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산책(漢詩散步)

눈 오는 밤 홀로 앉아(雪夜獨坐)김수항(金壽恒)

含閒 2010. 12. 8. 10:22

 

               눈 오는 밤 홀로 앉아(雪夜獨坐)           

 

                                       김수항(金壽恒)

 

 

破屋凉風入(파옥량풍입)하고 : 허름한 집에 찬바람 불어 들고

空庭白雪堆(공정백설퇴)로다 : 빈 뜰엔 흰 눈만 쌓이누나

愁心與燈火(수심여등화)와   : 근심스런 내 마음 저 등불과

此夜共成灰(차야공성회)로다 : 오늘 밤 함께 재가 되어가네

 

 


[삼도헌과 함께 맛보기]

 

 오늘 첫눈이 내린다고 한다.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저마다 소회가 다를 수 있다. 기분좋은 사람도 있고, 회한의 심정으로 눈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김수항은 어떤 심정으로 눈을 바로보았을까...

 이 시의 작자 김수항(1629-1689)의 할아버지는 우의정 상헌(尙憲)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광찬(光燦)이며, 영의정 수흥(壽興)의 아우로서 조선 현종 때의 문신이었다. 그는 서인으로서 2차례의 예송(禮訟) 때 남인과 대립했으며, 뒤에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자 노론의 영수가 되었다. 원자책봉문제로 불거진 ‘기사환국’에서 우암 송시열과 함께 내몰려서 마침내 죽음을 당하였다. 이 시는 그가 유배를 가 있었던 진도에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첫째, 기구에서는 유배지의 허물어지기 직전의 집에 찬바람이 생생 불어오는 현실을 읊조리고 있다.

둘째, 승구에서는 아무도 찾지 않는 텅 빈 뜰 안에 흰눈만 수북히 내리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셋째, 전구에서는 이런저런 일로 근심이 가득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등불과 함께 밤을 보내는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넷째, 결구에서는 촛불이 모두 타 들어가도록 잠을 못 이루고 재가 되어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자신도 재처럼 함께 타들어간다고 말한다. 일국의 영의정까지 지낸 자신이 아무도 찾지 않는 차가운 고립지에서 촛불처럼 재가 되어 타들어가는 인생을 보내고 있으니 얼마나 처량하겠는가.

 

유배지의 차가운 겨울밤. 타들어가는 촛불과 같은 자신의 신세. 인간의 운명은 이렇게 허무하게 흘러가는 것일까. 사그라지는 촛불이 재가 되는 것을 보고 있는  작자의 심정이 처절하기까지 하다.

 

 


김수항(金壽恒) 1629(인조 7)~1689(숙종 15)

 

 본관은 안동.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 1651년(효종 8)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고, 1656년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했다. 정언·교리 등을 거쳐 이조정랑·대사간에 오르고 1659년 현종때 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입을 상복이 문제가 되었다. 그는 송시열과 함께 기년설(朞年說:1년)을 주장해 남인의 3년설을 누르고, 3년설을 주장한 윤선도(尹善道)를 탄핵하여 유배시켰다(제1차 예송). 그 뒤 이조참판 등을 거쳐 좌의정을 지냈다. 1674년 효종비가 죽은 뒤 일어난 제2차 예송 때는 대공설(大功說:9개월)을 주장했으나 남인의 기년설이 채택되었다. 1675년(숙종 1) 남인인 허적(許積)·허목(許穆) 등의 공격으로 관직을 빼앗기고 원주와 영암 등으로 쫓겨났다. 1680년 서인이 재집권하자 영의정이 되었고, 1681년 〈현종실록〉편찬총재관을 지냈다. 서인이 남인에 대한 처벌문제로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으로 갈릴 때 노론의 영수로서 강력한 처벌을 주도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진도에 유배된 뒤 사약을 받았다. 저서로 〈문곡집〉과 〈송강행장 松江行狀〉이 있다.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영평 옥병서원(玉屛書院), 진도 봉암사(鳳巖祠), 영암 녹동서원(鹿洞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