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에 깃든 석당(石堂) 최남주의 향기따라 <48>
신라 고도의 메디치가 역할한 석총 이상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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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기자 / 2025년 09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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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암 최 정 간 매월다암원장 차문화연구가 |
법률가이면서도 문화와 예술을 사랑한 멋쟁이였다. 자신이 주장한 “이 고장(경주)을 잘 가꾸어서 세계최고의 문화촌이 되게하는 것이 나의 변함없는 꿈”을 체현(體現)하고 실천한 문화행동가였다.
경주문화예술 부흥의 대부
1954년 ‘서라벌예술제’ 창제와 1956년 ‘신라문화동인회’ 창립이 문화행동가로서 그의 위대함을 증명해주고 있다. 석당의 회고에 의하면 이상구 변호사와 첫 인연은 1949년 경주에서 변호사활동을 시작할 때였다. 그해 가을 경주박물관으로 신관이 수려하고 눈빛이 형형한 젊은 변호사가 석당을 찾아왔다. 박물관에 전시 중인 신라유산들을 감상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이때 그는 경주에서 신라문화예술 부흥운동이 일어나려면 지역주민들에게 다가가서 유물전시를 하고 문화의식을 고양시키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경주문화예술 부흥의 대부
1954년 ‘서라벌예술제’ 창제와 1956년 ‘신라문화동인회’ 창립이 문화행동가로서 그의 위대함을 증명해주고 있다. 석당의 회고에 의하면 이상구 변호사와 첫 인연은 1949년 경주에서 변호사활동을 시작할 때였다. 그해 가을 경주박물관으로 신관이 수려하고 눈빛이 형형한 젊은 변호사가 석당을 찾아왔다. 박물관에 전시 중인 신라유산들을 감상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이때 그는 경주에서 신라문화예술 부흥운동이 일어나려면 지역주민들에게 다가가서 유물전시를 하고 문화의식을 고양시키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석당도 그의 주장에 적극 공감하였다. 그는 일본유학 후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와 고향인 영일군 기계면에서 제일 먼저 문화운동을 시작하였다. ‘향토자료전시회’를 개최하여 고향주민들에게 우리문화의 우수성을 알렸다. 이상구 변호사는 석당보다 15세 아래였다. 석당은 틈나는대로 선배로서 그에게 경주 신라유산보존운동의 방법에 대해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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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 석당고택에서. (왼쪽부터) 석총 이상구, 필리핀 미술사학자 코라 여사, 석당 최남주, 미국인 한국학자 헬링톤 여사, 최귀생 여사(석총 이상구 변호사 부인), 이원임 여사(석당 최남주 부인), 최완수(미술사학자, 당시 경주박물관 근무), 최정채(석당의 2남). |
서라벌 예술제‧신라문화동인회
이상구 변호사의 신라고도 경주를 위한 눈부신 업적은 사재를 털어 창제한 ‘서라벌예술제’와 ‘신라문화동인회’창립이다. 전쟁의 상흔이 다 가시기 전 1954년 그는 순수민간단체인 전국 문화단체총연합회 초대 경주지부장에 취임하게 된다. 그해 가을 신라예술을 숭모하고 현창하기 위해 시인 박종우, 화가 김준식, 경주고교 교사 홍영기, 공예가 윤경열 등과 함께 장엄하게 서라벌예술제 서막을 올렸다. 당시 진주 영남예술제보다 조금 늦게 출발한 서라벌예술제는 문학, 미술, 음악, 체육 분야에서 전시와 공연, 경기 등이 개최된 전국적인 규모의 문화축제였다.
특히 관심을 집중시킨 행사는 신라 원화, 화랑 선발대회였다.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선남선녀들이 지원하여 그 열기는 대단하였다. 문학부문에서도 서울에서 국문학자 양주동, 시인 조지훈, 시인 구상 등 우리나라 유수의 지성들을 초청하여 문학의 향찬을 벌였다. 이러한 역사의 향기를 품은 서라벌예술제는 오늘날 ‘신라문화제’로 계승발전되어 한국대표 지역문화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신라문화동인회’는 1956년 4월 5일 이상구 변호사를 중심으로하여 경주고교 교사 정선, 최영식, 김태중, 윤경열 등이 경주의 유적지 답사를 통해 신라문화유산의 이해를 넓히고자 순수한 민간단체로 창립되었다. 70년 세월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신라문화유산의 중요성을 알리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신라문화동인회가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경주사회에서 문화유산보호 운동을 지속할수 있었던 것은 초대 회장 이상구 변호사의 집념과 열정 때문이었다. 석당은 초창기 신라문화동인회 회원들을 인솔하여 경주 남산을 답사하였고, 마지막으로 1974년 동학의 발상지 용담정을 답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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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가을 동학의 발상지 용담정을 답사한 신라문화동인회 회원들. 가운데 검정색 양복차림의 석총 이상구와 그 옆 백발의 석당 최남주.(사진제공 신라문화동인회) |
오늘날 신라문화제로 맥이어
이상구 변호사는 1961년 봄 성건동 석당의 고택 옆집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 1954년 서라벌예술제를 전국적인 규모로 창제하다 보니 경비가 너무 소요되었던 것이다. 누구하나 도와주는 사람없이 시작한 축제라 할수 없이 노동동 자택을 처분하여 축제 비용채무를 변제하였다. 남은 돈으로 성건동 고택을 구입하였다. 성건동으로 이사한 공간에서 경주의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하면서 신라고도의 메디치가 역할을 하였다.
그는 한가한 시간 고택사랑방에서 서예를 즐겼다. 원로 금석학자이자 서예가인 검여 유희강은 이변호사의 웅혼한 서체를 보고 영남일대의 달필로 평가하였다. 또한 안목 높은 컬렉터로 고서화와 조선도자기들을 소장하였다. 고택 사랑방에는 한말 개화파의 스승 박규수가 쓴 병풍과 해강 김규진, 위창 오세창 등의 작품과 조선 백자호와 연적, 계룡산 철화분청주병 등이 전시되어 있어 고택에 문자향을 그윽히 풍겼다.
성건동의 고택은 신라고도의 메디치가답게 전국적으로 유명한 문화예술인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특히 향토 출신 서양화가 손일봉, 김준식, 한국화가 청강 김영기, 지홍 박봉수, 조각가 김만술, 서예가 계전 최현주, 서양화가 최현태, 박재호, 조희수 등을 후원하고 전시회를 열어주었다.
경주가 문화예술의 고도로서 오늘날까지 그명맥을 이어주는 데는 석총 이상구 변호사의 그림자 같은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석당가와 석총가는 바로 이웃하여 두 집안간의 교류도 활발하였다. 석당가를 방문하는 외국인 학자들은 반드시 신라고도의 메디치가인 석총의 고택에 들러 명화와 신라석조물들을 감상하고 그로부터 한국전통예술의 아름다움에 대해 강의를 듣기도 하였다. 1980년 1월 석당의 장례식에 석총은 애끓는 조사를 하였다. 석당선생이야말로 신라의 얼을 찾아 평생을 바치신 큰 어르신이시라고….
편집부 기자 / 2025년 09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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