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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문화유산 도굴 현장’ 가장 먼저 달려가 대처

含閒 2026. 2. 4. 10:53
서라벌에 깃든 석당(石堂) 최남주의 향기따라 <52>
‘신라문화유산 도굴 현장’ 가장 먼저 달려가 대처
   
                                                        현암 최 정 간  매월다암원장   차문화연구가
1960년대는 경주신라문화유산도굴의 광풍시대였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정부수립 이후까지 도굴범들의 마수에의해 신라문화유산은 풍전등화였다. 신라왕릉들과 고분, 석탑, 절터 등은 도굴범들에 의해 무참히 유린되었다.

안강지역 신라문화유산 보호 활동
최남주는 신라인의 후예로서 소명의식을 가지고 최일선에서 신라문화유산 보호보존에 혼신의 힘을 다 바쳤다. 1960년대 신문지면에는 경주발 신라문화유산 도굴기사가 자주 보도되었다. 이때 도굴현장에 제일먼저 달려가 조사한 인물로 문화재관리국(현 국가문화유산청) 경주주재원 최남주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당시 최남주 혼자만이 광범위하게 분포된 경주지역 신라문화유산들을 지키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는 시민들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통해 신라문화유산의 중요성을 알리고 보호운동에 함께 나서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경주시장과 월성군수에게 신라문화유산들을 전담관리할 직원배치를 건의하였다.
 
이후 건의가 받아들여져 신라문화유산 보호보존에 행정적인 기초가 마련되었다. 당시 경주시청과 월성군청의 문화재 담당직원으로 안임수, 김상덕씨가 임명되었다. 이들 두사람은 최남주와 함께 경주지역의 신라문화유산 보호에 힘쓴 공무원들이다.
 
 
 
                      1967년 안강읍 근계리 용운사 용화전 법당 안에 모셔진 통일신라 석불입상 발견 당시 최남주.
 

신변보호 위해 10대 아들 동행
1967년 최남주는 고등학생인 넷째아들 최정표를 데리고 경주 안강읍 지역의 고분들이 도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조사에 나섰다. 혹시 모를 흉기를 가진 도굴범들과의 충돌에 대비해 혈기왕성한 넷째 아들과 동행하였던 것이다.
 
청령리와 사방리 일대 처참하게 도굴된 신라고분들을 조사한 후 강동면 안계리 고분들을 답사하였다. 안계리 고분들도 일부는 처참하게 파헤쳐졌고, 현장에는 5세기 신라토기 조각들이 무수히 흩어져 있었다.
 
최남주는 즉시 월성군청과 문화재관리국에 도굴의 심각성을 알렸고 동시에 긴급 보호조치를 취하도록 하였다. 이들 고분들은 1970년 안계댐 조성 공사 관계로 문화재연구소(현 국립문화유산연구원) 지근길, 조유전 박사에의해 최초로 학술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다.
 
안계리 4호분 발굴조사에서 서기 5세기경 제작된 파란색의 유리그릇과 구슬들이 출토되었다. 이들 유리제품들은 5세기 신라와 서역 간의 국제교류사에 중요한 유물들이다.
 
조유전 박사는 안계리 고분발굴을 회상하면서 2002년 11월 중앙일보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최남주 옹이 60이 훨씬 넘은 노구를 이끌고 젊은 후학들을 지도 격려하기 위해 현장을 자주 찾았던 일도 잊을수 없다”

 
 
                                                             근계리 석불입상 광배 뒷면에 조각된 3층보탑 탁본.
 

광배 뒷면에 조각된 보탑석불좌상
석당 최남주와 아들 최정표는 고분 도굴현장에서 발길을 돌려 안강읍 근계리 지역으로 갔다. 먼저 무릉산자락 안골마을에 위치한 용화사 경내에 통일신라시대 파불좌상을 조사하였다.
 
불상의 윗부분은 파괴가 되었고, 좌대 부분의 중대석에는 공양물을 바치는 한쌍의 보살상이 찬란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최남주는 근계리 석불대좌가 경주일대에서 발견된 석불대좌 중에 제일 큰 것으로 학계에 보고하였다. 이처럼 신라 통일기의 석불좌상이 파손된 원인을 최남주는 6‧25전쟁 때 포격 때문이었다고 보았다.
 
한국전쟁 당시 경주 안강 무릉산전투는 경주방어선을 지키기위해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이 석불좌상이 복원되어 개금까지 해서 당시 원형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안강읍 근계리 산 131-2 지역 용문사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 석불입상은 1967년 최남주와 최정표에 의해 발견되어 학계 최초로 보고되었다.

석불입상이 발견될 당시에는 이곳에 늙은 보살 한분이 시멘트 블록으로 조그마한 법당을 지어 용화전(龍華殿)이라 하였다. 법당 안에는 9세기 중반 목부분이 훼손된 석불입상을 모시고 있었다.
 
당시 불상 높이는 2.34m이며, 폭은 1.18m였다. 석불은 어깨와 양팔에 법의가 부드럽게 표현되어 있어 통일신라 석불조각 입상 중에 가장 백미인 감산사 석불입상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한편 배모양의 광배 뒷면에는 3층보탑이 양각으로 조각되어 있다. 보탑 1층 탑신 감실 내부에는 석가여래좌상이 힘차게 양각되어 있다. 근계리 석불입상의 발견은 우리나라 불교미술사학계에 커다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현장을 답사한 단국대학교 정영호교수는 불상 광배 뒷면에 3층보탑과 1층감실에 석가여래좌상이 조각된 것은 서기 8세기 인도나 당나라에서 유행한 것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발견된 통일신라 후기의 귀중한 불교문화 유산이라고 고증하였다.
 
현재 근계리 용운사 법당은 목조건물로 신축되었고 근계리 석불입상은 머리부분이 복원되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근계리 용화사 석불좌상과 용운사 석불입상 발견은 1967년도 최남주 부자의 안강지역 고분도굴현장 조사과정에서 파생된 의외의 업적이었다.
편집부 기자 / 2026년 0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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