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사이 내린 눈(雪夜)
이아금침랭(已訝衾枕冷)/ 아, 왠지 잠자리의 한기가 느껴져
부견창호명(復見窓戶明)/ 다시 보니 창문의 빛이 환하구나
야심지설중(夜深知雪重)/ 깊은 밤 무거운 눈 내린 걸 알겠으니
시문절죽성(時聞折竹聲)/ 가끔 대나무 꺾이는 소리 들리네
삼도헌과 함께 맛보기
연일 영하로 내려가는 날씨탓인지 곳곳에서 눈소식이 전해온다. 오늘은 차가운 겨울밤 눈내리는 소리를 훌륭하게 묘사한 중국 당나라 때의 거장 백거이의 시를 소개한다. 그는 흔히 '풍유시인(風諭詩人)'으로 불린다. 이 시는 5언절구지만 이 시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은 정밀하면서도 세련미가 돋보인다. 한국의 시인 김광균은 '설야(雪夜)'라는 같은 제목의 자유시에서 밤에 눈이 오는 모습을 '먼 곳에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표현한 바 있다. 백거이는 위의 시에서 '환한 창문의 빛'을 보고 눈이 많이 왔다는 것을 알았고, '대나무 꺾이는 소리'로 눈쌓인 풍경을 잘 그려내고 있다.
1구에서 잠자리의 ‘한기'가 의문을 제기한다면, 2구에서 환한 '창문의 빛'은 그에 대한 답변이 된다. 그리고 3구의 '무거운 눈'이 근심걱정이라면, 4구의 '대나무 꺾이는 소리'는 그 근심의 결과가 된다. 아울러 1,2구는 시각에, 3,4구는 청각에 호소하면서 시적 완성미를 더한다. 이 절구에서 우리는 작가의 놀라운 언어절제감, 즉 시어의 함축미를 느끼게 된다. 깊은 겨울밤에 눈이 쌓인 느낌을 ‘대나무 꺾이는 소리'라는 한 마디의 청각이미지로 표현하는 멋진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백거이(白居易,766-826)
중국 중당시대(中唐時代)의 시인. 자는 낙천(樂天),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 시호는 문(文). 백거이는 800년 29세 때 최연소로 진사에 급제했다. 그 재능을 인정받아 한림학사(翰林學士), 좌습유(左拾遺) 등의 좋은 직위에 발탁되었다. 808년 37세 되던 해에 부인 양씨(楊氏)와 결혼했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편 시 〈장한가 長恨歌〉에는 부인에 대한 작자의 사랑이 잘 반영되어 있다. 그가 지은 작품의 수는 대략 3,840편이라고 하는데, 문학 작가와 작품의 수가 크게 증가한 중당시대라 하더라도 이같이 많은 작품을 창작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더구나 그의 작품은 형식이 다양하여 고체시(古體詩) , 금체시(今體詩:율시) , 악부(樂府), 가행(歌行), 부(賦)의 시가에서부터, 지명(誌銘) , 제문(祭文) , 찬(贊) , 기(記) 등 산문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학형식을 망라했다.
그는 1편의 시가 완성될 때마다 노파에게 읽어주고 어려워하는 곳을 찾아 고치기까지 할 정도로 퇴고(推敲)를 열심히 했다. 백거이가 자신의 시문에 일상어를 유효적절하게 구사한 것도 그의 표현을 간명하게 한 큰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가 일상어를 사용한 것은 구어문학(口語文學)을 추구했기 때문이 아니다. 문언(文言)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구어를 자신의 언어 속에서 활용하려 했을 따름이었다. 또한 그는 어휘를 매우 신중하게 선택했다. 고금문학(古今文學)에 나타난 어휘를 천지(天地), 산천(山川) , 인사(人事), 조수(鳥獸) , 초목에 이르기까지 1,870개 부문으로 분류하여 〈백씨육첩 白氏六帖〉 30권을 펴냈다. 이 책을 통해 그가 어휘를 선택하고 그 의미를 확인하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이백(李白), 두보(杜甫), 한유(韓愈) 등 백거이와 이름을 나란히 하는 시인의 작품에는 송대 이래 많은 주석서가 있는 데 반해, 〈백씨문집 白氏文集〉에는 그러한 주석서가 없는 것 또한 특기할 만하다. 종래의 주석서는 난해한 말에 관한 출전을 찾아내어 설명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나, 백거이의 작품에는 이러한 주석서가 필요없었던 것이다.
백거이는 문학으로써 정치이념을 표현하고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여 실제 행동에 옮기도록 하는 것을 문학활동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러나 815년 강주사마로의 좌천과 목종의 죽음은 그에게 큰 좌절을 안겨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정치 문학으로부터 탈피하여 인생의 문학을 추구하게 되었다. 장경(長慶) 4년(824) 목종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친구 원진에 의해 〈백씨장경집 白氏長慶集〉 50권이 편찬되었다. 당시 백거이의 나이는 53세였으며 '장경'은 목종의 죽음과 동시에 새로이 바뀐 연호였다. 따라서 〈백씨장경집〉은 죽은 천자의 후한 대접을 그리워함과 동시에 자신의 인생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835년 백거이는 60권본의 〈백씨문집〉을 강주 둥린 사[東林寺]에 봉납했고, 이듬해 65권본을 뤄양의 성선사(聖善寺)에, 3년 후 67권본을 쑤저우의 남선사(南禪寺)에 봉납했다. 842년 이전의 50권 이외에 '후집'(後集) 20권을 정리하고 이어서 845년 5권의 '속후집'(續後集)을 편찬함으로써 합계 75권의 '대집'(大集)을 완성했다. 846년 8월, 75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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