고 사표가 되었다. 특히 사회가 돈이나 권력 명예만 좇는 이기주의적인 모습이 넘쳐나고 있는데 스스로를 내려놓고 낮춤으로서 감동을 주고 있다.

그래서 오늘 (Why뉴스)에서는 "채명신 장군은 왜 사병묘역 안장을 원했을까?"라는 주제로 그 속사정을 알아보고자 한다.

▶육군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죠?

= 그렇다. 오늘(28일) 오전 10시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육군참모총장 주관으로 육군장으로 엄수되고, 오후 3시 베트남전 전사자들이 묻힌 제2묘역(월남파병전사자묘역)에서 안장식이 거행된다.

채 장군은 고인의 유언에 따라 26.4㎡(8평)의 장군묘역이 아닌 3.3㎡(1평)의 사병묘역에 안장된다.

육군장은 현역 전사자이거나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경우에 해당되지만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군인이 사망했을 경우에도 대상이 된다고 한다.

영결식에서는 가수 패티 김이 조가로 찬송가 '내영혼이 은총 입어'를 부른다. 채명신 장군과 패티 김은 1966년 신혼여행 대신 베트남전 위문공연을 계기로 인연을 맺어 47년 우정을 이어왔다.

▶채명신 장군이 예비역 장성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사병묘역 안장되는데 언제부터 사병묘역 안장을 원했나?

= 상당히 오래된 일이라고 한다.

채 장군을 20년 넘게 보좌해온 정재성 보좌관(통역장교 출신, 예비역 육군대위)은 "'전우들 곁에 묻히겠다는 얘기를 들은 지 한참 됐다"고 말했다.

정재성 보좌관은 "사령관님은 다른 장군과 다르다. 월남사령관을 하면서 많은 장교와 사병들이 전사했다. 5천여 명 넘게 사망했다. 항상 마음 아파하시고 나는 목숨을 부지했는데 이 친구들은 여기에 묻혀있다……. 내가 죽으면 여기 전우들하고 같이 묻혀야 되겠다. 이게 늘 원이 있었다"고 말했다.

채 장군의 부인 문정인 여사도 "(채 장군이) 집(동부이촌동)에서 국립현충원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부하들 곁에 묻히고 싶다'는 말씀을 자주하셨다" "전역 직후부터 그런 얘길 했고 병상에서도 여러 차례 그런 언급을 했다"고 전했다.

▶쉽지 않은 결정일 텐데 어떤 계기로 이런 결심을 하게 됐나?

= 정말 쉽지 않은 결정이다.

채 장군이 장군묘역 대신 사병묘역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정재성 보좌관은 '애국심과 부하사랑'이라고 말했다.

정재성 보좌관은 "채명신 장군은 다른 지휘관과 달리 전쟁을 경험한 분인데 한국전쟁과 월남전쟁을 실전을 경험한 분이다. 자기가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닌데 그래서 전사자의 애절함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며 "채명신 장군이 현충원을 찾아 부하들의 묘비를 붙잡고 통곡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죽으면 그기에 묻혀야 되겠다. 그렇게 결심하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장군묘역과 사병묘역이 어떤 차이가 나는 거냐?

= 장군묘역과 사병묘역은 큰 차이가 난다. 우리나라만 장군묘역과 장교묘역, 병사묘역으로 구분이 된다.

장군묘역과 사병묘역의 차이는 무덤의 크기가 8배 차이가 난다. 장군묘역은 26.4㎡(8평)이고 사병묘역은 3.3㎡(1평)이다. 여기에 묘비도 큰 차이가 난다. 장교나 사병들의 묘비는 높이 76㎝ 가로 30㎝이지만 장군들은 높이 90㎝ 가로 36㎝이고 여기에 단(가로 106㎝ 세로 91㎝ 높이 15㎝)을 세울 수 있다.



↑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 마련된 장군묘역. 윤성호기자



↑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 마련된 일반 병사들 묘역인 제 2묘역에 마련된 고 채명신 장군 묘자리. 윤성호기자

특히 장군묘역에 무덤에 봉분을 하고 시신으로 안장을 할 수 있지만 일반 묘역은 화장한 유골만 안장이 가능하다.

국방부의 보도자료에도 "장군신분으로서 장군묘역 안장 혜택을 포기하고,..."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을 정도다.

▶살아서는 '전쟁영웅'으로 죽어서도 '참군인'으로 칭송을 받는데 실제 생활에서도 귀감이 되었다는데?

= 그렇다. 채명신 장군은 평소에도 권위나 의전에 연연하지 않고 청렴한 생활을 해왔다고 한다.

육군 공보과장을 맡고 있는 전병규 대령은 "(채 장군이) 예편이후 국방부나 육군 등에서 강연을 하거나 방문할 일이 있을 때에도 권위를 내세우거나 특별한 의전을 요구하지 않았다"며 "그런 모습들이 후배군인들의 귀감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채명신 장군은 2003년 PKO 파병장병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면서 베트남전의 경험을 언급했는데 당시 대민작전을 나가면서 부하들에게 강조한 얘기가 "베트콩 100명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주민(양민)을 보호하라"는 명령이었다는 걸 전하면서 이런 자세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채 장군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해 혁혁한 전공으로 태극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등의 훈장을 받을 정도로 혁혁한 무공을 세운 '전쟁영웅'이었다.

채 장군을 잘 아는 국방부관계자는 "전쟁영웅이 일반 삶에서 귀감이 되기가 쉽지 않은데 채 장군은 타의 모범이 되고 귀감이 되었다"면서 "아마도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며, 채 장군이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간증을 통해 전도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사병묘역 안장을 결정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던데?

= 채 장군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사병묘역 안장은 쉽지 않았다. 채 장군이 병세가 악화되자 가족과 보좌관들이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사병묘역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뜻을 전했지만 국방부나 현충원에서는 장군묘역과 장교묘역, 병사묘역으로 구분하고 있는 '국립묘지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을 때문에 난색을 표명했다고 한다.

가족이나 측근들은 난색이나 곤란으로 표현을 하지만 국방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얘기다. 참고로 국립서울현충원은 국방부 소관이고 국립대전현충원은 국가보훈처 소관이다.

정재성 보좌관은 "규정도 없고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늘 장례식인데 어제 아침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대전으로 갈 준비를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상당수 언론보도에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될 것'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결국 청와대가 나서서 사병묘역 안장을 결정했다고 한다. 채 장군의 측근은 "청와대 김기춘 비서실장이 어제(27일) 오전 문정인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돌아가신 분의 유지를 따르는 것이 예의라고 박근혜 대통령께서 말씀하셨다"는 걸 알려왔다고 말했다. 이어서 오후에는 김관진 국방부 장관이 빈소를 방문에 공식적으로 사병묘역에 안장하기로 했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김관진 국방장관은 채 장군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아산병원을 찾아 유족들에게 정부의 결정을 공식 전달했다. 김 장관은 "고인은 군의 정신적 지주이셨다"며 "파월 장병들과 같이 묻히고 싶다고 유언하셔서 그 유지를 받들기로 했다"고 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개헌에 반대했다는데?

= 그렇다. 채명신 장군은 5.16 군사쿠데타의 주역이면서도 정치권으로 진출하지 않고 군으로 복귀했고 유신개헌에 강력히 반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대장 진급에서 탈락했다.

채 전 사령관은 1949년 육군사관학교(육사 5기)를 졸업하고 이듬해 6·25 전쟁에 소위로 참전해 백골병단을 지휘했고 중대장, 유격대장, 연대장으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953년에는 미 육군보병학교를 졸업했다. 채 장군은 육군 5사단장과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거쳐 1960년 5.16 군사쿠데타에 참여해 혁명 5인위원회 멤버로 선임됐으며, 그해 7월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면서 국가재건최고회의 감찰위원장으로 발탁됐다.

1965년에는 주월사령관 겸 맹호부대장에 임명돼 1969년까지 4년 가까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을 지휘했다. 이후 육군 2군사령관을 거쳐 197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개헌에 반대했고 그해 중장으로 예편했다.

당시 고인은 박정희 대통령이 그에게 집권연장의 뜻을 보이면서 군부 내의 지지를 이끌어 줄 것을 요구했지만 신의(信義)가 정치인의 생명이라며 강하게 반대한 것으로 전해졌다.

채 장군은 전역이후에는 스웨덴과 그리스, 브라질 대사를 역임하며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채명신 장군 가족 문정인 인사드립니다.

 

제 남편 채명신 장군은 11월 25일 오후 3시 12분, 생일을 이틀 남겨놓고 88세의 일기로 제 곁을 떠났습니다. 평소 남편은 동작동 제2묘역에 누워있는 병사들을 창문을 통해 가리키며 당신도 월남에서 생사를 같이 한 그 병사들과 함께 묻히고 싶다 하셨습니다.

조국을 위해 젊음을 바친 병사들을 위대하다 하셨고, 오늘의 당신이 있는 것도, 오늘의 조국이 있는 것도 다 그 병사들의 희생 위에 터잡은 것이라며 먼저 산화한 병사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고 하셨습니다. 병사들과 똑같이 화장하고 병사들과 똑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묘비를 세워달라 부탁하셨습니다. 어려운 부탁이었지만 대통령께서 친히 저희 부부의 소원을 들어주셨고, 그래서 남편은 동작동 현충원 제2묘역 앞자리에 그 병사들과 함께 누워 계십니다.

육군장이라는 과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11월 28일의 영결식에 이어 안장식에 이르기까지, 만 나흘 동안 육군참모총장님을 비롯한 많은 장병들께서 애쓰시며 정성껏 도와주셨고, 수를 알지 못 할 만큼 많은 국민들께서 먼 길 찾아 조문과 위로를 해 주셨습니다. 이 모든 분들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어 이 인터넷 공간을 찾았습니다. 일일히 찾아뵙고 정중히 예의를 갖추어 감사말씀을 드려야 하겠지만, 제 처지가 그렇지 못해 결례를 무릅쓰고 이런 방법으로 대신하게 됨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과분한 축복을 받은 저는 하루에 두 차례씩 남편이 누워있는 귀한 곳을 찾아갑니다. 찾을 때마다 많은 시민들이 남편의 묘를 찾아오셔서 예를 표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제 남편이 누리는 축복일 것입니다. 이런 축복을 허락해 주신 대통령님과 이를 위해 애써 주신 여러 분들께 저는 이 세상 하직할 때까지 감사한 마음 간직하고 살 것입니다.

그리고 자리를 함께 하시지는 못하셨어도 곳곳에서 고인에 대한 사랑을 가슴에 품고 계실 모든 국민들께 고인을 대신하여 깊은 감사와 뜨거운 사랑의 뜻을 드립니다.

2013년 12월 5일
채명신 장군 가족 문정인 올림

▲ 편지 원본

 

평생 묻어둔 비밀 … 고채명신 장군이 적장이 맡긴 아를, 교수로 키웠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13.12.02 00:01 / 수정 2013.12.02 08:11
서울현충원 사병묘역에 마련된 고 채명신 예비역 중장의 묘지에서 30일 삼우제가 열렸다. 특전사 군종 참모를 지낸 김충렬씨(75·목사)가 유가족들을 위해 아코디언으로 찬송가를 연주하고 있다. [사진 최정동 기자]
30일 오후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제2 병사묘역. 지난달 25일 별세하면서 ‘장성묘역 대신 병사묘역에 묻히기 원한다’는 유언을 남긴 베트남전의 영웅 고(故) 채명신 장군의 삼우제가 치러졌다. 부인 문정인 여사와 아들·딸을 비롯한 유족들, 베트남전 참전 노병들이 추모 예배를 하며 고인을 기렸다. 이 자리에선 4일장으로 치러진 채 장군의 장례 기간 내내 빈소를 지키며 조문객들을 맞았던 채 장군의 동생 채모(76)씨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나흘간 밤샘하며 쌓인 피로를 걱정해 “삼우제는 직계가족만으로 치를 테니 나오지 말라”는 문정인 여사의 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생 채씨는 채 장군이 60년 넘게 숨겨온 또 다른 미담의 주인공이다. 채씨는 채 장군이 1951년 초 강원도에서 생포한 조선노동당 제2 비서 겸 북한군 대남유격부대 총사령관(중장) 길원팔이 아들처럼 데리고 다녔던 전쟁고아였다.

당시 육군 중령이던 채 장군은 유격부대 ‘백골병단’을 이끌며 강원도 내에서 암약하던 북한군 색출작전을 펼쳤다. 채 장군에게 생포된 길원팔은 채 장군의 전향 권유를 거부하고 채 장군이 준 권총으로 자결했다. 그러면서 “전쟁 중 부모 잃은 소년을 아들처럼 키워왔다. 저기 밖에 있으니 그 소년을 남조선에 데려가 공부시켜달라”고 부탁했다.

적장(敵將)이지만 길원팔의 인간됨에 끌린 채 장군은 “그러겠다”고 약속하고 그 소년을 동생으로 호적에 입적시켰다. 이름도 새로 지어주고 총각 처지에 그를 손수 돌봤다. 소년은 채 장군의 보살핌에 힘입어 서울대에 들어가 서울대 대학원에서 이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서울 유명 대학에서 교수를 지냈다. 채 교수는 10여 년 전 은퇴했다. 두 사람은 채 장군이 숨질 때까지 우애 깊은 형제로 지내왔다고 한다. 채 장군의 자녀들은 그를 삼촌으로, 채 교수의 자녀들은 채 장군을 큰아버지라고 부른다.

문정인 여사는 지난달 29일 서울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중앙SUNDAY 기자와 만나 “채 장군이 길원팔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채 교수를 동생으로 맞은 것”이라며 “채 장군이 생전에 길원팔 칭찬을 많이 했다. 적장이긴 하지만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문 여사는 “채 장군이 채 교수를 (아들이 아닌) 동생으로 입적한 건 채 장군의 나이(당시 25세)가 젊었고 채 교수와의 나이 차도 11세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채 교수가) 형님이 별세하신 데 대해 크게 슬퍼했다. 나흘 내내 빈소를 지켰다”고 말했다.

채 장군은 총각 시절 본인이 손수 소년을 돌보다 그가 고교생이 됐을 무렵 문 여사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주변 사람에게 소년을 맡기고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 서울대에 진학하도록 도왔다고 한다. 채 장군은 북한군 고위 간부가 데리고 있던 고아 소년을 입적시킨 사실이 문제가 돼 군 생활이나 진급에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채 장군에겐 친동생 명세씨가 있었다. 하지만 51년 채 장군이 연대장으로 복무하던 5사단의 다른 연대에 소대장으로 배속돼 북한군과 교전을 벌이다 전사했다. 이에 따라 채 교수는 형제자매가 없던 채 장군에게 유일한 동생이 됐다.

채 장군 본인도 지난 5월 초 고인의 마지막 언론 인터뷰가 된 중앙SUNDAY의 ‘이광재가 원로에게 묻다’ 대담 당시 비보도를 전제로 “길원팔이 자결하면서 데리고 있던 10대 남녀 아이를 돌봐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여자아이는 전쟁통에 숨졌으나 남자아이는 아들처럼 키웠다. 사랑으로 키웠다. 대학 교수가 됐다”고 밝힌 바 있다.

채 장군은 당시 “그(채 교수)의 인생이 중요하니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했다. 문 여사도 29일 인터뷰에서 “우리는 이런 사실을 절대 주변에 알리지 않고 지내왔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라며 기사화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본지는 적장이 아들처럼 데리고 다닌 소년을 동생으로 입적시켜 대한민국 엘리트로 키워낸 채 장군의 선행이 이념 갈등 해소와 남북 화해의 귀감이 될 것으로 판단해 기사화를 결정했다.

채명신 장군이 김일성의 오른팔로 불렸던 북한군 간부 길원팔이 맡긴 소년을 동생으로 삼은 건 채 장군과 길원팔의 짧고도 극적인 만남 때문이었다. 51년 3월 25세 때 북한군 후방에 침투하는 한국군 최초의 유격부대 ‘백골병단’을 지휘하던 채 장군(당시 중령)은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의 군량밭이란 마을을 급습했다. “인민군 거물 길원팔이 숨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직후였다.

채 장군은 그곳을 지키던 북한군들에게 평안도 말씨로 “중앙당에서 나왔다. 조사할 게 있으니 협조해달라”고 말해 안심시킨 뒤 그들을 전원 사살했다. 이어 세포위원장 집에 숨어있던 길원팔을 붙잡았다. 그에게선 김일성 직인이 찍힌 작전훈령과 전선 사령관들에게 보내는 친필 서한 등 특급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채 장군은 방에서 길원팔과 단둘이 마주보고 심문에 들어갔다. 채 장군의 질문에 침묵을 지키던 길원팔은 “네 놈은 누구냐”고 되물었다. “대한민국 국군 유격대 사령관 채명신”이라고 답하자 “그 썩어빠진 이승만 괴뢰도당 중 이곳까지 침투할 놈은 없다. 반란군 아니냐”고 쏘아붙였다.

채 장군은 자서전에서 “길원팔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불안한 기색 없이 침착하고 당당했다. 그는 확실히 거물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채 장군은 “당신 같은 사람은 나와 함께 남쪽으로 가면 영웅 대접을 받을 것”이라며 전향을 권유했다. 그러자 길원팔은 “썩어빠진 땅에 왜 가느냐”며 일축했다. 이어 “부탁이 있다. 김일성 동지에게 선물받은 내 총으로 죽고 싶다”고 말했다. 소년(채 교수)을 거둬달라는 부탁과 함께였다.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채 장군은 길원팔의 총에 실탄을 한 발 넣어 건네주고 몸을 돌려 방을 나왔다. 잠시 후 총소리가 났고 길원팔은 책상에 머리를 숙인 채 숨졌다. 훗날 “혹시라도 길원팔이 뒷통수를 쏠 것이란 걱정은 안 들었나”는 주변의 질문에 채 장군은 “늘 하나님이 방패가 되는 걸 믿었기에 두려움이 없었다”고 답했다. 채 장군은 양지바른 곳에 길원팔을 묻고 ‘길원팔지묘(吉元八之墓)’란 묘비를 세운 뒤 부하들과 함께 경례했다. 채 장군은 자서전에서 “적장이었지만 그는 충분히 경례를 받을 만한 장군이었다”고 적었다.

 

 

<567>역사를 넘어 시대를 넘어-54-적 유격대사령관 길원팔 생포

나는 우수한 대원 200명을 선발해 김한철 대위와 전인식 대위에게 이들을 지휘하도록 하고 적 치하의 군량밭 주위를 포위했다.

나머지는 적들의 증원군이 올지 모르니 군량밭 길목에 매복시켜 놓았다. 군량밭 주위에는 무장한 지방 자위대원 30명이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자위대장을 찾아갔다.“우리는 중앙당에서 나왔다. 이 일대에 반란군들이 있어 혹 그들이 길원팔 동지를 공격할지 모른다는 정보가 있다. 동무들 중 인민을 배반하고 길원팔 동지를 해치려는 불순세력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중앙당에서 파견돼 나온 것이다. 동무들을 조사할 게 있으니 잠깐 협조해 주기 바란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대원들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무장해제시켰고, 그길로 그들의 생명도 끝이었다. 자위대원을 처치한 뒤 2개 조로 나눠 마을로 들어갔다. 김한철 대위가 이끄는 병력은 길원팔이 머무르고 있는 세포위원장 집으로 갔고 나머지 정예대원들은 강칠성이 있는 집으로 쳐들어갔다. 저항하는 외팔이 강칠성을 잡아 나오자 세포위원장 집에서는 길원팔과 그 일당이 잡혀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적지인 이곳까지 적이 나타나리라고 상상도 못했던지 별다른 무장도 하지 않은 채였다. 길원팔을 제외한 20여 명을 모두 사살하고 필네로 돌아왔다. 이로써 우리 부대는 엄청난 전과를 거뒀다. 적 100여 명을 사살한 것은 둘째치더라도 무전기는 물론 김일성 직인이 찍힌 작전훈령과 친필사인이 있는 전선사령관들에게 보내는 친필 서한, 전방의 작전상황을 입수했다.

나는 생포한 길원팔을 앞에 두고 직접 심문했다.
“몇 살인가.”
“말 안 하겠다.
모른다.

“고향은?”
“모른다.”
“학교는?”
그제서야 그가 제대로 말했다.
“일본의 쓰가모 고등상업학교를 나왔다.”

“결혼했는가.”
“듣기 싫다. 도대체 네놈은 누구냐?”
“나는 대한민국 국군 유격대사령관 채명신이다. 인민군복을 입고 여기에 침투한 유격대장이다.”
“그 썩어빠진 이승만 괴뢰도당이 이곳까지 침투할 놈은 없다. 너 반란군인가? 바른대로 대라.”

확실히 길원팔은 거물이었다. 조금도 당황하거나 불안한 기색 없이 침착하고 당당했다. 그는 결국 포로로 남는 오명보다 자결을 원하고 마지막 소원을 말했다. “너에게 부탁이 하나 있다. 기왕이면 내 총으로 죽고 싶다. 김일성 동지께서 선물로 주신 총이다.”

그것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그의 총에 총알을 한 발 넣어 건네주고 그의 방을 나왔다. 길원팔은 김일성의 신임이 두텁고 오른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김일성 특명을 받아 전선사령관 및 군단장급에게 보내는 김일성의 친서도 휴대하고 있었다. 잠시 후 방에서 총소리가 났다. 길원팔은 유격대장의 최후를 이렇게 마감했다.

나는 양지바른 곳에 그의 무덤을 만들고 묘비도 세웠다. ‘길원팔지묘(吉元八之墓)’. 무덤과 묘비를 만든 나는 그의 묘앞에 정중히 부동자세를 취하며 경례했다. 부하들도 뒤따라 모두 경례를 올렸다. 적장이기는 했지만 그는 충분히 경례를 받을 만한 장군이었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곧바로 필네를 떠나 남으로 이동했다.

연거푸 적의 연락군관단·보충병·군량밭 자위대·2군단사령부와 길원팔 유격대사령관이 살해됐으니 우리의 정체가 노출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아닌게 아니라 적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우리 부대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나는 험준한 설악산을 타는 게 오히려 유리할 것 같아 방향을 틀어 동쪽의 설악산 능선으로 올라갔다. 높은 산으로 올라가자 이동 속도가 느려져 그만큼 시간이 더뎠지만 대신 안전했다.

<채명신·예비역 육군중장·전 주월한국군사령관/정리=이계홍·용인대 교수·인물전문 대기자>

2007.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