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구한 인생 서사시
-밤의 길이 1,300 m
綠苑 李 文 浩
전선을 넘다(1) 1951년10월13일 이제는 탈출시기와 시간을 결정해야 한다 이 자리에 오래 있다는 것은 죽음이니 머뭇거릴 이유 없이 당장 오늘하기로 하였고 시간은 너무 늦으면 지뢰 밭 통과가 위험하니 해가 아직 서산에 있을 때 출발하자고 한다
시간을 벌기 위하여 통신이 두절 되었을 때 고장 수리차 나간다는 보고를 하고 떠나기로 했다
저녁식사에 쌀밥과 고기가 보급된다는 연락 기왕이면 식사 후에 떠나자고 했더니 성공만 하면 고기는 얼마든지 있으니 떠나자고한다 입대 후 처음인 쌀밥과 고기인데 좀 아쉬웠다
점심식사를 하고 해가 서산에 앉아서 구름을 헤치고 밝은 얼굴로 속히 떠나라고 한다
수류탄 두개를 어깨에 매달고 길을 떠났다 이 시간부터 내일 아침까지 우리 길을 인도 하고 생명을 보호해달라고 기도하고 벙커 아닌 굴을 등지고 하산하기 시작했다
하산하기까지는 늘 다니던 길 이 길에서 갈라지면 평지이긴 해도 낯선 길 그러자 전도사님이 “이것 조심해요” 요것이 대인 지뢰인데 밟으면 터지는 지뢰이고 저 줄은 같은 대인 지뢰지만 줄에 걸리면 터지는 지뢰라 한다 날이 어두워 지뢰를 분간할 수 없게 되자 옆에 흐르는 시냇물로 걷기로 하고 물에 들어갔다 10월 중순 강원도 산간의 물은 심장이 오그라들듯 차가웠다
구세주를 만나다
1951년10월13일 서로 의사를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보충병은 자신은 金亨俊이며 평북 강계 출신이며 기독교 전도사고 일본군에 징집되어 근무했기 때문에 독도법도 알고 군대 일에 대하여 대충 알고 있으며 여기 나오기 전에 연대에서 인민군과 국군의 배치 그리고 전선 일대의 지도를 외웠고 탈출로도 구상해 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UN군에서 살포한 ‘신변 안전보장 증’도 가지고 있는데 혼자서는 탈출할 수 없어서 동행자를 물색 중 나를 선택했고 자기 차례도 아닌데 나를 포섭하기 위하여 일부러 지원해서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아, 탈출에 성공만 한다면 얼마나 축복 받은 인간인가 이런 최전선에서 생명의 구세주를 만나다니……
속히 숨을 거두어 가소서
1951년10월13일
시냇물 속으로 걸어간다는 것은 여간 일이 아니었다 엎어지며 자빠지며 얼마나 걸었을까 수 십 미터 앞에 포탄이 떨어지고 돌들이 날아 왔다
아마도 포탄이 떨어졌던 곳쯤 왔을 때 “야! 나 데리고 가! 너만 가면 어떻게!”하며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같이 둘이 남쪽을 향해 탈주하다 눈 없는 포탄세례를 받은 모양이었다
참으로 처참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 최전선, 적도 아군도 없는 이 지점에서 춥고 피 흘리며 아프면서도 오직 남쪽으로 가겠다며 울부짖는 저 분
하나님이여! 어쩔 수 없는 이 환경 그 처지 몰인정하지만 차라리 그의 숨을 속히 거두어 가셔서 아픔이라도 면하게 하소서
전선을 넘다(2)
1951년10월13일 한참을 더 나아가는데 웅성웅성하며 말소리가 들린다 몸을 낮추고 가만히 듣고 보니 인민군 쪽에서 한국군 쪽으로 수색 나가는 팀이다 너무도 물이 차갑고 속도가 느려서 다시 길로 나가 걷기로 했다
얼마를 더 걸어가는데 느닷없이 “누구얏!”하고 수하를 걸어온다 나는 그만 주저앉을 뻔했다 그런데 전도사님 도리어 큰소리로 “동문 누구 얏! 왜 이런데 있어!”하니 저쪽에서 “우린 6사단 잠복병인데요”하고 한 풀 죽어 대답한다 전도사님은 “응, 우린 2사단 통신병인데 이쟈, 포 사격으로 통신망이 끊어져 수리차 간다!”하니까 그들이 “통과!”했고 전도사님도 “통과!”하고 복창하고 나서 우리는 걸음아 날 살려라 달아났다 멍청한 잠복 병 거기엔 아무런 통신선도 없는 곳이다
우리는 다시 물 속으로 가기로 했다 이 쪽 잠복 병이 있으면 한국군의 잠복 병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참을 가고 있는데 또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려온다 이번에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는 수색 병 같았다
그렇게 얼마를 갔는지 추워서 더는 못 가겠다 전도사는 희미한 산들을 살피더니 “됐어. 이젠 산으로 붙자”고한다
산기슭에 올라서 얼마를 갔는지 갑자기 잠이 쏟아져 걸음을 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응석받이가 되어 “전도사님 혼자가요. 난 좀 자고 가야겠소”하고 눕고 말았다 전도사님도 할 수 없었는지 내 옆에 누웠다
위기일발
1951년10월14일
물에 젖은 옷을 입은 추운 상태에서 한 잠 푹 자고 눈을 떠보니 벌써 해는 중천에 떠있었다 춥다고 생각할 사이도 없이 전도사님을 흔들어 깨웠다
전도사님도 깜짝 놀라 사방을 둘러보더니 틀림없어 여기는 국군이 있는 곳이야 하면서도 방향을 잡지 못하고 발을 떼어 놓질 못한다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더니 “가자”하며 발을 옮겨 놓는 순간 폭죽이 하늘로 올라 솟았다
전도사님은 되는대로 내 옷을 잡아 낚아채고 산상을 향해 질주를 한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끌려갔다
이백 여 미터쯤 끌고 가서야 발을 멈추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제야 살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형제님 고맙네, 형제님이 어제 저녁 자겠다고 하지 않고 그냥 걸었다면 우리는 어제 저녁 죽었어”하며 “지금 올라간 폭죽이 밤에 터졌더라면
우리는 집중사격을 받았을 꺼야, 날이 밝아 폭죽 터진 것을 국군이 발견 못해서 사격을 안 받은 것이야”하는 것이었다
또 한번 위험한 고비를 넘긴 것이다 다시 산상을 향해 올라가던 전도사님 갑자기 앉으며 눈이 휘둥그레진다. 앞에 참호가 하나 나타났다 그 생김새로 보아 인민군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밤새워 고생하며 인민군 진지로 올라 왔단 말인가
전도사님은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 들고 참호 문 앞까지 갔다 그리고 참호 안의 동정을 한참 살피고 있더니 더벅더벅 참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국군 아저씨!
1951년10월14일
그리고 태연스러이 걸어 나왔다 인민군이 후퇴하며 버리고 간 참호였다 그 참호를 보고 이 산은 틀림없이 국군 진지임을 확인하고 용기를 얻고 졸졸 흐르는 샘물을 따라 산상 쪽으로 걸었다
무서워할 것도 없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셈이다 올라가다 보니 물가에 흰쌀 알이 흩어져 있었고 군화 자국이 있었다 인민군은 쌀이나 군화가 없었으므로 다시 한번 국군 진지임을 확인하고 안심하고 산 중턱쯤에 이르렀을 때 지뢰가 있으니 발 짚는 것을 조심하여 자기가 짚는 대로 짚으라고 했다
거의 정상에 이르니 원형 철망을 둘러놓고 그 안에서 일대의 군인들이 불을 피우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참 한심한 광경이었다 우리는 수류탄과 이등병 계급장만 남기고 모두 버리고 “국군 아저씨!”하고 불렀다
국군 전방 진지 모습
1951년10월14일
우리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한 사람이 뛰어와서 철조망을 열고 “자식들 잘 왔다, 빨리 들어와 몸을 녹이라”며 “000일병 밥 준비해!”하고 명령하는 것이었다
잠시 후 소대장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소대장 참호라고 인민군에 비하면 장난도 아니었다 맨 땅 위에 나무로 어리서리 뼈대를 만들고 담요로 벽을 치고 애인인 듯한 여자사진을 걸어 놓고 무슨 소설책 같은 것을 읽고 있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이 참호며 불을 피우는 호화스러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우리를 접하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잠시 후 깡통 쇠고기가 가득한 국에 쌀밥을 큰 반합에 꾹꾹 담아서 먹으라 한다 이런 식사는 집을 떠나온 후 처음인 것 같았다 전투가 한창인 최전선에서 적군에게서 …
영등포를 거쳐 거제도로
1951년10월말
UN 군 정보 계통인 사람들로부터 간단한 적정과 정보에 대한 심문을 받고 춘천으로 가니 중부 및 동부에서 투항한 소위 포로들이 오십 여명 맨 몸 상태로 하얗게 DDT의 세례를 받고 끼리끼리 모여 앉아 신상 이야기에 바빴다
하루 밤을 새우고 영등포 방직공장으로 옮겼다
여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감옥같이 수용되어있었고 식사 때마다 식사 나르는 수레에 손만 닿으면 한 두 그릇은 순식간에 낚아채어 먹어치워 밥을 굶는 사람들이 생기는 난장판이었다
삼사일 대기하는 동안 삼백 명 이상이나 모였고 중학 동기 동창인 정주 친구도 만났다 그리고 기차에 실려 부산으로 갔고 LST의 화물이 되어 거제도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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