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장진영 남편, '608일간의 사랑' 책으로…49재 맞춰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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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지순한 순애보로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 고(故) 장진영의 사랑이야기가 활자화 될 전망이다. 글을 쓰는 이는 바로 장진영과 사별한 남편 김영균(43)씨다.
책에는 고인이 지난 1년간 병마와 싸우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투병기와 마지막 모습, 두 사람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담길 것으로 전해졌다. 김씨는 아내 장진영과의 이야기를 글로 풀고 책으로 엮어, 내달 중순 먼저 간 아내의 49재 때 마지막 선물로 건낼 예정이다.
이 같은 사실은 집필 소식을 접한 일부 출판사들이 물밑 접촉에 나서며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김씨는 장진영이 위암 사실을 알기 전 처음 만나 발병 사실을 안 이후부터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이의 곁을 지켰다.
장진영이 지난해 9월 이미 치료 시기는 놓친 후였지만 위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바로 연인 김씨 덕분이었다. 자꾸 위가 쓰리다는 장진영의 말에 김씨가 병원에 데려가 건강검진을 받게 한 것. 덕분에 장진영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남은 생을 허비하지 않고 차분하게 죽음을 준비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지난 2008년 1월이었다. 그로부터 8개월 후인 그해 9월 발병 사실을 알게 됐고 1년간 두 사람은 마지막 사랑의 불꽃을 피웠다. 첫 만남부터 장진영 사망까지 정확히 608일, 그 가운데 나흘은 부부로 산 소중한 추억이 남편 김씨를 통해 일반에 공개되는 것이다. 장진영 사망 이후 "그녀가 곧 나였고, 내가 곧 그녀였다"며 사랑을 표한 그의 이야기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모아질 것으로 보인다.
한편, 지난 6일 장진영의 삼우제를 지낸 김씨는 이후 외부와의 연락을 단절한 채 집필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장진영은 지난해 9월 위암 진단을 받고 많은 이들의 응원 속에 삶의 의욕을 불태웠으나 끝내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지난 1일 사망했다.
고 장진영 아버지 장길남 씨
"옛날에는 자식을 낳으면 최선을 다해 교육을 시키고 혼사까지 하는 거 아니오? 근데 이놈이 혼자 객지까지 가서 자기가 선택한 연예인으로 활동하다가 병들어가니까 아버지로서 할 말이 없어요. 내가 이놈에게 보답해줄 수 있는 게 과연 뭐냐. 우리 아이는 갔지만 영원히 내 가슴이 묻을 순 없는 거고. 나도 이제 하지를 할 때가 됐단 말이여. 그래서 우리 아이에 대한 영원한 보답으로 하나 남기고 가자.(그래서 기념관을 만들기로 했어)"
지난 5월 14일. 선산이 있는 전북 임실에 고 장진영 씨를 추모하는 기념관 개관식이 열렸다. 살아생전 딸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못해줬던 아버지 장길남 씨는 딸에게 보답을 하고 싶다고 했다. 장진영 기념관은 이 지역의 명칭을 따 '계암 장학재단'으로 이름을 지었다. 2009년 9월 위암으로 고인이 된 배우 장진영의 유품이 전시된 유일한 곳이다.
고인은 전주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나왔다. 전주중앙여고는 그녀가 죽기 전까지 매년 장학금을 전달했던 모교다. 산골에 위치한 계암 장학재단에는 고인과 함께 자란 어릴 적 동창들이 자주 들른다. 외진 그곳에는 드문드문, 그러나 끊이지 않고 고인을 기억하는 팬과 친구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기념관에는 그녀의 굵고 짧은 연기생활을 증명하는 작품 포스터와 여러 개의 트로피, 생전에 자주 사용하던 향수와 신발, 일기장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 낡은 미싱기가 눈에 띄었다.
"대학 다닐 때 의상디자인을 전공하면서 옷을 만들 때 쓰던 재봉틀, 가재도구 이런 걸 이사 다닐 때마다 가지고 다녔더라고. 난 그것을 몰랐는데 나중에 서울에 올라가 진영이 집 정리하면서 발견했어요. 본인이 애착을 가졌다는 뜻 아니겠느냐.(그래서 전시했어요)"
그녀가 애지중지한 재봉틀 옆에는 시상식 때 입었던 드레스 두 벌이 걸려 있다. 패셔니스타로 불린 그녀가 즐겨 모은 신발도 꽤 여러 켤레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포장도 뜯지 않은 금색 샌들도 있었다.
"어찌나 신발을 좋아했는지, 병 치료받으러 미국에 갔을 때도 스무 켤레나 사왔어. 나중에 다 나으면 신을 신발이라고. 근데 이렇게 신지도 못하고 갔어."
영화 '청연'의 큼지막한 포스터를 보니 살아 있을 때 고인의 환한 얼굴이 떠올랐다. '싱글즈'의 나난, '국화꽃 향기'의 희재,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연아는 그녀가 연기한 캐릭터 중 유난히 많은 사랑을 받았다. 남녀를 불문한 팬들이 그런 그녀를 좋아했다. 큰 키, 시원한 이목구비, 무엇보다 상대를 기분 좋게 만드는 미소는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다.
"집에 오면 이러쿵저러쿵 연예계 얘긴 않고 가족적인 분위기라든가 식사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지. 엄마 아빠 여행보내준다고도 여러 번 그랬는데 내가 만날 바쁘다고 해서 못 갔어. 그리고 자꾸 뭣을 사가지고 와. '아버지, 이런 거 사왔어' 하면서 입혀주기도 하고, 필요한 거 뭐 없냐고 수시로 묻고 이거저거 다 사다주는 거예요. 옷이고 구두고 넥타이고 말없이 막(사와). 어느 날 내가 '너는 뭐 땜에 자꾸 이렇게 사다 주냐' 그랬더니, 아버지는 성의도 모른다고 뒤돌아 눈물을 막 떨어뜨리면서 우는 거예요. 이젠 안 사다 준다고. 그게 그놈 죽기 1년 전이야."
주로 서울에서 일하는 그녀는 가족이 있는 전주로 내려올 때마다 두 손에 한가득 선물을 사가지고 왔다. 고인이 번 돈으로 스포츠카를 사면서부터는 밤낮없이 집을 찾았다.
"시간만 있으면 부모를 보러 와요. 스포츠카를 타고 여까지 두 시간 만에도 와버려. 오면 금산사도 자주 가고, 메기탕집도 가고. 지 언니랑 조카랑 담양에 떡갈비도 먹으러 가고 여수랑 순천에 드라이브 가고. 바빠서 올 시간이 없으면 잠깐 짬을 내서라도 와요. 그리고 저녁에 늦게 올라가는 거요."
장 씨는 딸이 처음 연예인이 되겠다고 했을 때를 기억한다. "요놈이 대학 들어가믄서부터 활동을 한 거야. 잡지나 CF만 하고 그러다 어느 날 주민등록지를 충남으로 옮겨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나갔어. 어느 날 전화가 왔는데, 딸이 충남대전 진이 됐는데 왜 그러고 있냐는 거야. 집사람과 밥 먹고 있는데 그제야 알았어. 그 후로도 내가 반대하니까 혼자 서울로 가서 연기를 시작한 거야. 근데 2005년도엔가. 이놈이 나한테 와서는 '죽일렴 죽이고 살릴렴 살리시오' 하더라고. '아버님 모르게 숨기고 한 것은 죄송하지만 빨리 풀어주셨으면 좋았을 걸, 나이가 벌써 이만큼 먹을 때까지 하고 있는데 아버님 이제는 용서하소' 하고."
장 씨는 딸이 연기자로 명성을 얻고 한참 후에야 그녀를 받아들였다. 당시엔 딸이 뭘 그렇게 하는 지, 얼마만큼의 사랑을 받는지도 몰랐다. 지금 생각하면 좀 더 빨리 딸이 원하는 길을 이해하지 못한 게 후회가 된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할 수 있었는데, 이젠 어찌할 수가 없다.
"내가 일을 하다 보니까 내 아이에게 잘해주질 못했어요. 마음은 변함없지만 실질적으로는 무관심했고 행동으로 보여주질 못했어. 옆에서 챙겨주고 병원에도 데려가고 했으면 안 죽게 만들었을 텐데. 부모 건강은 그렇게 관리하더니 정작 지 건강관리는 못하고 가 버렸단 말이야. 그 생각에 너무 미안해. 불쌍하고. 이런 걸 느낄 적에 마음이 어지럽고 가슴이 찢어지는 거야. 그 독한 항암제를 맞으면서도 부모 걱정할까봐 아픈 거 티 안 내고, '아빠 피곤하면 가서 주무시오' 그랬어. 지금 생각하면… 항암제 맞으면 몸이 절반 죽는다는데… 걱정 말라고 하면서도 '아버지, 나 죽으면 어떡하지?' 그래. '아버지 나 안 죽지마는, 죽으면 할아버지 옆에 묻어줘요" 그러더라고."
지난해 말까지 분당 스카이캐슬 추모공원에 안치돼 있던 고 장진영 씨의 유골은 현재 전북 임실의 선산으로 이장됐다. 죽기 전 고인이 바랐던 바. 마지막으로 장 씨는 고인이 늘 입버릇처럼 했다는 얘기를 꺼냈다.
"그 애가 늘 이런 말을 했어요. '아버지, 내가 시집가면 대한민국서 한복 제일 잘하는 데서 아버지 한복 해줄 거야. 그럼 그 한복 입고 나 웨딩마치 시켜줘."
결국 장 씨는 딸이 해준 한복을 입지 못하고 자식을 먼저 보냈다. 2년도 채 지나지 않은 지금, 장 씨는 여전히 마음이 아프고 쓰라리다.
생전 딸 뜻 따라 사재 털어 6년전 장학회 설립
(전주=연합뉴스) 김동철 기자 = "장학사업은 사랑하는 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제 마지막 선물입니다. 진영이도 생전 선행을 많이 했던 아이였던 만큼 하늘나라에서 기쁜 마음으로 지켜볼 겁니다."
자식이 먼저 가면 부모는 가슴에 묻는다.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버지의 가슴 속 상처는 아물 줄 모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7년 전 홀연히 세상을 등졌다.
아버지는 갑작스러운 비보에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슬픔의 나날을 보냈지만 딸을 위해 다시 일어섰다.
2009년 세상을 떠난 배우 장진영씨의 아버지인 장길남(81) 계암장학회 이사장의 이야기다.
처음 딸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은 장 이사장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었다. 예쁜 외모에 의지가 강하고 똑 부러지는 성격의 딸은 아버지의 자랑이었다.
딸은 위암 투병 중에도 모교인 전주 중앙여고에 장학금을 전달하는 등 꾸준히 선행을 해왔다.
장 이사장은 평소 나눔을 실천했던 딸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장학사업에 매진했다.
전주시 덕진구 만성동에서 폐수처리용품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장 이사장은 2010년 3월 딸의 뜻을 기리려고 사재 11억여원을 털어 계암장학회를 설립해 소외된 환경에 있는 인재들을 돕고 있다.
그는 2012년 전북대에 1억원을 쾌척한 데 이어 작년에도 5천만원을 기부했다. 매년 수십 명의 전북지역 중·고교생이 장학금 혜택을 받고 있다.
"푸르러 높아가는 가을 하늘 아래 한 송이 국화 영원한 잠에 들다. 고고한 자태를 이제는 직접 볼 수 없지만 그를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속에 은은한 향기로 남아 숨 쉬어라."(장진영 기념관의 기념비문)
장 이사장은 2011년 5월에는 전북 임실군 운암면에 기념관을 열기도 했다. 병으로 고생했던 딸이 편히 쉬도록 공기 좋은 산골에 조성했다.
그는 "평생 살아오면서 많은 희로애락을 겪었지만 자식을 앞서 보낸 부모의 마음이 이토록 참담하고 슬픈 것인가를 알게 됐다"며 "사랑하는 딸을 앞세운 비통함을 가눌 길이 없지만 생전에 딸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딸의 영혼을 영원히 살아 숨쉬길 바라는 마음에서 장학사업을 하고 있다. 학생들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인재로 성장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 딸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딸이 참으로 심성이 고왔다"라며 "보수적인 성격 탓에 처음에 딸의 연예계 활동을 반대했던 게 가장 후회된다. 딸에 대한 기억을 잃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 중"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장 이사장은 앞으로 전 재산을 장학재단에 출연할 예정이다.
3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과 등진 장진영씨. 장씨의 숭고한 뜻은 아버지를 통해 승화하고 있다.
1972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난 장진영씨는 1992년 미스코리아 충남 진으로 뽑힌 후 연예계에 데뷔했고 영화 '반칙왕'과 '오버 더 레인보우', '국화꽃 향기', '싱글즈', '청연' 등에 출연해 톱스타로 활동하던 중 2009년 9월 1일 위암으로 세상과 작별했다.
sollens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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