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율성(鄭律成,1914년 7월 7일 - 1976년 12월 7일) 작곡가, 본명은 정부은(郑富恩)이다. 그(1914~1976)는 62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약 5년 정도를 북한에서 생활했다. 북한에 있을 동안 정율성은 ‘인민군행진곡’ 등 북한 군가와 한민족의 가락을 담은 서정적인 노래들을 많이 창작했다.
정율성은 해방뒤 역사의 격동기에서 고향인 전라남도 광주로 갈 수 없었다. 당시 중국공산당 팔로군 소속이었던 정율성은 당의 명령에 따라 북쪽의 조선땅을 밟게 된다. 정율성 음악가의 중국에서의 활동은 많이 알려져 있다.
정율성은 해방 후 1945년에 북한 김일성에게 보내져 그곳에서 조선노동국가보안대 구락부, 조선노동당황해도선전부 부장, 조선인민군협주단 단장, 조선국립음악대학작곡부 부장 등을 역임한다. 이 시기에 정율성은 지금도 북한에서 불러지고 있는 “조선인민군행진곡”을 작곡하여 김일성에게 바쳤으며 그 노래는 지난 2000년 6월15일 김대중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공항에서 웅장하게 연주됐다고 한다.
그는 북한 김일성에게 이용만 당하고 다시 모택동에게 몸을 의지한다. 그는 중국에서도 모택동의 문화대혁명 혼란기인 1966년부터 1976년까지에는 모든 공식적 음악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에 따른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비교적 젊은 62살의 나이에 고혈압으로 중국에서 사망하게 된다. .
북한에서도 그런 정율성을 기리는 영화 “음악가 정율성”을 1992년에 제작하였고, 지난 노무현 정부에서는 2005년에 공산주의 혁명열사로 39년을 중국과 북한에서 살다간 정율성을 음악가라는 이름으로 “정율성 국제음악회”를 개최하였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광주 MBC측에서는 홍콩의 칸 인터내셔날과 합작으로 정율성을 영화화하겠다고 한다. 광주 저곳에서는 정율성을 마치 항일운동에 몸 바친 영웅으로 떠받들기에 한창이다.
구국홍 주한 중국대사. 강원구기념사업회장. 정찬구 본부장. 박주선 국회의원
정율성과 부인 딩쉐쑹 부부
정율성 음악가의 모친 최영온(崔泳溫)씨와 친손녀 정소제(鄭小提)의 청소년기때 모습.
정율성은 효자였다. 북한에서 그의 생활이 약간 안정이 된 1948년 여름 모친 최영온(崔泳溫, 당시 75세)씨를 광주에서 평양으로 모셔왔다. 모친이 도착한 날 정율성은 감격해서 어머니를 피아노 옆에 앉히고 “어머니, 어릴 때 어머니께서 저에게 가르쳐준 노래를 부를게요”라며 피아노를 치면서 소리높여 노래를 불렀다.
어머니는 이후 정율성을 떠난 적이 없다. 평양에서 북경에 와서 줄곧 정율성 부부와 함께 했다. 어머니는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을 좋아하고 근면성실했다. 1963년 낙상을 당해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는데 골절은 피했지만 외출이 힘들 정도가 되었다. 정율성은 중의병원에서 진료를 받기를 원했는데 항상 어머니를 부축해 모시고 다녔다. 회의가 있을 때도 어머니의 녹창을 막기위해 몸을 돌려 눕혀드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머니는 1964년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나중에 정율성의 조카 정상훈(鄭祥勛)이 유골을 전라남도 광주에 안장했다.
1950년 10월 평양을 떠날 때 정율성은 당시 성냥, 소금과 마른 식량을 준비해서 77살 고령의 어머니를 모시고 평양을 떠나게 된다. 이때 중국대사관의 정무참사관인 차이청원은 특별히 지프차를 보내 정율성의 철수를 도왔다. 중국정부는 당시 정율성 모자외에 다른 한명과 함께 지프차로 신의주까지 모시도록 특별 지시를 내려보냈다 칠흑같이 깜깜한 밤에 운전기사석 바로 옆 앞자리에 앉아서 운전기사에게 길을 알려주며 철수를 도왔다. 당시 저공비행하는 전투기 소리와 멀리 번쩍이는 조명탄의 불빛을 볼 수 있었다고 운전기사는 회고했다.
낮에는 전투기 공격 때문에 차를 위장한 채 세워두고 저녁에 출발해 한밤중을 달려서 갔는데 길가에 민가들이 불타고 있는 곳도 있었다. 이렇게 이틀밤을 꼬박 달려서 신의주에 도착했다. 정율성은 북경으로 돌아온 뒤 북경인민예술극원(藝術劇園)에 배치를 받게된다. 이때부터 정율성은 국적이 조선인이 아니라 중국인이 된다.
초등학교 시절
신흥중학교 시절
팔로군 행진곡 실제 작사자
1946년 2월에 정율성과 정설송(丁雪松)은 처음으로 김일성 주석(당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만났다. 당시 30대 중반의 김일성 위원장(1912~1994)은 각 방면의 역량을 모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초를 다지고 있었다.
김일성 위원장은 딩쉐쑹이 중국공산당의 많은 고위층 지도자들과 친하다는 사실을 알고 중요한 임무를 부여한다. 그것은 바로 중국 북만주에서 식량을 빌려오는 일이었다. 북한은 공업이 발달한 지역이고 남한은 식량 기지였는데 당시 남북이 막힌 상태에서 북한의 식량 사정은 매우 어려웠다.
정설송은 하얼빈(哈爾賓)으로 가서 서북지역의 지도자들을 만났는데 당시 임시로 동북국(東北局) 부서기를 맡은 고강(高崗)과 서만분국(西滿分局) 서기 이부춘(李富春)을 만나 식량지원을 약속받게 된다. 동북국 평양사무실의 책임자인 주리치(朱理治)가 1947년 6월 27일에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중국은 당시 3만톤의 양식을 북한에 지원한 것으로 돼 있다.
정설송이 식량특사로 일을 할 때 김일성 위원장은 정설송을 극진히 대접하는데 그녀는 출국할 때나 귀국할 때 김 위원장의 집에서 묵게 된다. 김일성 위원장은 정설송이 임무를 완수하자 큰 만족감을 표시하면서 일본군에게서 거둔 흰색 비단낙하산을 기념선물로 선사한다. 이 낙하산은 비단실로 정교하고 튼튼하게 만들어졌는데 그녀가 낙하산으로 정율성에게 한벌의 와이셔츠를 만들고 자신과 딸 용으로 치마를 만들어 기념으로 간직한다.
정율성은 부인이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자 김일성 위원장을 접견한 뒤 연안시절 지도자였던 김두봉(金枓奉)과 대동강변에서 샴페인으로 경축파티를 열었다. 당시 동북지역의 전쟁 상황은 소련과 국민당이 <중소우호동맹조약>을 맺어 일본에게서 뺏은 철도와 성시(城市)를 국민당에게 넘겨주기로 한 상황이었고 이에 따라 국민당은 동북지역으로 대병력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사평(四平)전쟁뒤 국민당에 장춘(長春), 길림(吉林) 등을 내주고 송화강(松花江) 북쪽까지 전세가 밀리고 있었으며 북한을 은폐된 후방으로 삼아 남만작전(南滿作戰)을 펼 때 지원을 받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동북국은 1946년 6월 북만분국(北滿分局) 비서장인 주리치(朱理治)를 동북국 주평양 전권대사로 부임시켰으며 소련과 미국의 이목을 피해서 대동강 서안 채관리(釵貫里) 104번지에 “평양이민회사’(平壤利民公司)란 이름으로 간판을 걸었다.
주리치는 연안의 오랜 혁명동지로 정율성의 곡을 아주 좋아할 정도로 친한 관계였다. 주리즈가 책임자로 있을 때 딩쉐쑹은 평양이민회사에 소속돼 2년동안 물자와 부상병 운반 등 업무에서 많은 일을 했다. 당시 정설송과 동북국 평양사무소가 돌본 부상병과 가족 등을 합한 수가 1만8천여명에 이를 정도였다.
당시 북한의 도로를 이용해서 북만주의 곡물, 면화, 석탄 등 물자를 대련(大連)으로 옮겨갔으며 동북지역의 부대가 긴급히 요구해 보낸 식염(食鹽), 포목과 약품, 의료기계, 공업연료 등은 1947년 21만톤, 1948년에 30만톤에 달했다.
북한은 항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병참기지 역할을 했으며 일본군이 남긴 전략물자중 2000여 차량분을 중국에 무상 혹은 교환방식을 통해 지원했다.
북한은 당시 남북만(南北滿)과 해상을 통해 베이징으로 가는 인력들의 중간 통과지였으며 통과인원은 1946년 3천명, 1947년과 1948년은 각각 1만명에 가까웠다. 정설송의 탁월한 업무성과에 따라 조선노동당중앙은 1946년 가을 정설송을 조선노동당중앙교무(僑務)위원회 비서장으로 임명한다.
당시 한반도에는 5~6만명의 중국 화교가 있었고 북쪽에만 2만여명이 있었다. 그녀는 1949년초 화교업무가 중국상업대표단으로 넘어갈 때까지 이 일을 맡는다. 그녀는 1949년 신화사(新華社)주평양분사 사장에 임명된다.
연안에서 중국 공산당 간부와 함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한 후 연안(延安) 팔로군본부는 무정(武亭) 사령관의 인솔하에 조선의용군 전체 인원에 대해 조선으로 들어갈 것을 명령한다. 이에 따라 정율성 음악가와 부인 딩쉐쑹과 2살난 딸 소제(小提) 등 가족들도 같이 조선으로 향한다.
부인 정설송은 당시 중국 공산당내에서 여전사로 이름을 떨쳐 발전가능성이 높았지만 남편 정율성의 뜻에 따라 조선행을 흔쾌히 승락한다.
일본이 항복하자 중국공산당의 본거지였던 옌안(延安)은 기쁨에 겨워 사흘동안 대축제 분위기였다. 폭죽과 함께 나팔소리와 노랫소리가 그치지 않고 남은 음식을 서로 나누는 축제가 계속됐다. 정율성을 포함해 수백명의 조선인 혁명가들도 “조선독립만세!” “조선민족해방만세!” “위대한 항일전쟁만세!”라는 구호를 연이어 외치면서 서로 얼싸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중국은 8년동안의 항일전쟁이 마감되었고 조선은 36년간의 일제치하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당시 조선의용군은 약 400명이었는데 떠나는 날 모두 정율성이 작곡한 ‘연안송’(延安頌)을 부르고 옌안에 우뚝 솟은 보탑산(寶塔山)을 바라보면서 서운해했다. 남은 사람들은 떠나는 사람의 주머니에 대추와 사과를 넣어주며 이별을 고했다. 정율성은 당시 귀국소식을 듣자마자 서둘러 ‘조국을 향하여 전진’(向祖國前進)이란 노래를 작곡했는데 의용군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옌안을 떠났다.
“건장하고 용감한 조선의 용사들이여, 오늘 화북지역을 넘어서 내일은 만주를 지나서 길위의 장애물을 뚫고, 조국을 향해 전진한다. 우리는 용감하게 투쟁해갈 것이다.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인민의 자유를 위하여.”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대열은 며칠 걸려 황하(黃河)에 도착해서 거친 물살의 위험속에 강을 건넌뒤 산서(山西)지역의 눈바람이 휘몰아치는 추운 날씨속에 높은 산을 넘었다. 일행중 나이 어린 아이가 추위에 얼어 숨지기도 했다.
정율성과 정설송은 모든 옷을 딸 샤오티에게 입히고 당나귀의 등에 얹은 나무상자에 샤오티를 담아서 어렵게 전진을 했다. 갑자기 앞에 깎아지른 절벽이 나타났고 폭 50㎝ 정도의 꼬불꼬불한 길 밖에 없었다. 이 길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였는데 나무상자를 얹은 당나귀가 지나가기는 더욱 힘든 길이었다.
한번 실족을 하게 되면 샤오티는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정율성은 신체 건장한 젊은이들이 앞에서 당나귀의 고삐를 잡도록하고 뒤쪽에는 전우(戰友)이자 시인인 곽소천(郭小川)에게 나무 상자와 당나귀의 꼬리를 잡게 해 간신히 이 길을 벗어났다.
일행은 장자커우(張家口), 화이더(懷德), 청더(承德), 진저우(錦州) 등을 거쳐 당시 동북공업중심지인 심양(審陽)에 도착했다. 3개월여 걸린 고난의 행군끝에 1945년 12월 안둥(安東, 현재의 단둥<丹東>으로 신의주와 마주보고 있음)을 거쳐 평양에 도착했다. 이 기간동안에도 정율성은 ‘3.1행진곡’(3.1독립운동을 기리는 노래), ‘조선해방진행곡’ 등 2곡을 지었다
연안에서 북한으로 복귀한 공산당원들은 초기에는 김일성 주석의 신임을 얻어 중요한 직무에 편성이 되었다. 정율성과 정설송의 당적도 조선노동당으로 옮겨졌다. 정율성은 조선노동당 황해도위 선전부장에 임명되었으나 딩쉐쑹은 조선말을 몰라서 아무런 일이 주어지지 않았으며 남편을 도와 문서를 정리하는 일을 했다.
정율성이 해주(海州)에서 토지개혁후 선거업무를 할 때 정설송은 연안에서의 경험을 살려 연설문을 작성해 내용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딩쉐쑹은 당시 김밥, 된장찌개, 김치 등 한국음식에 익숙해지며 한명의 일본인 보모를 둘 정도로 모처럼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휴일에는 정율성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족을 데리고 해변으로 가서 놀기도 했으며 사냥감을 모닥불에 구워먹기도 했다.
샤오티는 당시 3살이었는데 보모에게서 일본어, 러시아에서 항일운동한 이웃에게서 러시아어와 정설송의 중국어와 정율성의 조선어 등 간단한 4개 국어를 한 두마디씩 하는 모습이 귀여워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정율성은 황해도위 선전부장뒤 1946년 평양의 조선보안대(조선인민군의 전신) 클럽 부장(중국군의 문화 부장에 해당)으로 명령이 내려져 바쁘게 활동을 하게 된다. 정율성은 당시 본인이 원하던 일을 맡았기 때문에 인민군협주단의 업무에 적극적으로 종사한다.
그래서 단원들을 선택하고 악곡을 창작하고 지휘업무를 하게되며 평양이민회사를 통해 다롄에 가서 교향악기를 구입했다. 협주단을 만든 뒤에는 전국각지의 순회연주를 해서 김일성 주석의 깊은 관심을 받았다
김일성 주석은 100여명의 전문협주단과 같이 기념촬영을 하기도 할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 정율성은 음악창작의 두번째 수확기에 접어들었다. 정율성은 1947년과 1948년에는 집에 별로 없을 정도로 바빴는데 1950년까지 30여곡을 만들었다.
당시의 음악은 북조선의 군민(軍民)을 위한 곡으로 ‘조선인민군행진곡’ ‘조선해방행진곡’ ‘두만강’ 대합창과 ‘동해어부’ 대합창 등 10여편의 작품을 지었다. 또 옌안시절 연출하지 못한 ‘항일기병대’ 대합창을 다시 작곡하고 평양과 각지에서 200여 차례 공연과 방송을 했다. ‘조선인민군행진곡’은 이후 북한의 군가가 된다. 중국음악평론가와 작곡가들이 “두 국가의 군가를 작곡한 예는 세계음악사상 유례가 없다”고 평가하게 된 이유다.
이 당시의 곡들은 옌안 당시의 창작 기풍을 답습했고 한민족 음악의 새로운 품격을 표현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로 인해 정율성은 조선인민회의, 인민위원회, 문예학술총동맹 등으로부터 4차례 상장과 상금을받게 된다. 1948년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의 ‘모범노동자’의 칭호를 얻는다.
정율성은 그뒤 평양국립음악대학 작곡부장에 임명되었다. 정율성은 총성과 포성중에 미군기가 공습하는 위험한 시각에도 창작활동을 계속했고 음악에만 매달렸다. 그는 당시 ‘공화국 깃발이 바람에 흩날리네’(共和國旗幟迎風飄揚), ‘조선인민유격대전가’(朝鮮人民遊擊隊戰歌), ‘우리는 탱크부대’(我們是坦克部隊), ‘전사의 맹세’(戰士的誓言) 등 다수의 가곡을 남겼다.
중국이 1949년 10월 1일 신중국 탄생을 선포한 지 1주일뒤 중조 양국은 외교관계를 선포했다. 이에 따라 정율성은 ‘조중우의’(朝中友誼)라는 곡을 만든데 이어 ‘신중국을 찬양하는 노래’(歌頌新中國)를 작곡했다
맨오른쪽이 연안파의 사령관 무정(武亭)이고 맨 왼쪽이 정율성. 연안파는 해방뒤 북한으로 들어간뒤 정치적인 숙청을 당하게 된다
당시 연안파인 무정(武亭, 1905~1952년) 장군도 힘을 잃은 상황에서 연안파 출신들에 대한 정치적인 탄압이 시작됐다. 부인 딩쉐쑹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약 내가 신화사분사 사장을 계속하고 중국 대사관의 외교관으로 평양에 계속 남았다면 정율성에게 더욱 곤란했을 것으로 본다. 정율성은 북한의 주류사회에 융합되기가 매우 어려웠다. 비록 내가 조선사람이 될 것을 결심하고 조선 국적을 가지고 노동당원으로서 모든 일을 새로 시작했더라도 그 뒤에 전개된 상황을 볼 때 반드시 좋은 결과를 맺었다고 볼 수가 없다. 그리고 남편과 각자가 갈라서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우리 부부사이는 관계가 너무 깊었다.”
정율성이 마지막으로 택한 길은 중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당시까지 정율성은 중국 생활을 10여년 동안 했고 중국어로 대화가 가능했으며 쓰는 것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는 중국에서 공산당에 참가했고 많은 친구들이 있으며 중국의 음악계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즉 해방전쟁 시기에 ‘연안송’,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을 썼으며 중국으로 가더라도 조선에 있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딩쉐쑹은 당시 자신들의 생각이 매우 천진했다고 회고한다.
정율성은 당시 “나는 한명의 공산당원이며 국제주의자이다. 조선이든 중국이든 모두 같은 사회주의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북한내 현실은 정치적인 집권을 놓고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정설송은 주평양 중국대사관이 설치된 뒤 대사관을 통해 주은래(周恩來) 총리에게 부부의 중국귀국과 정율성 음악가의 중국국적 취득을 요구하게 된다. 주은래는 즉시 붓으로 쓴 친필 서신을 김일성 주석에게 보내며 김일성의 허락하에 정설송은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김 주석은 “중국에서 그렇게 많은 간부들을 배양해 줬는데 정율성 한명을 데려간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라며 호방하게 승낙했다
1945년 8월 항일전쟁승리후 조선의용군 전체인원이 조선으로 돌아가기 전에 기념촬영한 모습. 맨앞줄 가운데에 정율성과 딸 소제의 모습이 보인다
1950년 12월 중국인민지원군창작팀으로 다시 북한에 도착한 정율성과 작사자들 모습
정율성은 그러나 2개월뒤인 1950년 12월 19일 중국인민지원군에 소속돼 조선땅을 다시 밟게 된다.
정율성은 중국인민지원군창작조의 성원으로 유백우(劉白羽) 등 작가 4명과 함께 조선으로 들어가 1951년 4월 중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당시 이들은 중국에서 온 손님으로 조선노동당 중앙의 열렬한 접대를 받았다. 비록 바깥은 연일 포성이 울리고 평양은 이미 포화로 폐허가 되었지만 지하실은 안전했고 창에 커튼이 처져있었으며 작은 원탁테이블에는 꽃다발이 놓여있었다. 정율성 일행은 이곳에서 며칠 머물렀는데 점심과 저녁때마다 조선노동당 중앙영도들이 오찬과 만찬을 제공했고 김일성 주석과 정율성은 조선어로 이야기를 주고 받기도 했다.
1951년 1월 초순에 중국지원군은 제3차 작전에 들어갔는데 9일동안의 연속작전에 의해 37도선 이남으로 내려갔고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을 건너 인천항까지 들어갔다. 이때 정율성은 지원군을 따라서 서울까지 내려와 기와조각과 벽돌조각을 헤집고 조선궁정음악의 악보중에서 모두 2부 18집의 고전악보를 찾아냈다. 부인 딩쉐쑹은 1996년 방한해서 이 악보를 기증해 한국음악사상 진귀한 문헌으로 보존되고 있다.
정율성은 한강 남단의 백운산에서 류바이위와 함께 ‘백운산을 노래한다’(唱歌白雲山), 웨이웨이(魏巍)와는 당시 ‘사랑하는 군대, 사랑하는 사람’(親愛的軍隊親愛的人)을 지었다. 또 구양산종(歐陽山尊)과 ‘중국인민지원군행진곡’과 ‘지원군 십대 찬가(志願軍十贊)를 썼고, 릉자풍(凌子風)과는 빠른 선율의 ‘한강소창’(漢江小唱) 등을 작곡했다. 이 곡들은 모두 정율성이 중국 국적의 인민지원군 신분으로 창작한 곡들이다. 이 곡들은 현재 단동(丹東)에 있는 항미원조기념관(抗美援朝記念館)에 전시되어 있다.
병환으로 사망하기 직전
정율성의 딸 정소제는 아버지에게서 피아노를 직접 배웠으며 현재 북경 실내합창단 단장을 맡고 있다
그가 생전에 살았던 생가를 남창시장이 방문하는 장면 정율성기념사업회 강원구회장과 정찬구 본부장
광주에서 매년 열리는 정율성 음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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