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산책(漢詩散步)

水仙花/金正喜

含閒 2014. 6. 14. 08:15

추사 김정희의 수선화(삼도헌의 한시산책 324)

 

 

 

  

     추사 김정희의 수선화도 탁본, 제주도 추사박물관

 

 

 

 

水仙花(수선화)

 

 

 

金正喜(김정희)

 

 

 

    一點冬心朶朶圓 (일점동심타타원) 한 점의 겨울 마음 송이송이 둥글어라

 

 

     品於幽冷雋 (품어유담냉준변) 그윽하고 담담한 기품은 냉철하고 빼어났네.

 

 

    梅高猶未離庭砌 (매고유미이정체) 매화가 고상하다지만 뜨락을 못 면했는데

 

 

    淸水眞看解脫仙 (청수진간해탈선) 맑은 물에 해탈한 신선을 정말 보는구나.

 

 

삼도헌과 함께 맛보기

 

문인화가들이 즐겨 그리는 화목 가운데 하나가 수선이다. 수선을 일러 금잔옥대(金盞玉臺)여사화(女史花)설중화(雪中花)능파선(凌波仙)이라고도 한다. 금잔옥대는 금으로 만든 술잔과 옥으로 만든 잔대란 뜻으로 수선의 생김새가 노란 꽃은 금잔 같고 하얀 꽃잎은 옥잔대 같다는 데서 이르는 말이고, 설중화는 눈 속에서 피어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능파선은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의 아들 조식이 사모한 절세미인 견희(甄姬)가 있었는데 형인 조비가 황제로 등극하면서 이 여인을 황후로 삼는 바람에 마음속에 담아두고만 있었다. 그 여인이 죽자 조비는 견희가 사용하던 옥베개를 아우인 조식을 조롱하기 위해 주었다. 그 베개를 가지고 물결이 일렁이는 낙천(洛川)을 지나면서 견희를 수신(水神)에 빗대어 지은 문장이 시인묵객들이 자주 인용하는 유명한 낙신부(洛神賦)’이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수선화를 능파선이라고 불렀다.

 

수선화의 유래에 대해 서양의 전설을 보면, 수선화의 속명(屬名)인 나르키수스(Narcissus)는 그리스어의 옛 말인 'narkau'(최면성)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키소스라는 아름다운 청년이 샘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하여 물속에 빠져 죽은 그 자리에 핀 꽃이 수선화라고 한다. 꽃말은 자존’, ‘자아도취이다.

 

조선시대 때 수선화가 무척 귀했던 듯하다. 그러기에 선비들이 더욱 갖고자 한 꽃이었다. 선비들은 중국 연경에 가는 이들에게 부탁해 그 뿌리를 어렵게 얻어다 키웠다. 추사도 24세 때 연경에 가서 처음 수선화를 본 뒤 매료되었다. 43세 때 평안감사로 재직하던 부친을 뵈러 갔을 때 마침 연경에 다녀오던 사신이 평안감사에게 수선화를 선물하자 그것을 달라고 졸라 당시 남양주에 있었던 다산 정약용에게 선물로 보냈다. 이 사실은 다산이 추사로부터 수선화를 받고 흡족해 지은 시로 확인된다. 55세 때 제주도로 유배되어 대정에 이르니 곳곳에 수선화가 자라고 있었다. 조선에 없는 것으로 여겼던 수선화가 제주에서는 농부들이 소의 먹이로 사용할 정도로 흔하게 자생한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긴 사람도 추사였다. 추사는 이를 보고 귀한 사물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면 이렇게 천대를 받는다는 애련한 의미를 담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훗날 추사 김정희의 그림과 글씨를 좋아한 사람들이 '완당탁묵(阮堂拓墨)'이라는 여러 탁본을 간행했다. 그 중에 수선화부(水仙花賦)라는 것이 있다. 수선화를 노래한 청나라 호경(胡敬)의 명문을 특유의 추사체로 쓰면서 '몽당붓으로 아무렇게 그렸다'는 수선화 그림이 여기에 실려 있다. 이를 통해 추사가 얼마나 수선화를 가까이에 두고 완상했으며 관심이 많았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

 

추사는 위에 소개한 시에서 겨울을 이겨내고 자라나는 수선화를 보면서 그윽하고 담담한 기품을 지닌 식물이라고 상찬한다. 매화는 뜨락 안에 머물지만 해탈한 신선처럼 보이는 수선화는 맑은 물만 있으면 어디서든 자란다고 읊조린다.

 

이렇듯이 동서양의 전설 속에 같이 등장하는 꽃이 수선화다. 아울러 추사가 곁에서 직접 살펴보고 완상한 수선화의 자태를 떠올려보고, 수선화에 담긴 전설도 생각해 본다

 

 

김정희(金正喜,1786~1856)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금석학자, 고증학자, 화가, 실학자이다. 자는 원춘(元春), 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보담재(寶覃齋담연재(覃硏齋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이다. 노론북학파의 실학자였다. 한국금석학의 개조(開祖)로 여겨지며,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추사체를 만들었고, 난초 등 문인화에도 빼어났다.

 

1819년 병과(丙科)에 급제하고 효명세자의 사부, 충청우도암행어사, 성균관대사성과 병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1840(헌종 6)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 석방되었다. 1851(철종 2) 영의정 권돈인의 예론(禮論)으로 예송 논쟁이 벌어지자 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1853 풀려났다.

 

추사는 고증학에 뜻을 두어 중국에서 고증학을 수입하였고, 금석학 연구로 북한산의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서예가로 명성을 날렸다. 그 외에도 도서·시문· 문인화에서 독창적이며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는 3천명의 제자를 두었으며, 그들은 19세기 후반 개화 사상가로 이름을 남겼다. 금석학의 오경석과 난초를 잘 그린 대원군 등이 추사의 제자이다. 1934년 그의 문집과 저서, 시문 등을 모은 완당선생전집이 간행되었다

 

 

출처 :   서예세상 삼도헌 글방      http://cafe.daum.net/callipia

 

삼도헌의 한시산책 324, 2014년 6월 13일 발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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