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산책(漢詩散步)

도산 달밤에 핀 매화(陶山月夜詠梅)

含閒 2011. 3. 13. 23:24

 

 

 

 

 

도산 달밤에 핀 매화(陶山月夜詠梅)

 


  퇴계(退溪) 이황(李滉)

 

   獨倚山窓夜色寒  /  홀로 산창에 기대서니 밤기운이 차가운데

   梅梢月上正團團  /  매화나무 가지 끝에 둥근 달이 떠 오르네

   不須更喚微風至  /  구태여 부르지 않아도 산들바람도 이니

   自有淸香滿院間  /  맑은 향기 저절로 뜨락에 가득 차네

 

   삼도헌과 함께 맛보기

 


 삼월은 봄의 전령사인 매화가 피는 계절이다. 우리의 선비들은 ‘매화는 한평생을 춥게 살더라도(梅一生寒)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不賣香)’고 노래하면서 매화의 기품을 닮으려고 노력했다. 선비들이 매화를 선호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매화는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려 북풍한설 차가운 이른 봄에 고운 꽃을 피워내는 식물이다. 매화의 기질은 끈질기고 강인하며, 고결한 기품을 지니고 있는 선비의 속성과 비슷하였기에 늘 가까이에 두고 본받으려고 했던 것이다. 예컨대 조선의 대학자 퇴계 이황(1501~1571)은 특히 매화를 좋아하여 100여수의 매화시를 남기면서 매화의 고결한 기품을 상찬하였다.

 

 오늘은 퇴계가 남긴 <도산 달밤에 핀 매화((陶山月夜詠梅)> 여섯 수 가운데 한 수를 소개한다. 무릇 올곧은 선비는 지조를 자신의 목숨처럼 소중히 여겼고, 상황이 어려워도 절대 지조를 잃지 않는 굳건한 정신을 지녔다. 퇴계 또한 이러한 정신세계를 지닌 인물이었다. 이 시에서 퇴계는  밤늦게 홀로 일어나 창문을 열고 매화나무 가지 위에 걸린 달을 바라본다. 이윽고 산들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니 그 바람을 타고 향기가 온 뜰과 집안 구석구석까지 가득하다는 정경을 마치 한 폭의 수채화처럼 묘사해 내고 있다.  아무리 시절이 하수상해도 매화처럼 향기를 지니면서 자신의 길을 걷겠노라는 선생의 의지가 담긴 절절한 시이다.

 

 퇴계가 매화를 가까이 두고 완상한 고사는 많다. 매화가 피기 전 섣달 초순에 눈을 감으며 “매화에 물을 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또한 단양군수 시절 관기 두향과 매화에 얽힌 일화는 유명하다. 지조있는 어른인지라 두향은 선생의 마음을 얻지 못해 애간장이 녹아 났다. 선생이 매화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조선 천지를 뒤져 고매(古梅) 한 그루를 찾아내어서 선생에게 바친 이후로 선생의 마음을 얻었다고 한다. 선생이 새 임지로 떠난 뒤에는 도산으로 그 매화가 옮겨졌다고 한다. 단양에 홀로 남았던 두향은 선생의 부음을 듣고 앉은 채로 숨을 멈춰 버렸다는 전설이 매향처럼 그립기만 하다. 위 시 <도산 달밤에 핀 매화>는 이와 같이 매화를 좋아한 퇴계의 마음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 1501~1570)

 


 이름은 황(滉),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 등이며, 관향은 진보(眞寶)이다. 퇴계는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태어났다. 출생에서 33세 때까지는 유교경전을 연구하는데 열중하였던 수학기였고,  34세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여 49세 때 풍기 군수를 사직하고 귀향할 때까지 임관기를 보냈으며,  50세~70세 때까지 임명과 사퇴를 반복하면서 고향에서 연구, 강의, 저술에 전념한 강학기로 나눌 수 있다.  퇴계는 70세 되던 1570년(선조 3년)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임종직전 조카에게 명하여 유서를 쓰게 하였다. 유서에는 첫째, 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 것, 둘째,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의 전면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라고만 새기고, 그 후면에는 간단하게 고향과 조상의 내력, 뜻함과 행적을 쓰도록 당부하였다. 그의 인품은 매화향과 같았으니 우리는 이러한 유언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