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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고 지하실에 신라토기 피난

含閒 2024. 8. 30. 11:34
서라벌에 깃든 석당(石堂) 최남주의 향기따라 <39>
1951년 6‧25 전쟁 중 경주박물관 재개관
편집부 기자 / 2024년 0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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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고 지하실에 신라토기 피난
 
   
현암 최 정 간
매월다암원장
차문화연구가
서라벌 신문 지면을 통해 경주신라 고고학의 선구자이신 석당 최남주 선생의 여명기 경주 신라문화유산 발굴보존에 대한 잊혀진 이야기와 희귀한 사진자료들을 연재하다보니 예상밖에 전국적으로 많은 분들로부터 관심과 호응이 뜨거웠다.
 
최남주 시리즈, 독자 관심 뜨거워
지난번 ‘무초 초대 주한미국대사 신라금관을 보며 원더풀 환호’ 기사를 읽고 1948년 정부수립후 제헌 국회의원과 초대 경북지사를 지낸 독립투사 정현모 선생의 후손인 한동현(외고손자)씨가 필자에게 전화를 하여 자신의 할아버지 정현모 지사와 무초 대사의 경주박물관 방문당시 희귀한 사진자료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감사의 뜻을 전해왔다. 
 
이어 ‘6‧25 당시 경주박물관 유물 미국피난작전 영웅 김일환’의 연재글을 읽은 고(故)김일환 장관의 자제분되는 김의광 목인박물관장도 최정필(전국립박물관 문화재단이사장) 교수를 통해 감사의 뜻을 전해왔다. 김의광 관장은 서울 최고의 풍광인 인왕산자락 부암동에 선친이신 김일환 장관의 고귀한 한국박물관 사랑정신을 이어받아 목인박물관을 개관하여 서울의 문화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재개관된 경주박물관 정문 앞에서. 왼쪽 다섯 번째 석당 최남주, 6번째부터 국방부시찰단 일행.(1951년 11월)
 

금관고 지하실에 신라토기 피난
1950년 7월 24일 오후 국방부 3국장 김일환 대령과 정규섭 해군소령은 경주박물관 유물들을 인수하기위해 긴급하게 군용지프차와 트럭을 준비하여 경주박물관에 도착하였다. 
 
북한인민군들이 경주로 진격하기 전 경주박물관에 전시 중인 신라 금관총 금관을 비롯한 국보급 유물 139점을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키기 위한 작전이었다. 한편 금관총 금관과 국보 유물들을 김일환 대령에게 인수인계시킨 최순봉 경주박물관장과 석당 최남주는 나머지 전시 중인 신라토기와 와당 등 유물들을 잘 포장하여 금관고(금관총 유물전시실) 지하실에 피난시켰다. 
 
금관고 건물은 1921년 발굴된 금관총 출토 금관을 비롯한 일괄 유물들을 경주에 전시하기 위해 경주인들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각출하여 1923년 경주고적보존회 전시관 경내에 건립했다. 이 건물의 기초공사는 현대식 철근콘크리트로 시공되어 매우 튼튼하였다. 
 
지하에는 유물들을 수장할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었다. 또한 금관고 지하실은 1945년 7월 초 일제가 미군전투기들의 공습을 피하고자 서울 총독부 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만고의 국보인 신라 금동반가사유상을 비롯한 중요한 유물들을 피난시킨 장소이기도 하였다. 1950년 8월 초 북한인민군이 경주 안강북쪽까지 침공하여 한미연합군과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이에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은 8월 1일 정문을 폐쇄하고 직원들 모두 피난길을 떠나게 되었다. 석당은 청춘을 바쳐 지켜온 경주박물관 유물들이 안전하기를 두손 모아 빌었다. 그리고 그도 가족들과 함께 경주 현곡면 용담정으로 피난하였다. 용담정은 수운 최제우 선생이 1860년 동학을 창도한 곳이다. 이곳에는 당시 해월 최시형 선생의 따님이자 석당의 집안 고모되시는 최윤 여사(용담할머니)가 수도를 하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9‧28 서울수복이 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한국과 만주 국경까지 진격을 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1월 4일 국군과 유엔군은 남쪽으로 다시 후퇴를 하였다. 중공군에 밀리던 전세가 다시 역전되었다. 3월에 용담정으로 피난을 갔던 석당도 가족들과 함께 성건동 고택으로 돌아왔다. 제일 먼저 최순봉 관장과 함께 박물관으로 달려가 금관고 지하실 안전을 점검하였다. 다행히도 모든 유물들은 안전하였다.
 
금관총 금관 전시 안되던 시절
전쟁중 국립중앙박물관도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하였다. 궁핍한 재정관계로 전국의 박물관 직원들이 감원되었다. 총독부박물관 시절부터 석당과 인연이 있던 최영희씨는 박물관 행정사무직으로 8‧15 직후 국립중앙박물관 탄생에 많은 기여한바 있다. 그도 역시 가족들과 함께 경주로 피난을 왔다. 
 
석당은 자신의 집 부근에 거소를 마련해주고 그의 피난 생활을 도왔다. 1951년 6월 1일 이승만 정부는 전쟁 중 민심안정을 위해 경주 박물관을 재개관하였다. 그러나 경주박물관을 관람하러 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전시유물 중 하이라이트인 금관총 금관이 왜 전시되지않았냐고 항의하는 소동도 벌어졌다. 
 
당시 금관총 금관과 귀중한 유물들은 미국으로 피난가서 돌아올 수가 없었다. 한편 1951년 6월 국방부 차관으로 승진한 김일환 차관은 경주박물관이 재개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해 11월 국방부시찰단을 경주박물관에 보내기도 하였다.
편집부 기자 / 2024년 0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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