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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릉 발견의 여정, 석당의 도움이 결정적

含閒 2025. 7. 24. 10:07
서라벌에 깃든 석당(石堂) 최남주의 향기따라 <47>
문무대왕릉 발견의 여정, 석당의 도움이 결정적
편집부 기자 / 2025년 07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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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 최 정 간
매월다암원장
차문화연구가
여명기 한국미술사의 개척자 우현 고유섭의 고제(高弟)인 초우 황수영(1918~2018)은 자신의 학문적 고향을 운명적으로 경주로 택했다. 해방 후 그가 경주답사를 시작할 때 신라문화유산들을 일제강점기부터 선행답사한 석당 최남주의 도움이 절실했다.

1939년 동해구 유적 최초 답사
1939년 개성박물관장 고유섭과 최남주는 신라 문무대왕의 호국얼이 깃든 감은사지를 비롯한 ‘동해구(東海口)’ 유적들을 최초로 답사하였다. 
 
두 사람은 잊지 못할 바다와 대왕암을 배경으로 기념사진도 남겼다. 1941년 황수영은 동경제국대학교 경제과 재학시절 은사 고유섭과 개성유지들을 따라 경주답사를 하였다. 그의 회고록에도 최남주의 인도로 석굴암 답사를 하였다고 했다. 8‧15 격동기를 지나 국립박물관 학예직으로 근무하였다. 
 
이때도 경주를 답사하면서 석당의 도움을 받았다. 황수영 일생에 있어서 최고의 발견은 문무대왕의 해중릉이다. 은사 우현의 교시에 의해 시작된 문무대왕릉 발견 여정은 석당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1937년 봄 경주 모기관에 근무하던 일본인 두사람이 감은사지 부근 대종천(大鐘川)에서 낚시를 하다가 물속에서 무열왕릉의 돌거북과 같은 커다란 조각상을 보았다. 
 
이들은 경주로 돌아와 석당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평소 석당은 ‘동해구’ 문화유산을 주목하고 있던지라 직감적으로 이들이 이야기한 돌거북은 감은사에 세워져 있던 문무대왕 관련 비석 받침석인 귀부(돌거북)라고 생각했다. 곧바로 대종천 답사를 예정하였으나 여름 큰 홍수로 인해 미루다가 이듬해 봄에 현장조사를 하였다. 주민들과 함께 장대를 이용하여 대종천 일대를 탐침하였으나 모래뻘이 많이 퇴적되어 있어 끝내 돌거북은 찾지를 못하였다.
 
 
 
1941년 석굴암 답사모습.(오른쪽 첫번째 최남주, 두번째 대학생복 차림의 황수영, 왼쪽 첫번째 고유섭)
 

감은사 돌거북‧문무대왕릉 돌거북
석당은 황수영과 함께 ‘동해구’ 유적을 자주 답사하였다. 이때 이견대(利見臺) 위치를 대본초등학교 뒤편 산상(山上)의 500평쯤 되는 넓은 평지라고 고증해주었다. 이곳에는 신라 시대 초석들이 남아있고 신라 와당들이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형적으로 높아서 대왕암 쪽을 시원하게 조망할 수가 있다. 
 
이어 대종천에 묻혀있는 감은사 돌거북 이야기도 해주니 황수영은 흥분하여 후일 기회가 되면 석당과 함께 발굴조사를 해보자고 하였다. 1964년 한국일보 장기영 사주는 우리나라 언론사상 최초로 신라문화유산 발견보존을 하기 위해 ‘신라오악조사단’이란 학술단체를 조직하였다. 1966년 가을 석당은 이 소식을 접하고 신라오악조사단장 김상기, 동국대학교 교수 황수영, 한국일보 문화부장 예용해와 함께 장기영 사주를 만났다. 
 
그는 1962년 석당 부자의 신라탁본전시를 후원해준 인연이 있었다. 석당은 장기영에게 문무대왕과 연관이 있는 대종천에 묻혀있는 감은사 돌거북을 신라오악조사단의 사업 차원에서 발굴건의하였고 즉석에서 승낙을 받았다. 천년동안 대종천 물속에 잠든 감은사 돌거북이 출세할 때를 맞았던 것이다. 1967년 1월 1일 한국일보는 감은사 현지에서 신임 문화부장 남욱의 새해특집기사로 보도하였다. “감은사 돌거북” “한국일보주관 신라오악조사단서 4월에 돌거북 판다”라는 제목과 함께 산상 이견대에서 대왕암을 응시하는 석당의 인터뷰 사진도 게재하였다.
 
돌거북의 출세가 임박한 가운데 돌발변수가 생겼다. 1967년 5월 황수영 일행의 조사단이 해중 대왕암을 답사했다. 이때부터 대종천에 묻힌 감은사 돌거북 발굴계획은 사라지고 새롭게 대왕암 내부의 자연석 돌거북이 발견되었다고 하였다. 황수영은 대왕암에 자연석 개석을 수중사리장치로 보았다. 그는 최남주가 주장한 대종천에 묻힌 감은사 돌거북은 대왕암 내부의 자연석 거북형상을 한 개석을 착각한 것이라 하였다.

1967년 ‘문무대왕릉 발견’ 보도
1967년 5월 16일자 한국일보 1면에 ‘문무대왕릉 발견’이라고 대서특필하고 황수영의 발굴기도 게재하였다. 이때부터 대왕암이 문무대왕 해중릉으로 명명된 것이다. 오늘날 대왕암을 정밀조사한 학계에서는 대왕암 내부의 뚜껑돌은 거북형상도 아닌 그저 풍화된 자연석이며 수중 사리장치도 없다고 밝히고 있다. 
 
석당도 대왕암을 문무대왕의 유골이 장골(藏骨)된 장소가 아닌 뼈를 뿌린 산골(散骨) 장소로 보았다. 황수영은 문무대왕릉 발견 후 그의 어떤 글에서도 석당 최남주 이름과 감은사 돌거북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1979년 황수영의 무리한 고증에 의해 복원된 해변 이견대와 뒤바뀐 감은사 돌거북에 대해 석당은 임종 직전까지도 못내 아쉬워하였다. 1995년 황수영은 석당이 주장한 산상 이견대 유지(遺地)를 답사한다. 
 
그리고 학자적인 양심고백을 했다. 현재 자신이 주장해서 복원된 해변 이견대 위치는 잘못되었고 최남주 선생이 주장한 산상 이견대설이 옳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끝내 감은사 돌거북이 문무대왕릉의 자연석 뚜껑돌과 뒤바뀐 진실은 밝히지 않고 서방정토로 떠났다.
편집부 기자 / 2025년 07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