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구한 인생 서사시
-밤의 길이 1,300 m
綠苑 李 文 浩
호랑이 굴 78수용소에 수용되다
1951년11월1일
거제도에 도착한 우리는 간단한 심사와 함께 개인기록카드를 작성하고 100 여명씩 분류되어 각 수용소로 흩어졌다
전도사와 나는 78수용소로 분류되었으며 들어가는 순간 간장이 서늘해졌다 수용소 모든 사람이 인민군 복장을 하고 있었고 우리를 환영한다고 “적기가” 부르고 있었다
간부인 듯한 친구 하나 나와서 “우리는 조선 인민군으로서 조국통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잡혀 온 동무들이요.” 우리는 철저한 인민군으로 재 무장하여 남진해 올 때 통일전선에 다시 서야하오” 하며 일개 내무반에 이 삼 명씩 배치했다
우리를 분류하던 그들은 친공 분자들이었고 일부러 친공 포로들만 모아놓은 78, 77및 76 수용소로 보냈다
당시의 거제도포로수용소의 모습[화보]
몇년전 여행시 둘러본 수용소 앞에서
전도사의 만용
1951년 11월 새로 입소한 사람들에 대한 감시는 철저했다 양 옆에 한 사람씩 보초 세우듯 재우고 용변으로 나가도 동행하고 누구를 만나도 꼭 동행했다
전도사님은 완전히 그야말로 도사였다 제네바 협정에 따르면 포로수용소 안에 교회를 두어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며 여단장 면회를 요청했다
여단장실 요원들이 깜짝 놀라며 동무여기가 어딘데 교회 갖기를 요구하느냐고 했지만 몇 차례의 시도 끝에 면회가 허용됐다
여단장은 여운형의 조카라고 키가 작은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들 같이 악랄하거나 모질게 보이지는 않고 “동무도 짐작은 하겠지만 사무실 밖에서는 말씀 조심하세요”하며 협박 겸 사정 겸 강조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자기 노선에 도전하던가 그렇다고 생각될 때에는 쥐도 새도 모르게 타살, 도마질해서 변기통에 넣어 바다에 버린단다
여단장은 너무나 정면으로 도전해오는 전도사에게서 무엇인가 불안을 느꼈던지 “제발 조용히 있으면 때를 보아 집회할 곳을 내어주던가 교회 있는 곳으로 전출을 보낼 터이니 명단을 내라”고 했다
그리 쉽게 명단을 내어줄 전도사님이 아니었다 우선 순교각오가 되어있는 십팔 명의 명단을 내어주고 며칠 후 그 십팔 명을 포함한 사십삼 명의 명단을 돌에 매여 순찰헌병에게 던져주어 UN 군 당국에 전달했다
78수용소 홀로 탈출
1951년 11월 말
수용소를 분류하던 곳에서 우리들의 인사 기록카드가 작성되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이곳 78여단에서 기록카드를 조사하다 내 기록이 없어져서 없는 사람들을 모아 새로 기록을 만들기 위해 인솔자도 없이 UN군 차량의 운전사에게 인원수만 알리고 기록 작성하는 곳으로 보냈다
가서 살펴보니 기록이 끝난 사람은 기록카드를 가지고 여단 별로 인원수만 맞으면 운전사가 그대로 본래 수용소로 실어가고 있었다
인사 기록이 끝나기 전에 수소문해서 반공여단이 74여단이라는 것을 알아 두었다
새로 작성된 인사 기록카드를 가지고 74여단이 모이는 곳에서 기다리다가 인원 파악할 때 얼른 들어가 앉았다
수용소에서는 인원 파악을 할 때는 앉아서 헤드 카운트라 하여 머리수를 헤아린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머리수를 헤아린 운전사는 한명이 늘었다고 누구냐고 빨리 나가라는 것이다 이때 그 속에서 지적되어 기존여단에 돌아가면 왜 탈출하려 했느냐며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
가슴 조이며 웅크리고 앉았는데 “저기 저 영감 우리 여단에서 온 사람 아니야!”하며 한 영감을 쫓아냈다
인원수를 맞춘 운전사는 그냥 74여단으로 갔고 나는 이제 74여단 사람이 되였구나 하고 생각했다
몽둥이가 내게로 오는 순간
1951년 12월 초 물씬 풍기는 자유의 내음 인민군 군복 대신 잘 다려 입은 ‘사지’ 상하의 여유 없는 경직된 얼굴대신 자연스러이 펴진 얼굴들 살기 어린 모습대신 평화스러운 인상들
차에서 내린 우리들에게 감찰(경비)들이 1대대 들어가! 2대대, 3대대,..8대대 들어가! 하고 원대 복귀를 명하고 나니 8명이 남았다 다시 말해서 타 여단에서 온 것이다
감찰은 우리 8명을 자기네 사무실로 인도하고 사무실 바닥에 푸쉬업 시켰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우측에서부터 거품을 물고 쓰러질 때까지 침대 몽둥이로 내리 쳤다
말을 안 해도 이유는 간단했다 이 여단을 전복시켜 친공 여단으로 하기위해 그들의 여단에서 보낸 첩자들이라는 것 키 작은 나는 제일 왼쪽에 엎드렸다
그렇게 여섯 번째 친구가 거품을 토하며 나자빠졌다 일곱 번째 친구의 궁둥이에 빳다가 내려친다 그때마다 신음소리가 난다 그 신음소리가 점점 작아질 무렵
사무실 문이 열리며 까만 썬 그라스를 끼고 완장에 흰 줄이 가득한 사람이 들어오며 “뭣들이야! 이것들!”하며 호통을 친다 순간 그를 처다 본 나는 나도 모르게 “도오 무라!”하고 외쳤다
1939년 평북 정주에서 삭주 수풍까지 평북선이라는 철도가 개통되어 운영되고 있었는데 그때 그 평북선을 타고 중학에 다닌 사람은 그때의 이름으로 ‘도오무라’ 와 나 밖에 없었으므로 그와 나와는 절친했었다 그 도오무라가 눈앞에 대 권력자로 군림하고 있다 도오무라도 나를 보더니 “야! 이시하라. 일어나, 이거 어케 된거야”하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반공여단에 정착하다
1951년 12월
나를 일으킨 도오무라는 자기 방으로 나를 인도하여 오랜 회포를 풀었고 수용소 안에서는 간부가 되어야지 고달프다며 한참 궁리를 하더니 “너 교원 할 수 있어?”한다 “응, 나 전문학교 교사 였어”했더니 참 잘 됐다고 하더니 누군가를 불러 “교장 오라 해”한다
그 후 나는 화학 교사를 하게 되었는데 우선 침실이 없으니 1대대에 가 있으라며 1 대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주었다
큰 빽이 생긴 나는 도도해져서 1대대장에게 갔다 대대장은 아무 말 없이 대대경비에게 보냈다
경비실에 들어가자마자 엎드리게 하고 몽둥이세례를 퍼 부으며 “넌 잘 못 왔어!” 우익 여단이라도 우리 1대대는 좀 달러하며 후려친다 나는 악을 쓰며 말했다
“좋소! 나는 이제 죽어도 한이 없는 사람이요! 공산주의를 피해 이남으로 왔고 다시 친공 78에서 우익여단이라는 여기까지 왔으니 죽어도 좋소!”하고 절규를 했더니 뭘 가지고 네가 빨갱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느냐며 계속 내려친다
순간 나는 “칼과 종이를 주시오”하고 외쳤다 그랬더니 대기라도 했듯이 칼과 종이가 내 앞에 놓여졌다 나는 오른 손 새끼손가락을 베고 ‘멸공 통일’이라고 썼다 명필가처럼 일사천리로
그랬더니 경비 대장이 손을 내밀며 “알았소, 고생했소 소대에 나가 쉬시오”한다 이렇게 해서 친공 여단에서 반공 민주여단에 정착 하게 되었다
CI&E 교사가 되다
1951년12월 소대생활은 고달팠다 식사는 적어서 공복감을 느끼지 않도록 비옷을 손수건만큼 찢어 밥을 싸서 문지르면 떡같이 되는데 그것을 씹지 않고 그대로 삼켜 오래도록 소화가 되지 않게 하는 사람이 많았다
가만 앉아 있으면 답답하고 더 허기지므로 작업 집합만 있으면 뛰어 나가지만 차례에 들기는 힘들었다
며칠 소대에서 지나고 교원 텐트로 이동했다 장차 포로들의 사회적응과 민주주의의 일원으로 양성하기위한 UN 정보국에서 운용하는 학교이며 과목도 다양했는데 그 중에서 화학 과목을 담당했다 선생이동으로 공석이 생길 때마다 이 과목 저 과목을 담당하여 만능교사로 통했다 물론 영어과목도 담당했었다
이렇게 한가하게 되니 78 여단에 두고 온 전도사님 걱정이 생겼다
혹 나의 탈주로 불리한 처우나 받지 않는지 그리고 사십 여명의 기독교인들은 어찌 되었는지
그러던 그 해 크리스마스 날 밤 옆의 친공 여단인 73에서 갑자기 애국가를 합창하면서 태극기를 흔들어댔다 반공세력이 친공 세력을 물리친 것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73여단 철조망에서 나를 찾는 전도사님을 만나게 되었고 사십이 명의 교인들이 무사히 친공 세력이 전복된 73여단으로 옮겼다는 소식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전해 들었다
자유송환과 문신
1952년 2월
판문점에서 포로교환 협상이 북한의 전원 송환 고집에서 UN의 자유송환 쪽으로 기울어지자 전적으로 환영하면서도 초조해진 반공수용소, 많은 사람이 송환을 원하게 되면 체면 문제 이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문신을 하기로 했다 “반공, 멸공, 반공통일, 멸공통일…”등
만일 이런 것을 거절하면 북으로 갈 의향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의심 가는 회색분자에게는 강요하기도 했다 우리 수용소는 가장 강력한 우익 수용소였으므로 남한에 잔류하겠다는 포로의 수가 제일 많았다
그리고 우리는 문신을 일생 지니고 살게 되었다 마치 666대신 지닌 문신
큰 선택의 순간
1953년 4월
북으로 송환하느냐 남한에 잔류하느냐 결정하는 운명의 날은 밝았다 아침이 되자 정문을 나가는 쪽으로 길 가운데에 테이프를 치고 좌로 가면 고향으로 가고 오른 쪽으로 가면 한국에 남는 장난 같은 인생 분기선이 설치되었다
자유와 귀향 생명과 맞바꾼 자유를 버리고 부모를 만나려고 다시 일생을 희생하려 공산치하로 되돌아가야 하는가? 아무도 없는 남한에 남아 자유를 누려야 하는가? 이미 이 땅에 오면서부터 확신을 가졌었지만 의심치도 않던 사람들이 왼쪽으로 왼 쪽으로 갈 때에 눈이 흐려져 가운데 줄이 잘 보이질 않았다
또 한번 순간의 선택으로 일생을 결정해야 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우측으로 발을 옮겼고 배를 타고 육지로 향하였다
논산 제3수용소에서
1953년 4월
도착한 곳은 낮은 구릉이 여기저기 있는 논산의 어느 곳 4중 철조망 대신에 원형 철조망 한 겹 텐트를 보호하고 있었다 경비 초소도 없이
우리는 완전한 자유를 얻은 성 싶었다 낮에는 외출하여 고향 사람을 만나고 못 만나면 다음 날 다시 나가는 그런 날도 있었기에
정말 이대로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구나 할 즈음 포로의 탈출 방지가 아니라 외부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다고 텐트대신 콘?을 짓기 시작하였고 원형 철조망은 다시 4중 철조망으로 일어섰다
그렇게 되어가던 어떤 날 호사다마라 하던가 친공 반공하며 싸우며 살다 너무도 평화로우니 또 한 차례 지역간 그리고 감투싸움 바람이 일어났다
싸움을 좋아하는 민족
1953년 5월
500명 단위로 수용 구역이 형성되고 행정요원과 경비(일명 감찰)요원이 선정기준도 법도 없이 자체로 결성하다 보니 8개 대대가 행정요원은 황해도 경비 요원은 평안도가 차지하게 되었다 지방의 성격상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수용소 본부는 항상UN군과 접촉하기 때문에 여단 서기로 일하게 된 나는 500명 단위가 아닌 별도의 텐트에 기거하게 되었다
어떤 날 아침 눈을 뜨니 확성기에서 많은 사람들을 호출하고 있었다 어제 밤 이름 하여 황-평도 간 싸움이 일어나 관련자들을 색출 이동시키기 위한 호명이었다
싸울 대상이 없으니 세력다툼 또는 지역간 분쟁이라도 해야 하는 민족이었던가?
탈출 전야 1953년 6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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