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산책(漢詩散步)

暮江吟 / 白居易

含閒 2016. 11. 6. 10:06

저녁 강가에서 /백거이/삼도헌의 한시산책 407

저녁 강가에서 읇조리며[暮江吟]

 백거이(白居易)  

                      


서호풍경(서예세상 중국답사 때 진병근 선생이 촬영한 사진입니다)



一道殘陽鋪水中(일도잔양포수중)  한 줄기 석양 물속으로 퍼지니 

半江瑟瑟半江紅(반강슬슬반강홍)  강의 반쪽은 푸르고 반쪽은 붉도다. 

可憐九月初三夜(가련구월초삼야)  아름다운 구월 초사흘 밤  

露似眞珠月似弓(노사진주월사궁)  이슬은 진주 같고 달은 활 같도다.   



  삼도헌과 함께 맛보기

  중국 항주(杭州)의 상징인 거대한 인공호수인 서호(西湖). 태양이 서호의 서쪽으로 넘어가면서 석양이 물 위에 넓게 퍼지니 수면은 절반이 푸른색이고 절반은 붉은 색으로 교차된다. 때는 음력 구월 초사흘이니 지금의 10월 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은 진주 같고 달은 활 같이 보인다. 여기서 殘陽(잔양)은 막 지려는 해를 말하고, 瑟瑟(슬슬)은 푸른색의 보석으로 강물의 색이 푸름을 의미한다. 可憐(가련)은 사랑스럽고 아름답다는 뜻이니 석양이 지고 달이 떠 오른 서호의 고운 저녁풍경을 읊조린 것이다. 특히 색채감이 강하게 대비되어 시각성이 두드러져 보인다. 중국속담에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는 말이 있다. 일찍이 13세기 항주에 왔던 이탈리아의 여행가 마르코폴로도 항주를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칭송한 바 있다. 서호(西湖)에는 두 사람이 쌓은 제방이 있다. 이 시의 저자인 당나라의 백거이가 항주자사(杭州刺史)3년 동안 있을 때 쌓은 제방이 백제(白堤)이고, 송나라의 소동파가 관리로 있을 때 쌓은 제방이 소제(蘇堤)이다.


   어느 해 가뭄이 심하여 백성들이 서호의 수문을 열어 줄 것을 요청하자 백거이는 수문을 열어 가뭄을 해소하게 하였다. 그는 서호의 제방을 보수하고 쌓은 업적으로 백성들의 칭송을 들었다. 서호의 물과 연꽃을 보존하는 것이 관리의 임무였지만, 그는 백성들의 고초를 먼저 생각하고 선정을 펼쳤던 것이다.


   소동파 또한 서호의 제방을 쌓은 백성들을 대접하기 위해 술과 간장과 식초를 준비하라고 하였는데 이를 잘못 알아들은 관리들이 술과 간장과 식초를 돼지고기에 넣고 삶아 버렸다. 이것이 바로 동파육(東波肉)이다. 그는 동파육을 백성들에게 대접하면서 그들의 공을 기렸다고 하는데 지금도 항주의 특별식으로 남아있다.


   이와 같이 거대한 서호에는 두 사람이 쌓은 제방이 있고, 넓은 강에는 여러 가지 역사적 흔적이 전해지고 있다



  백거이(白居易, 772 ~ 846)

  자는 낙천(樂天),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 시호는 문(). 허난 성[河南省] 신정 현[新鄭縣] 사람이다. 그는 우리에게 자인 백낙천으로 더 잘 알려진 당나라 시인이다.


시선(詩仙)’이라 일컬어지는 이백은 시를 쓸 때 한 잔 술에 막힘없이 한 번에 써 내려갔다고 하며,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두보는 열 번의 손질을 했다고 한다. 백거이는 시를 탈고할 때마다 글을 모르는 노파에게 먼저 들려준 뒤 노파가 알아들었는지를 묻고, 노파가 뜻을 알 때까지 몇 번이고 고쳤다고 한다. 이렇게 그의 시는 쉬운 어휘로 이루어져 있으며, 통속적이면서도 당시의 사회상이 반영되어 있다.


   백거이는 80029세 때 최연소로 진사에 급제했다. 그가 항주에서 벼슬을 한 때는 당나라 장경(長慶) 2년인 822. 중앙의 권력투쟁에서 벗어나 항주자사(杭州刺史)를 자원했다. 3년 동안 항주에서 벼슬을 한 뒤 소주자사(蘇州刺史)로 옮겼다가 조정에 복귀하여 비서감(秘書監형부시랑(刑部侍郞하남윤(河南尹) 등의 고위직을 거쳤으며, 842년 형부상서(刑部尙書)를 끝으로 관직에서 은퇴했다.


   한림학사 시절의 동료 5명은 모두 재상이 되었으나 그는 스스로 '어옹'(漁翁)이라 칭하며 만족해 했다. 이같이 성실하고 신중한 태도로 인해 그는 정계의 격심한 당쟁에 휘말린 적이 없었다. 58세가 되던 829년 낙양에서 살면서 시와 술과 거문고를 세 친구[三友]로 삼아 '취음(醉吟)선생'이란 아호를 쓰며 세월을 보냈다. 831년 낙양 교외의 향산사(香山寺)라는 절을 수리하여 '향산거사'라는 아호를 쓰며 불교에 심취하였다. 8468월 세상을 하직하고 낙양(洛陽)의 용문산(龍門山)에 묻혔다.


   그가 지은 작품의 수는 대략 3,840편인데 작가와 작품의 수가 크게 증가한 중당시대라 하더라도 놀라운 일이다. 더구나 그의 작품은 형식이 다양하여 고체시(古體詩금체시(今體詩율시악부(樂府가행·()의 시가에서부터 산문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학형식을 망라했다. 부패한 사회상을 풍자·비판하고, 서민적이고 쉬운 필치로 문학의 폭을 확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 장한가, 비파행, 진중음(秦中吟), 신악부(新樂府), 두릉의 노인등이 있다.

 



서예세상 삼도헌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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暮江吟
一道残阳铺水中 ,半江瑟瑟半江红
可怜九月初三夜,露似真珠月似弓[1] 

暮江吟注释译文

 

暮江吟词句注释

⑴暮江吟:黄昏时分在江边所作的诗。吟,古代诗歌的一种形式。
⑵残阳:快落山的太阳的光。也指晚霞。
⑶瑟瑟:原意为碧色珍宝,此处指碧绿色 。
⑷可怜:可爱。九月初三:农历九月初三的时候。
⑸真珠:即珍珠。月似弓:农历九月初三,上弦月,其弯如弓。[2]  [3] 

暮江吟白话译文

一道残阳渐沉江中,半江碧绿半江艳红。
最可爱的是那九月初三之夜,亮似珍珠郎朗新月形如弯弓。[2] 

暮江吟创作背景

 

此诗大约是长庆二年(822年)白居易在赴杭州任刺史的途中写的。当时朝廷政治昏暗,牛李党争激烈,诗人品尽了朝官的滋味,自求外任。作者离开朝廷后心情轻松畅快,因作此诗。[3]  [4] 

暮江吟作品鉴赏

 

暮江吟文学赏析

《暮江吟》诗意画 《暮江吟》诗意画
《暮江吟》是白居易“杂律诗”中的一首。全诗构思妙绝之处,在于摄取了两幅幽美的自然界的画面,加以组接。一幅是夕阳西沉、晚霞映江的绚丽景象,一幅是弯月初升,露珠晶莹的朦胧夜色。两者分开看各具佳景,合起来读更显妙境,诗人又在诗句中妥帖地加入比喻的写法,使景色倍显生动。由于这首诗渗透了诗人自愿远离朝廷后轻松愉悦的解放情绪和个性色彩,因而又使全诗成了诗人特定境遇下审美心理功能的艺术载体。
前两句写夕阳落照中的江水。“一道残阳铺水中”,残阳照射在江面上,不说“照”,却说“铺”,这是因为“残阳”已经接近地平线,几乎是贴着地面照射过来,确像“铺”在江上,很形象;这个“铺”字也显得委婉、平缓,写出了秋天夕阳独特的柔和,给人以亲切、安闲的感觉。“半江瑟瑟半江红”,天气晴朗无风,江水缓缓流动,江面皱起细小的波纹。受光多的部分,呈现一片“红”色;受光少的地方,呈现出深深的碧色。诗人抓住江面上呈现出的两种颜色,却表现出残阳照射下,暮江细波粼粼、光色瞬息变化的景象。诗人沉醉了,把他自己的喜悦之情寄寓在景物描写之中了。
后两句写新月初升的夜景。诗人流连忘返,直到初月升起,凉露下降的时候,眼前呈现出一片更为美好的境界。诗人俯身一看,江边的草地上挂满了晶莹的露珠。这绿草上的滴滴清露,很像是镶嵌在上面的粒粒珍珠。用“真珠”作比喻,不仅写出了露珠的圆润,而且写出了在新月的清辉下,露珠闪烁的光泽。诗人再抬头一看,一弯新月初升,如同在碧蓝的天幕上,悬挂了一张精巧的弯弓。诗人把这天上地下的两种美妙景象,压缩在一句诗里——“露似真珠月似弓”。作者从像弓一样的一弯新月,想起当时正是“九月初三夜”,不禁脱口赞美它的可爱,直接抒情,把感情推向高潮,给诗歌造成了波澜。
诗人通过“露”、“月”视觉形象的描写,创造出和谐、宁静的意境,用这样新颖巧妙的比喻来精心为大自然敷彩着色,描容绘形,给读者展现了一幅绝妙的画卷。由描绘暮江,到赞美月露,这中间似少了一个时间上的衔接,而“九月初三夜”的“夜”无形中把时间连接起来,它上与“暮”接,下与“露”、“月”相连,这就意味着诗人从黄昏时起,一直玩赏到月上露下,蕴含着诗人对大自然的喜爱、热爱之情。
另外,值得读者注意的是这首诗中的时间问题。《暮江吟》写了三个不同的“时间”。通过以上分析,《暮江吟》前两句写的时间是日落前(一小段时间)或日落时;后两句主要写日落后(一小段时间),即黄昏;由后两句还引伸出夜里一段时间。这完全符合作者的观赏顺序,即作者先于日落前看到了“残阳铺照”,又于日落后看到了“月似弓”,再于夜间看到了“露似真珠”。大多数资料都认为,“月似弓”与“露似珍珠”是作者于夜间同一时刻看到的,前写天上,后写地下。其实这是因为缺少天文、气象常识,忽视了两种自然现象之间的“时间差”问题。如前所述,作者看到“九月初三”、“月似弓”之时,只能是在日落后不久。此时,由于太阳刚刚落山不久,地面散失的热量还不多,凉露尚未形成;而等到夜里“露似真珠”之时,似弓之月却又早已沉入西方地平线以下了。[5] 

暮江吟名家点评

宋代范晞文《对床夜话》:唐人绝句,有意相袭者,有句相袭者。王昌龄《长信宫》云:“玉颜不及寒鸦色,犹带昭阳日影来。”孟迟《长信宫》亦云:“自恨轻身不如燕,春来还绕御帘飞。”……又杜牧《沈下贤》云:“一夕小敷山下路,水如环佩月如襟。”白乐天《暮江吟》云:“可怜九月初三夜,露似真珠月似弓。”刘长卿《送朱放》云:“莫道野人无外事,开田凿井白云中。”韩偓《即日》云:“须信闲中有忙事,晓来冲雨觅渔师。”此皆意相袭也。
明代杨慎升庵诗话》:诗有丰韵。言“残阳铺水”,半江之碧,如“瑟瑟”之色;“半江红”,日所映也。可谓工微入画。
清高宗敕编《唐宋诗醇》:写景奇丽,是一幅着色秋江图。
清代宋顾乐《唐人万首绝句选评》:丽绝韵绝,令人神往。
近代俞陛云《诗境浅说续编》:上二句写江天晚景入妙。后二句言一至深宵,新月如弓,正初三之夕;其时露气渐浓,如珠光的皪,正九月之时。夜色清幽,诵之觉凉生袖角。通首皆写景,惟第三句“谁怜”二字,略见惆怅之思,如水清愁,不知其着处也。[4]  [5] 

暮江吟作者简介

 

白居易(772~846),唐代诗人。字乐天,号香山居士。生于河南新郑,其先太原(今属山西)人,后迁下邽(今陕西渭南东北)。贞元进士,授秘书省校书郎。元和年间任左袷遗及左赞善大夫。后因上表请求严缉刺死宰相武元衡的凶手,得罪权贵,贬为江州司马。长庆初年任杭州刺史,宝历初年任苏州刺史,后官至刑部尚书。在文学上,主张“文章合为时而著,歌诗合为事而作”,是新乐府运动的倡导者。其诗语言通俗,人有“诗魔”和“诗王”之称。和元稹并称“元白”,和刘禹锡并称“刘白”。有《白氏长庆集》传世。[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