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구한 인생 서사시(3편)
-밤의 길이 1,300 m
綠苑 李 文 浩
2. 고향을 뒤로
전쟁 준비
1950년 전반기
수풍에서 하류 쪽으로 청수라는 곳이 있고 그 밑에 청성진이라는 곳이 있다 거기에는 청수 질소공장에 쓰일 원료운반을 위해 중국과 한국 사이에 철교가 있었고 그 철도는 청수를 거처 수풍을 통해 평북선* 끝인 정주에서 경의선에 연결된다
1950 년도 초부터 매일 밤 길게 연결된 기차에는 탱크가 실려 남으로 남으로 향해 달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디에 언제 쓰일 것인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압록강은 알았을까 자기 배 위를 스쳐가는 저 탱크의 행방을
*평북선: 평북 정주에서 수풍, 청수간의 철도로 경의선의 지선임.
6.25전쟁 발발
1950년6월25일
이른 새벽부터 밖이 요란하다 “전쟁이다 남조선 괴뢰군이 침범했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모여드는 군중들 보안서원, 툭하면 공산당 만세를 부르던 친구들 맑은 물마시고 불을 토하는 저 혀들 이 날의 샛별은 헤아렸을까 이 땅에서 흘릴 피를
간간이 들리던 침범 또 그러려니 하며 정오를 넘기는데 “괴뢰군을 물리치고 개성을 해방시키고 포천으로 진군” 중이란다
먼저 침범했다는 남조선 군 몇 시간도 안 되어 개성을 내 놓고 포천까지 물러갔단다 먼저 친범했다는 쪽이 그렇게 쉽게 빨리 물러갔단다 이상한 후퇴 언제까지 어디까지 물러 갈 것인가
일차동원
1950년 7월
곳곳에 큰 게시판에 남한지도를 붙이고 점령(해방)한 도시에는 공화 국기를 꼽는데 미처 꽂을 사이 없이 남진했다
방학 중이던 학생들을 소집하여 교양주임이 “통일성전에 앉아 있을 수 없다”며 키 큰 학생들을 데리고 군 소재지에 갔고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후 그들의 이름에 ‘영예로운 전사’라고 붙여져 우리 곁으로 돌아 왔고 학교에서는 대대적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계속해서 전사자의 명단과 부상자가 돌아왔다 동원되지 못한 학생들은 죄송하기까지 했다
그들 부모는 동원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도 모르고 교사였던 나는 동원에서 제외되었다
남한은 인공기 일색
1950년 8월 초
개전 1개월 여 거리마다 게시판이 세워지고 해방시킨 도시는 공화국기로 붉어졌고 이제 부산을 중심으로 몇 개 도시만 하얗다
붙여진 공화국기 만큼 친구들의 전사소식이 며칠에 한번씩 들려오고 동굴에 임시 후송병원이 생긴 여기엔 지팡이 짚은 부상병이 줄을 지어 후퇴해왔다 걷지 못한 부상병들은 어찌 되었을까
8.15 까지 부산을 해방시키라는 김일성의 명령으로 무모하게 희생된 인민군 징병 당한 가족들은 죽지 않고 병신이 되더라도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입대 안 한 자식 둔 부모들은 전전긍긍이다
2차 동원 (기발한 신체검사)
1950 년 8월 18일
학생들을 또 소집 시키려고 독일 영화 상영이 있었다 제목은 ‘그리운 나의 처녀’
남녀 학생들이 모두 모였다 오랫동안 영화 관람도 없었지만 독일 영화라고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희극이었고 한참 재미가 더해 가는데 영화가 끊기고 단에 오른 교양주임의 입에선 침을 사방으로 튕기며 “이 전쟁이 끝나기 전에 빨리 참가하자”고 외쳤다
그리고 모두 기차에 태워 군 소재지로 갔다 사무실 입구에 150센티미터 높이에 줄을 쳐 놓고 걸리는 사람은 트랙에 올라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 밑을 통과한 학생과 여학생은 집으로 돌아왔다 150 센티미터는 아식 보총(AK식 보병총) 을 메었을 때 총 끝이 땅에 닿지 않는 높이였다
도피
1950년 9월 말
쏟아져 돌아오는 부상병들 친구, 학생들의 전사 통보 9월 18일 인천 상륙소식 이러다 동원령이라도 내리면 부상 아니면 죽음 이런 결론과 어머니의 걱정
드디어 살아남아야 하겠다는 욕구가 생겨 나와 함께 교사가 된 친구와 산으로 들어갔다 산에는 우리를 반기기라도 하듯 머루 다래 그리고 밭에는 콩 등이 많았다
시월 달로 접어들며 점점 추워져 산 삶을 포기하고 친구와 함께 집으로 내려와 북쪽 지방에 흔히 있는 부엌 움으로 들어갔다 그의 집은 백 여리 떨어진 태천이였다
움 속에서 단파 수신기를 만들어 들어가며 북진해 와서 구출해 줄 것을 기도했다
중공군 대대본부가 된 집
1950년 10월 초
겹으로 된 우리 집은 방이 네 개 그리고 약방이 있었고 부엌은 넓었다 하루는 당에서 인민군과 함께 찾아와 중공군 대대본부로 쓸 터이니 집을 비우란다
어머니는 밥을 한 솥 해서 움 속에 넣어주며 죽을 때까지 아껴먹으라고 눈물을 흘리며 움 문을 흙으로 막고 집을 떠났다 밥이 떨어지는 날 우리의 목숨은 끊어지는 날이며 만일 우리가 무슨 소리라도 내면 그때가 인생을 마감하는 날이 될 것이다
하나 믿을 것은 인천 상륙 후 국군이 평양 정주 동부는 원산 등 물밀듯이 북진하고 있었다 오냐 빨리 온정령만 넘어라! “수풍은 지척이니” 하고 오직 북진만 기다렸다
큰 숨도 못 쉬며 움막 생활은 계속 되었다 단파 라디오를 끼고 하루에 한 끼씩 밥을 먹으며
솟아 날 구멍
1950년 11월
물밀듯 북진 해오던 국군이 갑자기 후퇴를 시작했다 일사천리로 평양 서울을 지나 수원 아! 하늘은 우리를 버렸구나 하는 절망 속에 지금까지 없던 비행기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일본시대 때도 수풍 댐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B-29의 공습이 있었는데 지금 또 다시 그 비행기의 공습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중공군이 집이 커서 의심 받을 수 있으니 산골짝 쪽으로 분산해야 한다며 이동했다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움 문을 부수고 울음을 터뜨리며 기뻐했다 남은 밥은 내 보내고 따뜻한 밥을 먹으며 두더지 생활은 계속되었다
* 국군의 북진 일지 9.18 수복이후 북진 현황 한국 제1군단 수도사단과 3사단 10월 10일 원산, 수도사단과 3사단 10월 17일 함흥 수도사단 10월 19일 1사단,7사단 평양입성 10월22일 북청;수사,가창;8사 10월23일 휘천:6사, 북창:8사 10월 21일 평남 순천 한국군 제8사단 10월 23일 평남 덕천 한국군 제6사단 7연대 10월 26일 중국-북한 국경 평북 초산:6사7연대 10월27일 원산상륙:해병3,5대대 10월29일 성진점령:수도사단 11월5일명천 길주탈환:수도사단 11월 21일 중국-북한 국경 혜산진:미 제7사단 11월23일 경성 :수도사단 11월 25일 청진 :수도사단 (안용현 저 한국전쟁 비사 인용)
김일성 포고문 제1호
1950년 12월 30일
식료품은 현지 조달한다 하더라도 총 포탄은 보급선이 길어지면서 맨손으로 낙동강까지 남하한 인민군 인적 손실을 많이 낸 김일성 인적 자원이 부족하게 되자 포고문 제 1호를 내렸다
지금까지 소집에 응하지 않은 자 일선에서 무단으로 귀향한자 소집 후 도피하여 은둔하는 자 등등은 12 월 30일 까지 자수하라 자수하지 않으면 그 가족까지 처단하겠다는 엄명
공산주의 하에서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처단한다면 하는 최전선에서의 군 지휘관 같이 사형하여도 누구도 어떤 항명도 있을 수 없다
가족회의고 토론이고 자수하는 길 밖에는 도리가 없다 무슨 처벌이 있더라도 나 혼자로 끝내야지
자수 결의
1950년 12월 30일
두 달여 숨어 살던 움막을 헤치고 떨리는 가슴 내리 쓸며 심호흡 한 번 해본다 태천 친구와 나는 우선 위신을 생각해야 했다 수 백 명 학생들을 가르치던 선생이 아닌가
이발사를 불러 이발을 했다 물을 데워 몇 달간 찌들은 때를 벗겨 냈다 그 사이에 이발사의 발설로 여학생들, 소집에서 탈락한 꼬마들이 찾아왔다
뜻 밖에도 그들은 “참 잘했습니다, 누구도 죽고 누구는 다리를 잘리고” 두 번 세 번 잘 했단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獨子라는 것도 잘 알지만 선배며 선생이고 잘 같이 어울러 주었기 때문이리라 밤이 깊어온다 잠을 자려 하였더니 태천 친구 지금 집으로 가겠단다
지금 외부에는 신사복 입은 사람은 무슨 기관원쯤으로 생각하고 검문 같은 것은 없을 것이라고 설사 있더라도 자수 할 사람이라면 괜찮을 것이니 염려 말라며 길을 떠났다 그것이 그와 헤어진 마지막이 되었다 그 후 그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 생사를 모른 체 지금 까지도.
자수
1950년 12월 31일
몇 달 만에 이부자리 속에서 잔 잠 잠을 잤는지 죽었다 살아났는지 어제 밤이라는 시공이 이 세상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이웃이 부끄러워서 그리고 전사 전상자의 부모께 미안해서 그들을 피해 동이 트기 전에 보안서로 갔다 초조한 마음으로....
웬 여자가 머리를 감다 말고 다짜고짜 “동무 잘 왔소, 머리 감고 들어 갈 테니 들어가 기다리오”하며 사무실을 가리켰다
사무실에는 서원복장을 입고 책상 위에서 담요를 둘둘 말고 한 사람이 코를 골고 있었다
살그머니 앉아 있노라니까 “동무 이리 들어오시오. 동무 전기전문학교 교사 아님메? 학생들한테 부끄럽지 아이하오!” 하며 자수서 용지를 꺼내주면서 적으란다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그저 “주소 성명 전 직업”뿐이었다 그리고 도피하느라 고생했으니 집에 가서 푹 쉬소 하며 아무런 질책도 없이 자수는 끝났다.
출근 명령
1951년 1월
보안서에 다녀와서 잠시 쉬고 있었는데 보안서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동네 어른들이나 학생들에게 부끄러워서 일찍이 보안소로 갔다 한 여 서원(서장이었다)은 마중 나오며 “잘 쉬었소, 동무 동무 같은 유능한 기술자가 통일성전이 진행되고 있는 이때에 놀면 되갔소 내일부터 수류탄 공장으로 출근 하시라요” 하며 직장을 지시해주었다
인민재판에 회부되다
1951년 1월
하루는 공장에 출근치 말고 아침 10시 까지 동회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아침 10시 동회 회의실 20 여명이 모인 우리 동민들 사이사이에 하나 둘 모르는 사람이 끼어 앉아 있었고 나는 단 위로 안내를 받았다
이윽고 동장(동 인민위원장)이 나에 대한 인민재판을 개정한다는 개정사와 함께 내 죄상을 읽었다
사회를 인도할 만큼의 인테리가 더욱이 전문학교 교사로서 학생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통일성전을 기피하고. 도저히 용서 할 수 없는 중죄라는 것 낯모를 한 사람이 벌떡 일어서더니
이웃의 많은 청년들이 조국을 위해 희생되고 저 교사로부터 교육 받은 학생들도 많이 희생 되었는데 저 동무는 반동분자요 중죄로 처벌해야 하오 하고 외치자 또 알 수 없는 한 사람이 옳소 하고 외친다 여러 사람이 함께 옳소, 옳소 외치기 시작한다
그러자 우리 동네 분인 한 사람이 나는 반대요 지금 우리에겐 청년이 필요하오 특히 저 동무 같은 기술자가 필요하오 그리고 “저 동무는 삼대독자요 사정도 봐 줘야 하오”하고 변명을 한다
한 참 처벌 여하를 놓고 말이 있은 뒤 재판장이라는 동네 당 지도부장이 판정을 내렸다
“국가적인 소요와 개인적인 사정을 감안하여 ”두문“ 명패의 착용과 거주지 제한을 선고한다”하 고 재판은 끝났다
그리하여 나는 붉은 바탕에 검은 글로 된 10cm x20cm 가량의 크기의 ‘杜門[두문]’이라는 명패를 달게 되었고 여행이 금지 되었다
수류탄 공장
원래 수류탄 공장은 평양 제65호 군수품 공장에서 생산 했었는데 후퇴할 때 수풍 발전소 입구의 땅굴로 이동 생산하고 있었다
내 집에서 공장까지는 십여 리가 되는 거리 ‘두문불출’ 명패를 달고 출근하기 부끄러워 어둠 컴컴한 새벽에 출근 하여 지시한 대로 ‘직맹’ 위원장을 찾았다
출근시간은 아직 멀었는데 직맹 위원장 실에서는 아침 독보회를 하고 있었다
북한 어느 직장이나 아침에는 독보회 라고 하여 그 날의 신문의 주요기사 당일의 중요사업계획 및 목표하달 등이 있고 저녁 일과가 끝나면 그날의 작업계획 대 성과, 미달성 시 원인분석 그에 따른 질책과 자아비판이 있으며 이런 것들이 끝나면 11시가 훨씬 넘는 것이 상례이다
동기생을 만나다
1951년 2월 중순
독보회를 하다 말고 “백 동무, 여기 이 동무가 오늘부터 전기 동력과에서 일 하게 됐소”하며 과장을 소개하는데 나는 깜짝 놀랐다 일년 전 학교의 동급생이 아닌가 그것도 특별한 관계의 老 학생
그는 나보다 나이가 십년은 더 많은 당에서 파견한 학생들의 동태 파악 겸 늦게 공부를 시작한 친구 그 머리에 공부가 될 리 없어서 내 옆에 앉히고 시험 때는 드러내 놓고 커닝을 시켜 졸업 시킨 그 친구 늘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지금은 과장과 커다란 명패를 달은 죄인 사무실로 돌아 와서 내 긴 이야기 보다 자기가 기술이 부족해 답답한 적이 많다며 잘 왔다고 두 번 세 번 이야기하면서도 내 사유를 묻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조회에서 내 소개가 되어있었다
소련제 코크스 공급중단
1951년 2월
수류탄 공장의 제일 첫 단계가 주물 공장이다 쇠를 녹여 수류탄 형체로 부어내는 과정이다 그러기 위해서 고온으로 쇠를 녹여 붓는데 온도가 제 온도에 올라가 그 온도를 유지해야 원하는 형태로 부어 낸다
지금까지 이 목적으로 소련제 석탄을 사용했는데 갑자기 중단한다는 통보를 받고 평양의 무연탄 기타 북한에서 채탄하는 모든 종류로 시험을 해봐도 쇳물이 흘러 들어가다 굳어버려 성형이 안 되었다
직맹 위원장이 과장과 나를 호출하여 석탄으로 용광로 열을 올리기를 포기하고 전기 용광로를 제작하여 시험해야 하니 계획서를 작성하여 최단 시일 내에 제출하란다 계획의 제일단계로 전기 용광로에 대한 자료가 필요 했다 직맹 위원장은 곧 구해준다는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은 1개월도 안 되어 지켜져 자료들이 산더미 같이 밀려 들어왔다
손재주 있는 조수 두 명을 보충 받아 밤늦게까지, 때때로 밤을 새워가며 책을 읽고 메모하며 연구에 연구를 계속했다
그럴 때마다 직맹 위원장은 곧잘 찾아와 “동무 이것을 성공하면 인민 영웅이 될 것이요 그리고 그 명패도 떼게 될 것이니 꼭 성공하시오”하며 격려하곤 했다
첫번째 자아비판
1951년 2월
전기 동력과의 기본 업무는 공장 내 전기 시설의 보수 유지 안전관리
그리고 시설확장이나 철폐에 따른 전기시설 지원
작업시간 내내 작업장을 빙빙 돌면서
고장의 미연 방지로 생산의 중단을 막고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것이 주 임무
炸藥을 장진하는 라인에 가면
환기도 안 되는 좁은 공간에서
마스크 하나만 걸치고
일일 생산계획을 완수하노라고 정신이 없다
작업실이 온통 노랗고 냄새나는 가운데
여공들이 작약을 수류탄 껍질에 밀어 넣는데
무심코 한 여공에게 위생에 영향 없느냐고 물었다
저녁회의에 참석했는데
낮에 여공에게 질문 한 것이 보고 되어
여공으로 하여금 작업의욕을 저하시켰다고
자아비판을 하였다
두 번째 자아비판 (펌프실 사건)
1951년 3월
전기 용광로 개발은 거의 매일 밤 12시 이후까지 계속 되었다
도시락이 두개씩 필요했다 저녁과 밤에 먹곤 하였는데(점심은 공장제공) 야식은 주로 우리과 소속인 펌프실에 가서 먹었다 펌프실 직원(영감님)은 전기 줄 두 가닥을 물이 흐르지 않는 곳에 설치하고 스위치를 넣어 많은 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 놓고 같이 먹었다
하루는 야식차 갔더니 사람도 없고 매운탕도 없었다 밖을 보니 도마 궁이(작은 배)만 물위에 떠있다 가끔 영감님이 스위치를 끄고 배 타고 나가면 기절했던 고기가 살아나 달아난다는 말이 기억났다 예감이 안 좋아 스위치를 보니 들어가 있는 상태이다
스위치를 끄고 들어가 보니 영감님은 물속에 몸을 구부리고 죽어 있었다 그로 인해 공장 안전관이 처벌 받았고 나는 두 번째로 자아비판을 했다
세 번째 자아비판 (경기중학생사건)
1951년 5월
5월의 신록이 유가족들의 슬픔 속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매일 밤 공장에서 개발에 박차를 가해오던 전기 용광로 개발팀도 소형을 제작하여 시험에 성공했고 이제 실용 가능한 중형을 개발한 단계에 이르러 무척 마음에 여유가 생긴 어떤 날 밤 야식을 끝내고 동굴위 산에 올랐다 달빛 속 나무그늘 밑에 종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이 눈에 띄어 가보니 끌려 온 경기 중학생들이 앉아서 노래를 하다 인기척을 느끼고 끊었다가 내가 가까이 오는 것을 알고 노래를 계속했다
처음 듣는 노래였다 “남 쪽 나라 십자성은 어머님 얼굴” 그들은 반 울음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내가 늘 달고 다니는 명패를 보고 괜찮으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노래를 계속했을 것이다 나는 그게 무슨 노래인고 하고 물었더니
‘남십자성’이란 노래란다 집 생각이 나는 모양이었다
“여기 온지 얼마 되었지”하니 모두 하나 같이 작년 7월이니까 열 달 되었단다
그러니까 서울 점령 후 학교에서 모두 한번에 끌고 온 것이었다 월급은 얼마 받는지 몰라도 모두 교복 그대로였다
그 다음 날 저녁 회의에서 학생들에게 고향생각을 회상 시켜 작업의욕을 저하 시켰다며 자아비판을 하란다 그들이 나를 믿어 나도 말을 걸었는데 그 중에서도 누가 신고한 것이 분명했다
자아비판을 자주 하다 보면 감옥에 가거나 아오지 탄광으로 가는 것이 정규코스인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터이다
그 날부터 나는 반벙어리로 살기로 했다
‘인민영웅’ 꿈은 사라지고
1951년 6월 14일
오늘도 여전히 두문 명패를 달고 새벽같이 공장엘 갔다 웬 일인지 벌써부터 직맹 위원장실이 환하게 불이 켜지고 공장 안이 싸늘하게 느껴진다
11시쯤 되었을까 방송이 시작 됐다 “알립니다, 지금부터 호명하는 사람은 식당으로 집합하시오”하며 약 20여명을 호명한다 그 사람들은 식사 후에 군에 입대한다고 한다 내 이름은 거기에서 빠졌다 과장도 당연히 빠져야지 지금 업무가 얼마나 무거운데… 하는데 고장 신고가 들어와 고장수리를 하고 있는데
또 방송에서 호명을 하고 있었다 나는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못 들었는데 긴급 연락이 왔다 빨리 식당으로 가라는, 급히 식당에 갔더니 식사가 다 끝나고 승차를 하고 있었는데 직맹 위원장이 “아, 동무도 같이 저 차에 타시오” 웬 청천벽력인가 어머니의 점은?, 인민영웅의 꿈은?
어머니의 점
1951년 6월 17일
나의 큰집이 천주교도였기 때문에 어머니도 천주교가 없는 이곳에선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점을 치거나 굿을 하는 것을 싫어했는데 오늘저녁 어디에 갔다 오시더니 “얘야, 이 나라 젊은이가 다 죽어도 너는 멀리 갔다가 긴 칼 차고 양쪽에 하나씩 색시 둘을 데리고 집으로 온단다”
몹시 근심이 되셨던 모양이다 앞집 아들 뒷집 총각 모두 전사하고 부상했으니 근심도 되겠지만 점까지 칠 어머니는 아니었다
지금 나는 전기 용광로라는 것을 만들고 있는데 그것이 성공하는 날에는 ‘인민영웅’이 되고 군대에 갈 이유가 없다고 비로소 나는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
다음편을 기대해 주세요
|
'살아 가면서(在生活裏)'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綠苑 李 文 浩선생의 일대기 - 기구한 인생 서사시[5편] (0) | 2013.03.21 |
---|---|
[스크랩] 綠苑 李 文 浩선생의 일대기 - 기구한 인생 서사시[4편] (0) | 2013.03.21 |
[스크랩] 綠苑 李 文 浩선생의 일대기 - 기구한 인생 서사시[2편] (0) | 2013.03.21 |
[스크랩] 綠苑 李 文 浩선생의 일대기 - 기구한 인생 서사시[1편] (0) | 2013.03.21 |
[스크랩] 綠苑 李 文 浩선생의 일대기 - 기구한 인생 서사시[예고편] (0) | 2013.03.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