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구한 인생 서사시
-밤의 길이 1,300 m
綠苑 李 文 浩
탈출 전야
1953년 6월 17일
1951 년10월18일부터 오늘까지 육백사 일 양구에서 춘천 영등포를 거쳐 거제도 이승과 저승을 시시각각으로 넘나드는 나날이었다
일과를 끝내고 퇴근한 여단간부 숙소로 밤에는 출입이 금지된 이곳에 한국군 경비대소속 정 대위(평북 정주 출신)가 병장계급장을 달고 순찰병으로 가장하고 들어와 엄청난 명령을 하고 나갔다
“오늘저녁 열 두 시를 기하여 탈출하라 한국군은 할 수 없는 경우에 공포탄 또는 하늘로 발사 할 테니 관계치 말고 탈출하라”
무슨 청천벽력인가! 우리는 열 두 시 이전에 탈출구를 만들고 열두 시 신호를 대기하라고 팔 개 대대에 긴급 연락병을 보냈다 물론 가급적으로 타워 위의 한국군 경비도 모르게 연락이 되고 탈출구도 내야 한다고 했다
열 시, 열시반 모든 포로들은 자기가 쓰던 생활용 도구 미싱 목공용 공구 간단한 침구 옷 등을 꾸리고 신발 끈을 매고 열 두 시 되기만 기다리는데 계획에 없던 미군의 임시 수색(쎈터 라고 했다)이 시작되었다 보통 같으면 퇴근 전에 여단장을 통해서 통보되던 행사였다
쎈터 들어온 미군 지휘관은 모두 짐을 꾸리고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을 보고 깜작 놀래 여단장에게 이유를 물었다
여단장은 태연하게 귀관도 느꼈겠지만 육지로 온 후 대원들이 너무 질서가 안 잡히고 행동이 늘어져 훈련 중이라 했으며 그들은 그것을 믿었고 다음 대대로 들어갔는데 열두시가 되었다 우리는 탈출신호 하달을 주저하였다
엑서더스
1953년 6월 18일 새벽
우리는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일개 대대 때문에 일개여단 사천 명이 탈출 못한다면 대 용단을 내린 대통령의 명령 위반이며 다음에 삼천 오백 명에게 어떻게 사죄해야 하는가
일 개 대대를 희생시키기로 하고 횃불로 둥근 원을 그려 탈출신호를 했다 경비병 몰래 뚫어 놓은 탈출구는 오 백 명이 동시에 탈출하기에는 너무 작았다 게다가 경비병이 퍼부어대는 총소리에 겁에 질리고 탈출해야 된다는 초조함에 질서는 무너지고 탈출 속도는 말이 아니었다
겨우 다 내보내고 뒤따라가는데 물을 대 놓은 논에는 가지고 나가던 짐들이 여기저기 섬이 되어 온 논에 흩어져 있었다 날이 밝아 뒤돌아보니 수용소가 바로 옆에 있었다 앞서간 포로들은 벌서 민가에 들려 옷을 갈아입으며 보호를 받고 있었다
수용소 탈출 후
1953년 6월 19일
날은 밝았다 내가 있던 논산 제3수용소에서의 탈출이 가장 성공리에 이루어졌다
탈출 포로들을 수용한 민간 집에서는 새벽부터 밖의 정보를 전하노라 정신이 없었다 미 헌병 백차들이 거리거리를 순회하며 의심나는 사람은 마구 잡아들인다는 것
어떻게 알았는지 잡기만하면 팔뚝의 문신을 확인 한다는 것이다 약삭빠른 친구들은 동네 의원에서 문신을 도려내는 수술을 하는 사람도 있고 대부분은 순찰이 뜸해질 때까지 집안에만 있었다
날이 갈수록 우리를 수용한 민가도 힘들었고 우리도 더 폐를 끼칠 수 없게 되자 군에서 우리를 각 면으로 분산 수용키로 하였다
양촌리 공비사건
1951년7월초
현지 사정으로 각 면으로 분산되었고 나는 논산군 양촌면 인천리로 옮겼다 내가 들은 집은 면내 유지로 사남 삼녀로 장남과 3남이 면사무소 사무원 둘째가 이발사이고 맏딸은 장성하여 가사를 도왔고 장터에서 장날이면 장꾼들이 북적거리는 집이었다
나는 면 소재지에서 면내에 흩어진 사람들을 파악 옷감 쌀 배급 등을 나누어 주는 등 인원 통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어떤 날 한 밤중에 총성이 요란스럽게 잠든 부락을 깨웠는데 공비가 출현했다고 법석이며 출소자들이 공포에 쌓여 나에게로 몰려들었다 “무슨 소리냐, 무엇이 두렵냐, 나를 따라 오라”하고 그들을 이끌고 총성이 한창인 면사무소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경찰 지서장, 면장, 서원과 면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 상황을 들어보니 한 서원이 공비 꿈을 꾸다가 무서워 총을 쏘았는데 같은 보초를 보던 서원이 덩달아 총을 연발로 쏘았다는 것
이 사건으로 면에서는 배짱 좋은 용감한 청년으로 주인 집 사위가 될 것이란 말들이 돌았고 그의 어머니와 장남의 의견이 맞지 않아 성사 되지 않았다는 말을 그의 장남으로부터 십여 년 후 그 딸이 시집갔다 요절한 후 들었다
그는 나와 결혼 시켰다면 안 죽었을 것이라고 후회하며 어머니를 원망도 하고 있었다 나는 전혀 손톱만치도 생각해 본 일도 없고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몰랐다
한 달여 이 집 신세를 지다 8월 11일 군산을 거쳐 군에 입대했다 다음은 제8편 기대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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