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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평론가 이근우 교수님을 만나다.

含閒 2010. 2. 18. 15:07

미술평론가 이근우 교수님을 만나다.

2008년 08월 14일 [(주)경기헤럴드]

 

 “꿈은 이루어진다!”는 신념으로 많은 이들은 자신의 이상을 향해 도전한다. 어려서부터 특별한 재능을 보여 남다른 총애를 받거나 빠른 성장으로 출세가도를 달리는 사람도 많다. 더욱이 과열경쟁 입시제도와 사교육열풍은 몽매한 조기교육에 대한 집착을 양성하고 무엇이든 <빨리빨리!>문화에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빨리 피는 꽃은 빨리 지고, 쉬 달궈진 쇠붙이는 빨리 식기 마련이다. 노자는 “큰 사각형이 지나치게 커서 모퉁이가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이 최고의 가치가 있는 큰 그릇은 오랜 시간 공을 들인 다음에 완성이 된다.”고 했다.
남들은 하던 일도 접는 나이 50에 꿈을 연 서예평론가 이근우 교수를 만났다.

자신의 꿈을 마음속에서 키워


 그는 대구 시내에서 전형적인 평범한 가정의 삼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가난이 뭔지 모르고 지내는 시내의 일반적 가정의 자녀들처럼 성실하게 부모가 이끄는 대로 잘 따르는 모범적인 아이였다.
 학창 시절에는 천부적인 소질을 갖고 있는 친구들이 특기를 나타낼 때마다 부러웠고 자신도 언젠가는 그림을 그리고 사랑하는 예술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꿈도 간절히 원하면 자라는 것인지 고교시절 취미로 붓글씨를 썼다. 그리고 당시 박근술 미술 선생님 작 대나무 그림이 미술실 벽보에 붙어 있었는데 곧고 시원한 대나무 기백을 보면서 자신도 그려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로 그림에 대한 꿈의 싹을 틔웠다.
 그러나 대학 진로를 앞두고 부모님이 법학을 전공하기를 원하자 경북대에서 법학을 전공하면서 꿈과는 먼 굴절된 생활로 한참을 돌아왔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무역업에 종사했다. 당시 국제무역으로 자유로이 외국을 다니면서 여러 나라의 다양한 문화를 섭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사람과 문화에 대한 편견은 참으로 무섭고 진정한 예술문화의 날개를 접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개인의 예술적 능력과 가치가 국력이나 나라의 규모를 떠나 발현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특히 인도네시아인의 섬세한 예술적 감각을 통해서는 선진국의 우월감이 타민족을 폄하하는 것으로 진정한 예술성이 가려질 수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예술문화에 대한 가치는 어디에서도 뒤지지 않는 훌륭함이 돋보여 자부심과 자긍심을 느낄 수 있었다 한다.
 그렇게 20년을 돌아서 많은 경험을 쌓고 어린 시절부터 해보고 싶었던 그림의 세계로 왔다. 40세에 이르러 일하면서 틈틈이 익혀왔던 그의 그림세계는 10년이 지나서 열정과 소망으로 대학원에 입학하여 문인화 과정을 마치고 모교에서 바로 문인화의 전반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비록 돌아서 왔지만 다양한 국제 문화를 통해서 수준 높은 소양을 쌓아 다듬어진 그의 실력은 미술평론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문인화이론 정립에 매진


 
문인화는 이론적으로 체계적인 정립이 덜 되어있어 이론적 접근이 부족하고 실기의존도가 높다. 그래서 그는 전근대적이고 구태의연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늘 안타깝게 생각하고 취약한 이론 부분을 정리하고 다듬었다. 그리고 이것이 학생들에게 평론, 이론, 실기를 가르치는데 지침서가 되기를 소망한다. 또 지방자치에서 문화육성을 위해 주민의 잠재력을 키울 때 활용되어 보다 밝고 아름다운 사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아마도 체계적인 이론을 통해서 그림 속에 숨어 있는 작가의 사상과 의도, 표현기법을 익힌다면 문인화의 대중화로 보다 품격 있는 예술문화사회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그의 깊은 저의일 것이다. 또한 그는 뜻이 맞는 사람과 문인화에 대한 새로운 풍토와 바람을 정착시키고 싶어 한다. “저질그림이 근래 난립된 공모전을 통해 무작위로 많은 초대작가를 양성하여 문인화가 상당히 왜곡된 상태입니다. 전통화는 서양의 그림과는 절대 다릅니다. 우리 전문가 스스로가 소명의식을 갖고 우리 것을 발전계승 시켜야 하지요.  우리 민족이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같고 국민의 에너지만 모을 수 있다면 우리나라는 더욱 달라질 것입니다. 국력신장은 우리문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데서 비롯되지요.”하며 좋은 스승은 스스로 나침반이 되어야 한다고 이른다.
 수원대학에서 강의하며 꿈이 여물어가는 그에게도 아픈 시련이 있었다. 젊은 시절에 사람을 좋아하고 신의를 존중하던 그는 사기를 당해서 막대한 재산적 손실을 입은 적이 있다. 그때 입은 경제적 피해와 정신적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정경제에 핍박을 주었고 사람에 대한 믿음과 신뢰감이 떨어져 한동안 나락의 상태였다고 한다.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하여 신앙심이 깊었던 그가 어려움을 겪고 정신적으로 신앙과 세상에 신뢰감이 무너졌을 때 힘이 되어준 것은 자녀들이었다. 자녀들의 모범적인 신앙생활이 다시 그가 온전한 믿음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회구성원의 기초를 이루는 가족단위가 튼튼하고 사랑이 있다면 낙오되는 삶은 없을 것이라고 한다.

 


 

 시행착오는 미래의 가르침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이순신 장군이다. 그는 역사를 좋아하고 역사를 통해서 인생을 배우는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순신 장군에게 매력을 느낀다고 한다. 그는“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나라는 과연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그는 이제 후학을 양성하면서 늘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주고 그들의 아픈 상처를 사랑한다.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좌절하지 말고 시행착오를 거쳐라. 시행착오는 전진을 위한 디딤돌이다. 보다 높은 이상을 향한 징검다리는 자신에게 성숙과 완숙을 위한 쉼터로 머무르는 것뿐이다. 그것이 절대 좌절할 이유는 아니다. 늘 새로움에 도전하고 장기적인 안목과 대기만성을 염두에 두어라. 이제 평균 수명이 길어 중년은 50이다. 멀리 보고 이상을 높게, 세상을 넓게 보라. 세상을 넓게 보는 사람이 할 일도 많은 법이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보는 것처럼 사회 전반이 대기만성을 꿈꾸고 백년대계의 큰 그림을 그리며 살아간다면 작은 실패나 시행착오에 낙오가 없는 씩씩한 삶을 살 것이다.


 


이근우 약력


대구출생
경북대학교 졸업
수원대학교 미술대학원 졸업(문인화전공 석사)            
대한민국미술대전 문인화부문 특선,입선(한국미협)
동아미술대전 입선(동아일보사주최) 
2007 아시아 아트 페어 출품
대한민국 새천년 서예문인화대전운영위원 역임
현)경기도미술대전 초대작가(한국미협)
현)세계서법문화예술대전 추진위원
현)한국미술협회회원
현)서울미술협회 문인화분과위원
현)갤러리 연우 대표
현)미술평론가
현)수원대학교 미술대학원 문인화전공 외래교수
현)한국서도협회 경기지회 부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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