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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 가을 한국토종서정시인 박재삼을 만나러 삼천포로 떠나자

含閒 2025. 11. 11. 09:35

[기고] 이 가을 한국토종서정시인 박재삼을 만나러 삼천포로 떠나자

  • 기자명경남=손승모 기자
  • 입력 2025.11.10 10:19
  • 수정 2025.11.11 09:01

현암 최정간(매월다암원장 / 차문화연구가)

현암 최정간.(사진=본인제공)

요즘 세상사 돌아가는 것을 보면 마음자리가 몹시 산란하다. 이 가을날 다난한 세상사 한번쯤 잊고 ‘20세기 한국의 마지막 토종서정시인 박재삼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는 쪽빛바닷가 삼천포로 여행을 권하고 싶다. 팔포앞바다의 발레리나 뽈락회도 먹고 실안해안의 낙조에도 물들어보자.

어느 문학평론가는 박재삼(朴在森1933~1997)시인을 가르켜 해방이후 한국인의 가슴을 젖게하는 최고의 서정시인이라고 평하였다. 박 시인의 주옥같은 서정시는 결코 이념에 매몰되지 않고 현학적이지도 않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쉽게 공감할수 있는 절절한 우리들의 토속정서를 노래했다.

 

박재삼 시인은 1933년 일본 도쿄부근에서 출생하였다. 네 살때 해방이 되자 어머니의 고향인 경상남도 사천시 삼천포로 귀향했다. 유년시절부터 고등학교까지 이곳에서 생활하였기에 삼천포가 고향이 된 것이다. 박시인의 시어(詩語)의 원천은 어릴 때 뛰놀던 노산공원의 봄햇살과 파란 삼천포 앞바다였다. 박재삼 서정시가 세월이 흐를수록 지위고하와 빈부귀천을 떠나 온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이유는 우리민족만이 가질수 있는 애틋한 그리움과 정한(情恨)을 쉽게 노래하였기 때문이다.

생전에 박재삼 시인(사진=박재삼문학관)

시인(詩人)과 다연(茶緣)

필자는 현역 육군사병신분으로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에 연루되어 당시 악명높은 남한산성 육군형무소에서 징역살이를 시작하였다. 그해 겨울 남한산성 아래는 눈이 엄청 내렸고, 동장군이 맹위를 떨쳤다. 마침 이곳에서 이해찬 전 국무총리와 그 엄혹했던 겨울한철을 함께 보낸 추억이 있다. 독서광인 이해찬 전총리로부터 다양한 책들을 얻어볼수가 있었다. 그중에 박재삼시집도 포함되었다. 이때 필자는 박시인의 시를 처음으로 접했다.

1981년 1월24일 비상계엄이 해제되자 1월31일 이 전총리는 민간교도소인 안동교도소로 이감을 갔다. 필자와의 눈인사로 기약없는 작별을 하였다. 나는 그해 3월 특별사면조치를 받아 출소하였다. 당시 말이 특별사면이지 5공 군사독재정부는 각종 정보기관을 동원하여 출소한 사람들에 대한 미행이 심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남한산성 옥중에서 계획했던 일본 국보인 이도다완(井戶茶碗)의 고향을 찾아 경남 하동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삼천포출신의 한국 차문화연구가인 손상봉 선생을 통해 많은 조언을 받을수 있었다.

1982년 3월경 손상봉 선생이 서울에 상경하는 길에 박재삼시인을 만날 계획이 있는데 나에게 같이 가자고 권했다. 손상봉선생과 박재삼시인은 옛날 삼천포에서 바로 이웃집에 살았다고하였다. 손선생이 손위라서 박시인이 형님이라고 불렀다. 이렇게해서 서울 충무로에 있는 한다실(韓茶室)에서 박재삼시인과 첫만남이 이루어졌다.

우리들은 그윽한 다향이 감도는 하동 작설차 한잔으로 동서고금의 인문학 이야기를 꽃피웠다. 조금있으니 시조시인 정완영선생과 서벌선생, 수필가 박춘근선생까지 동석하니 다향(茶香)과 시향(詩香)이 만당(滿堂)을 이루게 되었다.

박시인의 첫인상은 마치 시골동네 마음씨 좋은 아저씨 같은 느낌이었다. 조용히 내비치는 눈웃음은 40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있다. 필자의 고향이 경주라고하니 친근감을 표하면서 경주출신 박목월시인 이야기를 하였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박목월선생 생가방문에 동행을 부탁하였다. 이렇게 하동 작설차로 시작된 박재삼시인과 인연은 하동출신 정공채시인과 함께 계속이어져 왔다.

박시인은 시만 잘쓰는 것이 아니라 한글서예 솜씨가 달필경지였다. 그야말로 시(詩), 서(書), 인품을 겸비한 고사(高士)였다. 박시인은 필자를 만날때마다 “현암, 내가 하동 현암도방에 가서 분청사기 항아리에 내 시를 써서 구워보고 싶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약속은 병마 때문에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지금생각하니 무척 아쉽다.

1987년 봄 세번째 시집 『울음이 타는 가을 江 』을 출간하였다. 그해 봄 저녁 인사동에서 시인 정공채, 진의장 화백(당시 하동세무서장). 박정수 한국일보사회부장, 문학청년이었던 배재욱 부장검사, 현암 최정간등과 함께 간단한 축하연을 가졌다. 진의장 화백이 류량(瀏亮)한 목소리로 ‘울음이 타는 가을 江’을 낭송하자 박시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필자에게도 시집에 사인을 해주어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박재삼시인 친필사인.(사진=필자 제공)

박시인을 만날 때마다 순박한 조선분청사기 맛과 멋을 느낄수가 있었다. 막걸리와 맥주를 좋아하여서 한잔 거하게 들어가면 은방울자매의 ‘삼천포아가씨’와 문주란의 ‘동숙의 노래’를 곧잘 부르곤 하였다. 나의 손을 꼭 잡으면서 “현암 서울 상경할때마다 정공채시인과 함께 맥주한잔하고 내려가시게나” 하는 말이 지금도 귀에 쟁쟁히 들린다.

삼천포 노산공원에 세워진 박재삼 문학관

박시인은 관상적으로 볼 때 ‘문수신약(文秀身弱. 시는 빼어났는데 몸이 허약하다는 뜻)상이다.

30대중반에 고혈압으로 쓰러져 평생을 병마와 싸우면서 붓한자루로 원고지에 투혼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1995년 백일장 심사도중 다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고 말았다. 이때 병석의 박시인을 돕기위해 고향의 지인들과 서울의 문우들이 눈물겨운 모금운동을 벌였다. 하늘도 무심하여 그토록 그리던 고향 삼천포앞바다를 다시보지 못한채 1997년 6월8일 파촉삼만리로 떠나고 말았다.

박재삼문학관 전경.

2008년 사천시가 시민들의 중지를 모아 박시인의 문학세계를 기리기위해 유년시절부터 시심(詩心)의 옹달샘이던 노산공원에 박재삼문학관을 건립하였다. 한려수도가 그림같이 펼쳐진 풍광을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3층문학관은 우리나라 최고의 아름다운 문학관이다. 문학관내부에는 시인의 생애를 말해주는 유품과 문학사적인 자료들이 전시되고 있다.

나는 2019년 11월 중학교시절부터 박재삼시인의 시를 애송해왔던 사천출신 황인성 전청와대시민사회수석과 함께 박재삼문학관을 방문한적이 있다. 온화한 성품의 그는 일생을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운동에 헌신해 왔다. 황 전수석은 당시 삼천포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박재삼거리의 활성화를 위해 중앙정부차원의 지원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2022년 사천시에 의해 노산공원 주변에 박재삼문학거리가 조성됐다. 이곳에는 박시인의 대표적인 시가 세겨진 예술적 조형물들이 설치되어 내방객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무엇보다 26회째 개최되는 박재삼문학제는 많은 한국문학제 가운데 큰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박재삼시인은 귀천한후 고향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다. 

이제 하루속히 박재삼시인의 유해도 따뜻한 남쪽 고향 삼천포로 봉환되어야만이 진정한 초혼이 되리라! 

※이 글은 외부 기고입니다.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