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구한 인생 서사시
-밤의 길이 1,300 m
綠苑 李 文 浩
4. 자유 대한에서
하와이 한인 기독교회 마당 한구석에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이 뜬 구름 한 자락 잡고 서서 나를 따르지 말라고 외치고 있다
육군 소위로 임관하다
1955년10월8일 육군 통신학교의 교육 보조재료 과에서 3년을 근무하고 제대를 앞두고 있는 어떤 날 보좌관께서 “제대하면 특히 할 것도 없고 갈 곳도 없으니 후보생 가서 장교가 되는 것이 어떻냐”고 물으며 서류절차는 자기가 모두 준비하겠다고 했다
그때 후보생 모집이 있다 하여 같은 과에서 근무하며 내 옆 자리에서 자던 친구하나가 응시한다고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이불 속에서 들으며 잠들곤 하였다
그것이 도움이 되여 좋은 성적으로 마지막 판정관 앞에 섰을 때 “응 시험 잘 봤군. 나는 국사를 좀 물어 보겠다”고 하기에 나는 “그만하세요. 나는 국사를 모릅니다. 이북에서 소련 공산당사와 인류사회 발달사 밖에 배운 것이 없습니다” 하였더니 “야, 이거 아쉬운데…” 하며 한참을 생각하더니 “좋아, 부대에 나가 야사 책이나 많이 보라우” “합격!” 하기에 “합격”하고 복창하고 6개월 후보생 교육을 받고 일등으로 졸업 세 돈짜리 황금 메달을 부상으로 받았으나 이 땅에 축하해 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당당한 대한민국의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연천에 있는 보병사단 통신 중대에 배치되었다
초등 군사반 교육
1955년 말 임관하여 부대 배치를 받고 나면 의례히 고참 상사들이 신임소위에게 골탕을 먹이거나 시험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어떤 토요일 날 주번사관이 되여 난방용 나무를 하려보내기 위해 집합시켰는데 한 소대가 집합하지 않아 뛰어 가보니 선임하사가 훈시한다고 집합을 못하게 하고 있었다
선임하사에게 빨리 사병을 내어 보내달라고 하니 내 이야기가 끝나면 보내준다며 보지도 않는다 화가 나서 들고 있던 침대 받침대로 후려 갈겼는데 아이고 하며 팔을 안고 쓰러졌다
그의 팔은 부러져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알고 보니 우리 보좌관과 같은 고향 사람이라서 미움을 받고 초등 군사반에 교육 차출이 되었다
원래 초등 군사반은 임관 후 최소 6개월 이상의 부대경험을 한 후에 받게 된 교육과정이다
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항의하다 결국 초등 군사반에 가게 되었고 가면서 일등을 하여 학교 교관으로 남아 다시는 이 부대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하며 부대를 떠났다
뜻대로 일등을 하였지만 소위는 교관이 될 수 없다고 하여 보좌관의 미움을 각오하며 원대 복귀했고 부상인 “파카 51 만년필 세트”를 보좌관에게 선사했다 그 후 보좌관은 나를 극진히 아껴주었고 오래도록 인간적으로 친하게 지냈다
도미시험에 응시하라고?
1964년 8월 나는 원래 책을 좋아해서 옛날에 나를 만났던 사람이 지금 만나면 이름은 몰라도 아 늘 책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구나 하고 내 이미지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지금이나 그 당시나 책을 많이 읽었는데 그때에는 주로 영어 책이었고 그 때의 책이란 스탠리의 ‘삼위일체’가 유일하게 문법과 해석을 같이한 종합 책이고 그 밖에 Dixon series가 판을 칠 때에 내 손에는 일반 문학 작품 보다 영어책이 주였다
원주에 근무할 때 우연히 영어를 좀 하는 지휘관과 고문관이 업무상 이야기를 나누다 언어 관계로 서로 자기주장을 하는 곳에 참석했던 내가 지휘관에게 이러이러한 뜻 같은데요 하고 말했더니 맞았어 하고 곧 토론이 진행되었던 일이 있었다
얼마 후의 어떤 날 지휘관의 급한 호출을 받고 달려갔더니 지금 육군본부에서 도미 코스가 하나 있는데 적임자가 없다니 내일 아침 당장 육군 본부에 등록을 하란다 나는 극구 반대했다
도미유학을 갈라면 육군 부관 학교에 가서 수개월씩 교육 받다가 코스 있을 때마다 시험을 거처 선발하는데 직접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였다
하도 강력히 명령하므로 서울 구경이나 할 겸 대답을 하고 기차를 이용 서울로 가는 도중 서울역에 도착해서 용산가는 버스 안에서도 삼위일체를 보며 육군본부에 도착했다
행운의 도미시험
1964년 8월
육군본부에 도착해보니 단 한 명의 도미수학에 다섯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강당에서 필기시험을 보았다 그런데 이럴 수가, 지금 막 버스 속에서 이런 문제는 길고 어려우니 안 나올 테지 하며 일독을 한 그 문제가 빙긋이 웃으며 얼굴을 내밀었다
한참 기억력과 회전이 빠를 때인지라 책을 베끼듯 답안을 썼다 결과는 나와 세 사람이 합격을 했다
그리고 다시 미군 상사가 녹음기를 가지고 들어 왔다 답안지를 돌리고 녹음기를 틀고 녹음기의 문제를 듣고 답을 쓰란다
솔직히 독학한 사람이 육성도 아닌 스피커소리를 듣고 이해가 되겠는가 한데 세 사람이 웅성웅성하다 상사에게 질문을 한다 상사와 몇 마디 이야기를 하더니 상사가 오직 나에게 들리는 I’m sorry, I’m sorry를 연발하며 나갔다 옆 친구에게 물었더니 녹음기에서 나오는 문제와 답안지가 다르므로 답안지에 맞는 테잎을 갖고 오라 했단다
천재일우의 기회 얼른 OX형 그리고 선다형에서 정답이 될만한 것에 답을 쓰고 애매한 것은 체크를 하여 녹음기소리를 듣기로 했다
시험이 끝나고 발표하는데 한사람 떨어져 세 명이 합격했고 그 상사를 따라 마지막 구두시험을 받으러 8군 사령부 통신부로 갔다 그곳에 파견된 나를 잘 아는 한국장교는 나를 보고 깜짝 놀라며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고 저 두 친구는 부관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라며 기왕 왔으니 시험관하고 될 수 있으면 오래 끌며 이야기를 많이 해서 실력을 과시하란다
첫 번째 들어간 친구가 십 여분 후에 땀을 죽죽 흘리며 구두시험을 마치고 나온다 다음은 내 차례 심호흡을 크게 하고 시험관과 대좌했다 시험관이 무엇이라고 하는데 알 수가 있을 리 없다 그런데 한 단어 ‘Experience’ 한 단어가 귀를 거슬리고 지나간다
속으로 “음” 경험이 있느냐 이 소리렷다 하고 지금 교육대에서 그 과목의 교관을 하고 있소 하였 더니 용하게 알아듣고 “OK”하며 나가란다 오래 끌라고 했는데 불과 이삼 분 만에 나오는 나를 보고 내 친구 또 한번 어떻게 된 거야 하고 물었다 다음 친구도 십 여분 땀을 닦으며 나왔고 조금 후 합격자로 내 손을 들어 주었다
Hot-Dog
1964년 10월
이 해에 뉴욕에서 세계 박람회가 열렸다 BOQ 의 구조가 가운데 부엌이 있고 양쪽으로 방이 있었는데 다행히 내 옆방에는 점잖은 분(용산 도원동 교회에서 은퇴한 박영철 목사님)이 계셨는데 세계박람회를 생전에 다시 구경하기 어려우니 구경 가자고 해서 한 시간 거리인 뉴욕에 있는 박람회장에 갔다
얼마를 돌았는지 출출해서 음식점을 찾는데 여기 저기 Hot-Dog라 씌어진 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이상한 것들을 먹고 있었다
여기 미국에서도 개고기를 먹고 있는가 보지? 그런데 관광객들이 먹기 좋게 만들어 파는군 하며 사먹어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런 것들이 모두 1960년대 한국 음식 문화의 현 주소였다
태평양 횡단 비행기에서
1964년 8월11일 신체검사 예방주사 여권 등 출국수속을 초특급으로 마치고 김포 미 군용비행장을 통해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에는 모두 미군과 외국 민간인 홀로 검은 머리를 의자에 의지하고 있었다
잠시 후 이륙했다 이제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고 국제신사로서 부끄러움 없는 행동을 해야 한다
얼마 후 공항에서 먹은 식사가 긴장 탓인지 소화가 되지 않아 남 몰래 아픈 배를 틀어쥐고 신음하고 있는데 늙은 스튜어디스 낌새를 알아차리고 어디 불편 하느냐고 하기에 배를 가리키며 인상을 썼더니 오퓸인 듯한 흰 물을 주길래 마셨더니 곧 나아졌다
샌프란시스코의 트래비스 공항에 도착하여 호텔에 짐을 풀고 레스토랑에 들렀다
배는 고픈데 무엇을 먹어야 할지 몰라 웨이터를 불러 내게 맞는 음식을 달라 했더니 알아서 가져왔는데 불면 날아 갈 듯한 알랑미 밥에 직경이 사 센티미터쯤 되어 보이는 녹색 알 같은 것 하나가 먹음직하기에 어떻게 먹느냐 물었더니 마음대로 먹으란다
깎아 먹는 것인지 베어 먹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입으로 씹어 먹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에잇 모르겠다 싶어 집어서 먹으려 하니 참외 냄새가 난다, 멜론 이었던 것이다 멜론 하나를 먹고 다른 것은 손도 못 대고 계산을 하는데 서비스 챠지까지 삼십삼 불
고픈 배를 움켜쥐고 나오다 보니 큰 접시에 먹을 것을 담아가는 식당이 눈에 띄어 저거다 싶어 들어가 이것저것 올려놓고 계산대에 갔더니 여기에서도 삼십 불정도 되었다 부관학교에 갔던들 이런 것 모두를 배웠을 텐데…
미 통신학교에 도착하다
1964년 9월 말 뉴욕의 케네디 공항에 도착하니 통신학교에서 중위 한 사람이 마중 나와 있어서 곧 바로 통신학교에 도착 BOQ에 짐을 풀었다
다른 코스로 와 있던 분들로부터 여러 가지 많은 것을 들었고 학교 측으로부터 오리엔테이션도 받았다
며칠 후 교재가 한 차 배달되었다 코스가 끝날 때까지의 전 교재를 한 번에 날라왔다 예습도 하고 복습도 하라고…
처음 약 한 달 가까이는 아무것도 안 한다 일교차에 적응하기도 하고 주변을 익히라는 그야 말로 대국적인 여유 있는 배려였다
그렇게 쉬고 있던 어떤 날 한국으로부터 다섯 명의 통신병과 대령이 미국무성 초청으로 여기에 들렀는데 며칠 후에 다시 올 터이니 뉴욕에 있는 록펠라 센터 606호 점에 코티粉 파는 곳이 있으니 브래지어와 함께 사다 놓으라며 오백 불을 내 놓았다 당시 제일 인기 있는 분이 프랑스제 코티였고 브래지어는 생산은 못했는데 많이 유행하고 있었다
예의 록펠라 센터는 한 건물이 아니고 보내드리는 쪽지메일(신의 섭리)로 즐겁고 행복한 시간되세요 몇 개 블록을 합한 커다란 블록 606 호는 각 건물마다 동서남북 네 개씩 몇 개가 있는지 모른다 한 시간 여를 수소문 끝에 찾고 보니 창고 없는 조그만한 가게, 오백 불어치를 산다니까 내일 아침까지 배달해 주겠단다 그리고 선물로 이십 센티미터 입방 정도의 통을 주었다
숙소에 돌아와 보니 코티 향수 샘플이 백 여 개, 그들과 한국장교 세 명에게 고루 나누어주었다
후에 알고 보니 그 샘플도 매우 고가였다고 한다 그제서야 조금 후회가 되었다 혼자 가지라는 것이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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