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산책(漢詩散步)

畵鶴 / 李達

含閒 2014. 8. 14. 09:30

이달의 화학(삼도헌의 한시산책 322)

           

          

            (화학) - 그림속의 학

 

                              李達(이달)

 

        獨鶴望遙空(독학망요공) : 외로운 학이 먼 하늘 바라보며,

        夜寒擧一足(야한거일족) : 밤이 차가운지 다리 하나를 들고 있네.

        西風苦竹叢(서풍고죽총) : 가을바람에 대숲도 괴로워하는데

        滿身秋露滴(만신추로적) : 온 몸 가득 가을 이슬에 젖었네.

 

                                   

              

 

                            월전 장우성 <학>                                              

           

 

 

 

  삼도헌과 함께 맛보기

 

  우리는 새해가 되면 한 그루의 소나무 옆에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학을 그린 연하장을 받는다. 예로부터 학은 우리말로 두루미라고 부르며, 천년동안 장수하는 새로 사랑받아왔다. 천년이 지나면 청학(靑鶴)이 되고, 다시 천년이 지나면 검은색의 현학(玄鶴)이 되니 불사조로 알려져 있다. 지리산에는 청학이 산다고 알려지면서 청학동이 만들어졌다. 

 

  흔히 학의 맑고 깨끗한 모습이 마치 흰 저고리와 검은 치마를 입은 것과 같다하여 호의현상(縞衣玄裳)으로 부르기도 한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평상시 입던  학창의(鶴氅衣)는 바로 이러한 학의 모습을 본떠 만든 옷으로 흰 바탕의 창의에 깃과 소맷부리, 도련의 둘레를 검은색으로 둘러 학처럼 깨끗하고 고고한 선비의 기상을 드러낸 것이다. 벼슬에 나가 관복을 입을 때 가슴과 등에 붙이는 흉배에 학을 수놓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영조 때 문관으로서 당상관은 구름과 학을 수놓은 운학흉배, 당하관은 백학흉배로 하였고, 고종 때는 모두 학흉배로 고치고 당상관은 쌍학배, 당하관은 단학배로 하였다. 이렇게 학의 흉배를 다는 문관을 학반(鶴班)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학을 가까이 한 우리민족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부터 고려청자, 조선백자, 병풍, 의복, 그림 등 모든 곳에 학을 그리거나 새겼다. 또한 학은 십장생에서 신귀(神龜)로 불리는 거북과 짝지어져 선학이라 불린다. 보통 회갑연 때 선학그림을 선물하면서 “송수천년(松壽千年) 학수만년(鶴壽萬年)” 이란 화제를 적고, 학 무늬의 옷을 짓고, 학을 수놓은 베개를 드리는 것은 불사의 새라는 인식에서이다. 이처럼 학이 작품 속에 등장하면 장수, 행복, 풍요의 운이 찾아온다고 여겼고, 그려서 선물하면 장수를 송촉하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믿었다.

 

  오늘 소개하는 이 시에 나오는 학은 어쩌면 시적화자 자신인지도 모른다. 조선이란 신분사회에서 대접받지 못한 시인은 시를 통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학을 그렸다고 하지만 결국 자신의 처지를 그린 자화상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는 현실을 차가운 밤으로 비유하면서 한탄하고 있다. 홀로 하늘을 바라보면서 날지 못하는 자신의 입장을 학에 견주어 슬퍼한 것이다. 그는 현실에서 벗어나 학이 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학창의(鶴敞+毛衣)

 

 

 

 

  이달(李達;1539(중종 34)∼1612(광해군 4))    

   

  조선 중기의 시인.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서담(西潭)·동리(東里). 제자 허균(許筠)이 그의 전기 〈손곡산인전 蓀谷山人傳〉을 지으면서 “손곡산인 이달의 자는 익지이니, 쌍매당 이첨(李詹)의 후손이다.”라고 밝혔다. 신평이씨(新平李氏)의 후손이고, 서얼이어서 가계는 더 이상 알 수 없다. 원주 손곡에 묻혀 살았기에 호를 손곡이라고 하였다.

 

 이달은 당시의 유행에 따라 송시(宋詩)를 배우고 정사룡(鄭士龍)으로부터 두보(杜甫)의 시를 배웠다. 박순(朴淳)이 그에게 시를 가르치면서 “시도(詩道)는 마땅히 당시(唐詩)로써 으뜸을 삼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시도(詩道)가 여기에 있음을 깨닫고 당시를 익혔다. 이렇게 5년 동안 계속 당시를 배운 뒤에는 그의 시가 예전과 달라졌다.

 

 한편, 시풍이 비슷한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과 어울려 시사(詩社)를 맺어, 문단에서는 이들을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봉은사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지방을 찾아다니며 시를 지었는데, 주로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모였다.

 

 이달은 서자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문과에 응시할 생각을 포기하고, 온 나라 안을 떠돌아다니면서 시를 지었다. 그러나 성격이 자유분방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소외당하였다. 한때 한리학관(漢吏學官)이 되었지만, 벼슬을 버리고 떠났다. 중국 사신을 맞는 접빈사의 종사관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의 시는 신분제한에서 생기는 한(恨)과 애상(哀傷)을 기본정조로 하면서도, 따뜻하게 무르녹았다. 근체시 가운데서도 절구(絶句)에 뛰어났다. 김만중(金萬重)은 ≪서포만필≫에서 조선시대의 오언절구 가운데에 그가 지은 〈별이예장 別李禮長〉을 대표작으로 꼽았다.

 

 제자 허균은 〈손곡산인전〉에서, “그의 시는 맑고도 새로웠고, 아담하고도 고왔다(淸新雅麗). 그 가운데에 높이 이른 시는 왕유· 맹호연· 고적(高適)· 잠삼(岑參) 등의 경지에 드나들면서, 유우석· 전기(錢起)의 풍운을 잃지 않았다. 신라· 고려 때부터 당나라의 시를 배운 이들이 모두 그를 따르지 못하였다.”고 평하였다.

 

 그는 일흔이 넘도록 자식도 없이 평양의 여관에 머물다가 죽었다. 무덤은 전해오지 않고,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군청 앞과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 손곡초등학교 입구에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시집으로 허균이 엮은 ≪손곡집≫(6권 1책)이 있다.

 

 

 

 

 

서예세상 삼도헌 글방(http://cafe.daum.net/callipia)

 

삼도헌의 한시산책 322(2014년 8월 13일 발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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