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올림픽

6.25 참전용사가 '스키 여제' 린지 본의 첫 스승

含閒 2018. 2. 23. 13:41

6.25 참전용사가 '스키 여제' 린지 본의 첫 스승

린지 본 "할아버지 '도널드 킬도'에게 처음으로 스키 배워"
故도널드 킬도, 6.25전쟁에 '공병'으로 참전..정선 인근 주둔
린지본, 지난 17일 정선 올림픽 슬로프에 할아버지 유해 뿌려

조광형 기자 프로필 보기 | 최종편집 2018.02.23 12:03:27



국내 취재진이 스피드 스케이팅 이상화 선수를 언급할 때 '빙상여제(氷上女帝)'라는 극존칭을 사용하는 것처럼, 해외 취재진이 알파인 스키 선수 '린지 본(Lindsey Vonn)'을 부를 때에도 곧잘 쓰는 말이 있다. 이름하여 '스피드 퀸(Speed-Queen)'. 활강이나 슈퍼대회전 같은 스피드 종목에서 오랫동안 1인자의 자리를 지켜왔기에 붙여진 별명이다. 

실제로 린지 본의 전적을 보면 '여왕', 혹은 '여제'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다. 16살 때 알파인 스키 선수로 데뷔한 린지 본은 18년 동안 국제스키연맹(FIS) 월드컵에서 무려 81승을 거뒀다. 현역 선수 중에선 '우승 횟수'만 놓고 봤을 때 린지 본과 견줄 수 있는 선수는 아무도 없다. 

가히 '스키계의 전설'로 통하는 린지 본이 우리나라에 의미 있는 '흔적'을 남겼다. 린지 본은 지난 17일 슈퍼대회전 경기를 마친 뒤 강원도 정선 올림픽 슬로프에 '도널드 킬도(Donald Kildow)'의 유해(遺骸)를 뿌렸다. 린지 본의 결혼 전 성은 '킬도(Kildow)'. 도널드 킬도는 바로 린지 본의 친할아버지였다. 

린지 본은 할아버지 도널드 킬도에게 제일 먼저 스키를 배웠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도널드 킬도는 생전 손녀가 출전한 모든 대회의 기록을 스크랩한 것으로 전해졌다. 손녀를 위해 장장 39권 분량의 신문 기사를 모을 정도로 지극 정성을 쏟은 도널드 킬도는 린지 본이 십자인대가 끊어지고 정강이뼈가 골절되는 큰 부상으로 슬럼프에 빠졌을 때에도 끊임없는 격려와 위로로 그녀를 다시 일어서게끔 만든 장본인으로 알려졌다. 

"저에게 할아버지는 감정을 북받쳐 오르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할아버지가 정말로 보고 싶어요. 지금도 어디에선가 저를 보고 계실 거라고 생각해요. 할아버지를 위해 정말 경기를 잘했으면 좋겠어요."


린지 본은 지난 9일 평창 알펜시아 메인프레스센터(MPC)에서 공식 기자회견에서 할아버지에 대한 질문을 받자마자 눈물을 터뜨렸다. 지난해 11월 할아버지를 여읜 린지 본은 고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한동안 '스키폴'조차 잡지 못할 정도로 슬럼프를 겪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할아버지가 도와주실 것으로 믿고 있다"며 "할아버지를 위해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전의를 불태웠던 린지 본은 17일 열린 '슈퍼대회전'과 21일 열린 '여자 활강'에서 아쉽게도 금메달을 목에 걸지 못했다. 22일 복합 종목 경기에서도 기문을 밟고 지나가는 실수로 실격된 린지 본은 자신의 마지막 올림픽 무대에서 동메달(활강) 한 개 밖에 얻질 못하는, 다소 기대에 못미치는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린지 본은 "최선을 다해 좋은 레이스를 펼쳤다"며 "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동메달도 자랑스럽다"는 소감을 밝혔다. '여자 활강' 경기 직후 믹스트존 인터뷰에 나선 린지 본은 "금메달도 소중하지만, 8년 만에 다시 출전한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내는 꿈을 이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했다.

"하늘에서 할아버지가 지켜보실 것으로 알고 경기에 임했어요. 할아버지를 위해 금메달을 따고 싶었죠. 전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동메달도 무척 자랑스러워요. 할아버지가 곁에 없어서 아쉽긴 하지만 지금 너무나 행복합니다."


린지 본은 "할아버지를 포함해 가족들 모두 제게 큰 힘이 돼 줬고, 그동안 저로 인해 큰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며 "제가 강하고 단단한 선수로 성장할 수 있게끔 도와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앞으로는 가족을 챙기는 삶을 살고 싶다"고 소감을 마무리했다.

오늘날의 '스키 여제'를 만들어 낸 할아버지 도널드 킬도는 6.25전쟁 참전용사다. 스키 경기가 열린 강원도 정선 알파인 센터는 오래 전 도널드 킬도가 목숨을 걸고 지켜냈던 장소와 아주 가까운 것으로 알려졌다.린지 본은 22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할아버지가 계셨던 곳에서 할아버지를 위해 뛰었다"며 "이곳에 직접 와서 제 경기를 보시고 싶어했던 할아버지를 이렇게라도 모실 수 있게 됐다. 할아버지도 영원히 한국의 일부로 남게 돼 기뻐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평창 돋보기] 무릎ㆍ팔에 철심 박고 부활했던 린지 본 뒤엔…

조용제 감독이 본 린지 본
美 정부ㆍ스키협회 든든한 지원

의사ㆍ트레이너 등 스태프 6명 동행

대표팀 멘탈 트레이너도 재활 도와

21일 강원 정선 알파인경기장에서 열린 2018평창동계올림픽 알파인스키 여자 활강 경기에서 동메달을 딴 린지 본(미국)이 인터뷰하고 있다. 연합뉴스

“저기, 조금만 천천히 달릴 순 없을까요?”

햇볕이 쨍쨍 내려 쬐던 2016년 여름, 아직 눈도 덮이지 않은 정선 알파인경기장 코스를 둘러보겠다며 린지 본(34ㆍ미국)이 한국에 왔을 때 내가 그의 운전기사 역할을 맡은 적이 있다.

2018평창동계올림픽과 2017년 월드컵 대회를 대비해 코스를 익히기 싶다고 찾아온 본을 위해 우리 스키협회에서는 영어도 되고 운전도 되고 코스도 잘 알고 있는 나를 보냈다.

정선 뒷길로 코스 정상까지 올라가는 덴 차로 1시간은 족히 더 걸린다. 매번 지나 다녀 길을 잘 알고 있던 탓에 차를 조금 빠르게 몰았더니 무서웠나 보다. 처음엔 쭈뼛쭈뼛하며 망설이더니 나에게 “살살 좀 가면 안될까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며칠 뒤 내 제자들이 본에게 사인을 받으러 갔는데 그가 나를 두고 “크레이지 드라이버”라고 말해 우리 둘 다 빵 터졌던 기억이 난다. 지난해 훈련차 미국 커퍼마운틴을 방문해 본을 다시 만났을 때 나를 기억하고는 “그 때 그 드라이버”라고 웃는 모습을 보니 슈퍼스타라기 보다는 털털한 이웃 동생 같았다. 사람을 배려할 줄 알고 성격도 굉장히 좋은 선수다.

린지 본은 말이 필요 없는 슈퍼스타다. 전 세계에서 시상대에 가장 많이 올라간 선수다. 타고난 체격, 근력과 몸의 비율 까지 모든 게 완벽하지만 그를 더욱 대단하게 만드는 건 부상을 극복한 이력이다. 경기 도중 숱한 사고를 당한 그의 양쪽 무릎과 팔에는 철심이 박혀 있다.

스키를 타다가 부상을 한 번 겪고 나면 트라우마가 오래 간다. 고등학생 때 시합을 뛰다가 스키 두 짝이 모두 부러질 정도로 넘어진 적이 있었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어서 일주일 뒤에 다시 스키장에 다시 올라갔는데, 출발선에 서니 너무 무서워 등에서 식은 땀이 흐르던 순간이 2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강하게 남아있다. 본이 당한 사고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일 텐데, 그가 이렇게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보니 정말 대단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 모든 업적은 린지 본 혼자서 이뤄낸 것은 아니다. 미국 스키팀을 20년 지도한 랜디 펠키 코치에게 들어보니 본의 위대한 업적 뒤에는 든든한 스태프들이 있었다. 의사, 트레이너, 피지컬 트레이너를 포함한 코칭스태프 6명이 본과 함께 다닌다. 여기에 미국대표팀을 전담하고 있는 멘탈 트레이너까지, 선수가 오로지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게 미국 정부와 스키협회는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이 사람들은 각 분야의 전문가인 동시에 린지 본의 전문가다. 그가 쓰러질 때 마다 일어날 수 있었던 건 이런 든든한 지원군 덕분이었다.

올림픽 무대에 복귀해 고별전을 치른 본의 모습을 보니 생각이 자연스럽게 우리 대표팀으로 옮겨간다. 최근 지원이 몰라보게 좋아진 건 사실이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올림픽을 앞두고 대한스키협회와 대한체육회의 지원은 역대 최고였다. 이러한 지원이 계속 이어진다면 빠르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성적은 곧 지원이다. 그 동안 비인기 종목이었던 스켈레톤에서 윤성빈 선수가 금메달을 딴 뒤 이용 총 감독은 “다른 비인기 종목도 체계적인 지원이 있으면 메달을 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격하게 공감한다. 튼튼한 지원만 있으면 2022 베이징올림픽에서 국민들에게 충분히 감동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다.

조용제 알파인 스키 국가대표 후보팀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