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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에 깃든 석당(石堂) 최남주의 향기따라 <38>

含閒 2024. 7. 19. 10:04

서라벌에 깃든 석당(石堂) 최남주의 향기따라 <38>

6‧25 당시 경주박물관 유물 ‘미국 피난작전 영웅’ 김일환
   
현암 최 정 간
매월다암원장
차문화연구가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의 남침전쟁 포화는 시시각각으로 경주박물관의 유물들을 위협하였다. 개전초 석당 최남주는 경주고적보존회 간사자격으로 당시 경주박물관장이었던 최순봉을 만나 박물관 소장의 귀중한 유물들을 어떻게 피난시킬것인가에 대해 의논하였다. 그러나 최 관장은 국립중앙박물관장인 김재원으로부터 특별한 지시가 있을 때까지 기다려보자는 이야기뿐이었다.

개전초 북한군 포항까지 내려와
북한 인민군들은 속전속결로 서울을 점령하고 국립중앙박물관도 북한의 내각직속 ‘물질문화연구보존위원회’ 위원장 김용태에게 접수되었다. 북한 인민군은 8로군 출신으로 전투경험이 풍부한 김무정을 앞세워 동해안 루트를 따라 7월 초 선발대가 포항 북쪽까지 밀고 내려왔다. 경주군민들도 전쟁을 실감하고 일부는 피난길에 나섰다. 7월 18일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제1기병사단(사단장 허버트 R 게이 장군)이 포항에 상륙하여 낙동강 방어전선에 투입되었다. 7월 20일경 미 제1기병사단의 S대령이 연대병력을 이끌고 대구로 진주하기 위해 경주에 도착하였다. 석당 최남주의 회고에 의하면 미군 S대령은 고대문화유산에 대한 상당한 식견을 가진 인물로 경주박물관을 잠깐 둘러보았다고 한다. 이때 그는 경주박물관의 경비가 허술한 점을 보고 즉각 경주경찰서장을 불러 심하게 질책하였고, 무장경관 2명을 박물관 정문에 보초를 서게 하였다. 석당의 추측으로 S대령은 미군의 전시 경북지역 위수책임자가 아닌가 하였다.

 
 
1950년 6‧25 직전 5월 경주박물관을 방문한 미국 교육사절단 일행. 왼쪽이 석당 최남주.

 

전쟁포화 속 경주박물관 유물들
7월 24일 오후 경주박물관 유물들이 포항 북쪽에 진출한 인민군 수중에 들어갈 것을 미리 예견한 국방부 3군수국장 김일환 대령(1914~2001)과 정규섭 해군소령(후일 주미한국대사관 무관근무‧미국거주)이 경주박물관에 도착하였다. 김대령 일행은 최 관장에게 시간이 없으니 금관총 금관을 비롯한 국보급 유물들을 신속히 먼저 포장하여 자신들에게 인수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미 김일환은 1950년 6월 28일 북한 인민군에 의해 한국은행 보유 금괴가 인민군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위해 금괴를 신속히 진해 해군기지로 안전하게 이송시킨 바가 있다. 최 관장은 처음에 김 대령 일행이 혹시 인민군이 아닌가 의심하여 석당에게 경주경찰서에 신고하여 신분확인을 해보라고 하였다. 국군으로 신분이 확인된 후 정규섭 소령은 석당에게 피난 중인 경주주민들을 동원해서 유물을 신속히 포장할 것을 요구했다. 석당은 평소 가깝게 지내던 성건동에 사는 목수를 비롯한 주민 10여명에게 부탁하여 이틀에 걸쳐 유물을 포장해 목수가 짠 48궤짝에 담았다. 이렇게 포장된 유물은 금관총 금관을 비롯한 139점이었다. 이들 유물은 김일환에 의해 대구로 안전하게 이송하여 최순주 재무부 장관에게 전달되었다. 그후 진해 해군기지로 이송되어 미리도착한 한국은행 금괴와 함께 해군 LST함정에 보관되었다. 8월 1일 이 유물과 금괴는 미국정부의 권고에 의해 부산에서 미국 상선을 이용하여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다시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수장고에 보관되었다. 그후 이 유물들은 1957년 미국 여러도시를 순회하면서 개최된 ‘한국 국보순회 전시회’에 출품되어 미국인들에게 신라천년 황금미술의 아름다움을 선보였다. 그후 파란만장했던 유물들은 1960년 2월 미국에서 경주박물관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6‧25전쟁 당시 경주박물관의 유물들이 안전하게 미국으로 피난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김일환 대령의 우리문화유산에 대한 열정과 혜안덕분이었다. 그러나 일부 미술사학자 중에는 김일환이 경주박물관 유물을 피난시킨 것은 이승만 대통령 지시 때문이라고 폄훼하고 있다.

 
 
1959년 가을 경주박물관에 전시 중인 신라삼화령 삼존석불 앞에서. 앞줄 오른쪽 김일환 교통부장관, 왼쪽 김활란 이화여대총장, 그뒤 석당 최남주(모자쓴 사람).
 


망각되고 있는 영웅의 공로

석당 최남주의 증언에 의하면 경주박물관 유물 피난작전은 순수한 김일환의 독자적인 판단이었다고 하였다. 정황 증거상 당시 이승만은 경주박물관 유물피난을 지시할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휴전후 김일환은 3성 장군을 거쳐 탁월한 경륜으로 내각의 중요 장관을 지내면서 한국경제 부흥의 밑그림을 그렸다. 1959년 가을 그는 교통부 장관 시절 김활란 이화여대 총장과 경주박물관을 방문하였다. 이때 석당과 감격스럽게 재회하면서 6‧25당시 긴박했던 유물 피난작전을 회상하기도 하였다. 1965년 석당 최남주가 그의 아들 최정채(작고‧전 미국 뉴멕시코박물관 연구원), 최정필(고고학자‧전 한국국립박물관 문화재단이사장)과 함께 서울 국립중앙공보관 전시장에서 제2회 신라석조예술품 탁본전시회를 개최하였다. 당시 김일환은 국제관광공사 총재로서 전시회를 관람하고 석당 부자의 신라문화유산 사랑을 격려하였다. 또한 경주를 국제관광도시로 조성하는데 힘을 보태겠다고 하였다. 세월이 흐른 지금 6‧25당시 국립중앙박물관 유물을 피난시킨 김재원 관장의 공적은 많은 박물관인들이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경주박물관의 귀중한 유물들을 안전하게 미국으로 피난시킨 영웅 김일환의 공로는 세월의 가시덤풀 속에 덮혀 세인들의 뇌리 속에 망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