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산책(漢詩散步)

昭君怨 소군의 원망/東方虯

含閒 2013. 3. 5. 19:58

 

昭君怨 소군의 원망          東方虯 동방규

 

漢道方全盛 한나라가 비로소 번성해

朝廷足武臣 조정에는 무신이 충분한데

何須薄命妾 어찌 하필 박명한 아녀자인가

辛苦事和親 괴로워라 멀고 먼 화친 길

 

掩淚辭丹鳳 눈물 삼키고 궁궐을 작별하고

銜悲向白龍 슬픔을 머금고 흉노 땅으로 향하네

單于浪驚喜 선우는 매우 놀라 기뻐하는데

無復舊時容 어찌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올까

 

胡地無花草 오랑캐 땅에는 화초가 없어

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으니

自然衣帶緩 저절로 옷과 띠가 느슨해지는데

非是爲腰身 몸맵시 위해 이렇게 된 것은 아니라네

동방규 - 당나라 시인. 측천무후 때 左史

소군 - 전한 원제(元帝)의 후궁 왕소군. 중국 4대 미인의 하나로 불림

BC33년 원제의 명으로 흉노 호한야선우(于)에게 시집 가서 흉노왕비인 연지(氏)가 됨

單于 - 선우라 읽는다. 흉노황제

白龍 - 백룡퇴. 돈황과 옥문관의 서쪽 라포박 호수까지의 사막. 여기서는 흉노의 땅을 말함

 

 

[중국 4대 미녀] 황제를 상사병에 걸리게 했던 미색! 중국 4대 미녀 왕소군

 




예전이나 지금이나 미인에 대한 관심은 높습니다. 천하 미색이라 이름난 여인들은
역사에도 이름이 남을 정도이니 그들의 미모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집니다.
큰 땅덩이 만큼 미인들도 많은 중국에서는 옛부터 내려오는 전설적인 중국의 4대 미녀가 있습니다.


서한 원제(元帝) 때의 궁녀 왕소군(王昭君), 삼국시대의 초선(貂蝉), 당대의 양귀비(杨贵妃),
그리고 춘추시대 월국(越國)때의 서시(西施)가 그 주인공들입니다
.

그 중에서도 중국 4대 미녀 중 한 명인 왕소군의 슬픈 러브스토리가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지난 10일 방송된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중국 4대 미녀 서시, 초선, 양귀비, 왕소군 중
낙안 왕소군의 숨겨진 사랑 이야기가 전파를 탔습니다. 지금부터 왕소군의 러브스토리를 소개해볼까 합니다.


어느날 늦은 밤에 궁 안을 산책 하던 한(漢)나라의 왕 원제는 비파를 연주하는 궁녀 왕소군을 보고
한눈에 반하게 됩니다. 그녀가 왕소군입니다. 이후 원제는 왕소군을 찾기 위해 궁녀들을 그려놓은 초상화를
꼼꼼하게 훑어보지만 왕소군을 찾아내지 못합니다. 이에 원제는 “귀신을 본 것인가?”라는 말을 중얼거립니다.

시간이 흘러 한나라가 흉노의 침입을 고민하고 있을 때 호한야의 도움으로 반군세력을 물리쳤고
호한야는 대가로 원제의 딸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공주를 보낼 수 없던 원제는 대신
후궁 중 한 명을 선택하도록 합니다. 그때 호한야는 왕소군을 선택했고 원제는 깜짝 놀라게 됩니다.
바로 호한야가 선택한 여인이 자신이 오매불망 찾던 그녀인 왕소군이었던 것입니다.

알고보니 가난한 집안의 딸이던 왕소군은 궁녀의 초상화를 그릴 때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못해 실물보다
못생긴 초상화를 갖게 된 사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후 중국 4대 미녀로 칭해질 만큼 미색이었던 왕소군.
결국 왕소군은 호한야에게 시집을 가고 원제는 왕소군을 그리워하다 3개월 만에 생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현재와 당시의 미인 기준이 달랐겠지만 당시 왕소군의 미모에 황제가 상사병으로 그리워하다 생을 마감했을까요.
슬픈 사연을 가진 중국 4대 미녀 왕소군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많은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 4대 미녀 왕소군의 러브스토리를 본 네티즌들은 “중국 4대 미녀 왕소군 이야기 너무 슬프다”
“중국 4대 미녀 이야기는 언제봐도 흥미진진하다”, “중국 4대 미녀 이야기 특집 했으면 좋겠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李白的诗《王昭君》共有两首

      王昭君其一
汉家秦地月,流影照明妃。  
一上玉关道,天涯去不归。  
汉月还从东海出,明妃西嫁无来日。  
燕支长寒雪作花,娥眉憔悴没胡沙。  
生乏黄金枉画图,死留青冢使人嗟。    

   
     王昭君其 二    
昭君拂玉鞍,上马啼红颊。  
今日汉宫人,明朝胡地妾。




解释: (一)汉代长安附近的月亮,月光照着 昭君。一旦走上去玉门的 道 路,从此去向天 涯就再也不会归来。汉代的月亮还是从东海出来,可昭君嫁到西方没有回来的日子。长年严寒的燕支山只有雪当作花,美丽的昭君憔悴了,湮没在胡地的风沙中。活着时她没有黄金送人,致使画师将她画丑。死后留下了青冢使人叹息。  




2、昭君拂净了马鞍, 流着眼泪上马向西而去. 今天还是汉朝的宫里人,明天就是匈奴单于的妻妾了。

 

중국의 4대미녀 시리즈 (왕소군)

거울을 보고있는 왕소군

중국의 사대절색(四大絶色) 4대미녀 서시, 초선, 양귀비에 이어 이번엔 왕소군의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낙안(落 : 떨어질 낙 雁 : 기러기 안)-왕소군

왕소군이 흉노(오랑캐)인 호한야선우에게 받쳐저 고국산천을 떠나 시집가던 중 멀리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고 고향 생각이 나

슬픈 마음을 달래려 말 위에 앉은 채 금(비파)를 연주하자 날아가던 기러기들이 비파소리의 아름다움과 말 위의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개짓 하는 것을 잊고 땅에 떨어졌다 하여 왕소군을 일러 낙안 이라 하게 되었다.

왕소군에 대한 기록은 한서인 흉노전과 원제기 그리고 후한서인 남흉노전에 기록 되어져 있는데, 그 내용이 지극히 간략한 600자 정도에

불과 하지만 후세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왕소군의 슬픈 이야기가 오르내리면서 민간전설, 시가, 소설, 희곡등의 각종 문화적인 요소에

끊이 없이 그녀의 형상이 재 창조 되었다.

왕소군은 중군 전한말의 황제 원제의 궁녀였다. 이름은 장, 자는 소군이다. 한나라와 흉노와의 친화정책의 수단으로 호한야선우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고, 그가 죽자 그의 아들에게 재가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이 이야기는 후세에 널리 전송 되어 희곡과 시의 소재로 널리 쓰였다.

왕소군-출세도(흉노에게 시집가며 장안쪽을 바라보는 왕소군)

소군출세-왕소군이 흉노국(변방국)으로 나서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중국인들에게 인식되어 지고 있다.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의하면 후궁이 너무 많았던 원제는 일일이 그녀들을 볼 수가 없어 화공에게 후궁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다고 한다. 후궁들은 화가에게 잘 그려 줄것을 청탁하며 많게는 10만전, 적게는 5만전을 뇌물로 바쳐 화공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더 예쁘게 그리게 되었다. 하지만 왕소군만은 뇌물을 바치지 않았고, 이를 믿게 본 화공은 왕소군을 터무니 없이 못나게 그렸고

이를 믿었던원제는 왕소군은거들 떠 보지도 않게 되었다.

그럴 즈음 세력이 커진 흉노가 한나라의 미인을 구하고자 입조하였고 원제는 화공의 초상화 중에 제일 못생겼다고 생각한 왕소군을 찍어 흉노에게 시집 보내기로 하였다.그리하여 왕소군은 흉노에게시집을 갈 수 밖에 없었고때가 되어수레에 실려가는 왕소군의 미모를 본 원제는 왕소군의 아름다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땅을 치고 후회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어 버렸다. 후궁중에 제일 가는 미녀

였던 왕소군을 못나게 그린 화공을 죽이고 재산을 몰 수 했지만 때는 늦고야 말았다.

중국인으로서는 애석한 일이 였다. 이 역사적이고 드라마틱한 슬픈 왕소군의 이야기는 오랑캐들을 달래야 만 했던 중국의 화친정책

때문에 생긴 비극이라 할 수 있다.

이백이 왕소군의 슬픈 이야기로 지은 시의 한구절

원제의 궁녀 소군, 치맛자락으로 구슬 안장 건드리듯..

말 위에 오르니 붉은 두 뺨이 우네

오늘가진 한궁의 여인이지만

내일 아침 오랑캐 땅, 첩이 신세라

봄이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오랑캐 땅인들 화초가 없으랴만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이백의 또 다른 시

한나라 진 당의 달이

달 그림자 뿌리며 명비를 보내네.

한 번 옥문관을 나서더니

하늘 끝에 가 다시는 오지 않네.

한나라의 달은 여전히 동해에 뜨건만

명비는 서쪽 땅으로 가더니 돌아오지 않네.

연지산은 늘 추워 눈꽃을 만들고

미인은 초췌해져 오랑캐 땅에 묻히네.

살아선 황금이 없어 초상화를 잘 못 그리게 하더니

죽어선 청총을 남겨 탄신케 한다.

연지 : 몽고의 산이름

청총 : 왕소군의 무덤으로 백초가 자라는 호지의 다른 무덤과는 달리 중국의 무덤처럼 푸른 풀이 났다하여 붙여진 이름.

실크로드의 교역의 이권을 둘러싼 한나라와 흉노의 싸움은 400여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정략결혼을 할 수 밖에 없는 희생자들은 많아 질 수 밖에 없었으며 그 중 왕소군의 이야기는 흉노와의 400여년의 세월 속에서 시달렸던 백성들의 애환까지 더해져

흉노와의 항쟁의 상징으로 나타내어 진다. 그만큼 한나라 민족으로서는 흉노와의 전쟁이 잊기 어려운 역사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왕소군에 대한 많은 전설이 어려움에처한중국에게 애국의 여인으로 미화되어 전해내려오고 있다.

그 시대에는 외모가 아름다워 미인이 아니라 애국심이 미인의 상징이 었기 때문이다.

(한서)에는 왕소군이 흉노 호한야선우 에게 출가한 후의 기록을 간단히 서술했다.

" 왕소군은 영호연씨라 불리고 이도지아사를 낳았는데 이 아들은 나중에 우일축 왕이 되었다. 호한야선우는 즉위한지 28년 후인 건시 2년(B.C.31)에 죽었다"

황소군을 영호연씨라 부른 이유는 호(흉노)를 영(편하게 한다)는 뜻이고 흉노의 왕후를 일컫는 칭호가 연씨이기 때문이다. 이는 즉

흉노를 달래 한나라에 이익을 준다는 의미의 명칭이기도 하다.

왕소군은 호한야가 죽자 흉노의 관습에 따라 호한야와 흉노 귀족의 딸 대연씨와의 사이에 태어난 호한야의 아들 이도막고가

선우(흉노의 왕 칭호)가 되자 그의 왕후가 되어 두명의 딸을 낳았다고 전해 진다.

왕소군이 비극의 여주인공으로 전해 지는 이유는 오랑캐와의 화친정책에 그 나라의 공주가 아닌 민간인 여성이 오랑캐의 왕비가

되었던 과정에서 여러가지 전설로 내려오기 때문이다.

왕소군미인도 왕소군의옛집 왕소군조각상

왕소군의 묘는 지금의 내몽고 자치구의 호화호터시의 남쪽으로 10Km떨어진 대청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녀의 무덤의 풀만은

항상 푸르렀다 하여 청총(靑塚)이라 한다.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남자들의 욕심에 희생된 한 여인의 슬픈 이야기가 안타깝다.

* 게시물 출처 : http://blog.naver.com/sicretmom?Redirect=Log&logNo=140154752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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