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빈자의 성녀' 테레사 수녀, 가톨릭 성인 됐다(종합2보)

含閒 2016. 9. 5. 10:42

'빈자의 성녀' 테레사 수녀, 가톨릭 성인 됐다(종합2보)

선종 19년 만에 이례적으로 빠른 시성…교황 "테레사 수녀는 자애로운 성인"
바티칸 시성식에 전 세계 신도 12만 명 운집

(바티칸시티=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돌보는 데 평생을 바친 '빈자의 성녀' 테레사 수녀가 선종 19년 만에 가톨릭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교황청은 4일 오전(현지시간)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 주례로 테레사 수녀의 시성식과 시성미사를 거행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성미사에서 "테레사 수녀는 길가에 내버려져 죽음을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몸을 굽히고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존엄성을 보았다"며 테레사 수녀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와 병자, 버림받은 자의 생명을 지킨 자애로운 성인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교황은 "테레사 수녀는 목소리를 내 전 세계의 권력자들이 자신이 만들어낸 빈곤이라는 범죄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고 강조했다.

또 "테레사 수녀의 미소를 우리의 가슴에 담고 우리가 여정 중에 만난 사람들, 특히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이를 전하도록 하자"고 덧붙였다.

교황은 이날 테레사 수녀를 성인으로 선포한 직후 "우리는 테레사 수녀를 '성 테레사'라고 부르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며 "우리에게 너무 가깝고, 너무나 다정하고, 너무 유익해서 우리는 계속 그를 '마더'(수녀님 혹은 어머니)로 부르고 싶어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날 테레사 수녀의 시성식에는 전 세계에서 약 12만 명의 신도가 모여 역사적 순간을 함께했다. 이들은 교황이 테레사 수녀를 '성인'으로 추대하자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테레사 수녀가 거의 평생을 바쳐 봉사한 나라인 인도가 수슈마 스와라지 외교장관 등 정부 각료 12명을 대표 사절단으로 파견했고, 13개국 정상과 바티칸 주재 외교 공관 관계자들도 자리를 함께했다. 한국 정부와 천주교단은 사절단을 파견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는 가난한 이를 위해 살아온 테레사 수녀의 삶을 기리듯 노숙자 1천500명이 초청됐고, 시성식이 끝난 후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들을 교황청 내부로 불러 피자를 대접했다.

테레사 수녀 초상화
테레사 수녀 초상화[AFP=연합뉴스]
바티칸 성베드로광장의 군중(AP=연합뉴스)
바티칸 성베드로광장의 군중(AP=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과 사랑의 선교회 소속 수녀[AP=연합뉴스 자료사진]
프란치스코 교황과 사랑의 선교회 소속 수녀[AP=연합뉴스 자료사진]

 

테레사 수녀는 가톨릭 교단을 넘어 20세기를 통틀어서도 가장 상징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 현재는 마케도니아의 수도이지만 당시엔 오스만 튀르크에 속했던 스코페에서 1910년 알바니아계 부모 슬하에서 태어났다.

1928년 아일랜드에서 수녀 생활을 시작한 그는 이듬해 인도로 넘어가 약 20년 동안 인도 학생들에게 지리 과목을 가르치다 1950년 '사랑의 선교회'를 세워 극빈자, 고아, 죽음을 앞둔 사람 등 소외된 이들을 위해 헌신했다.

이러한 공로로 197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1997년 9월 5일 인도 동부 콜카타에서 선종했다.

가톨릭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복잡한 절차와 길게는 수 세기에 이르는 지난한 세월이 필요하지만 테레사 수녀는 생전에 누린 대중적인 인기와 전·현직 교황의 각별한 배려 덕분에 이례적으로 빨리 성인 대열에 합류하게 됐다.

테레사 수녀와 깊은 우정을 나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테레사 수녀가 선종한 지 불과 2년 만에 시복 절차를 개시, 2003년 테레사 수녀를 복자로 추대했다.

복자품에 오르기 위한 필수 요건인 기적으로는 1998년 테레사 수녀에게 기도해 위 종양을 치유한 것으로 알려진 인도 여성 모니카 베르사의 사례가 가톨릭 교단에 의해 인정받았다.

교황청은 이어 작년 12월 다발성 뇌종양을 앓던 브라질 남성 마르실리우 안드리뉴가 2008년 테레사 수녀에게 기도한 뒤 완치된 것을 테레사 수녀의 두 번째 기적으로 인정했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올 3월 테레사 수녀의 성인 추대를 공식 결정했다.

테레사 수녀의 삶 자체가 가톨릭이 지향하는 자비의 사표가 될 뿐 아니라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즉위 때부터 '가난한 교회'로 돌아갈 것을 강조해온 터라 '자비의 희년'에 맞춰 테레사 수녀의 시성식을 열기로 한 것으로 풀이된다.

테레사 수녀가 성인으로 선포되자 인도 콜카타에서는 그가 1950년 설립한 '사랑의 선교회'에 모여 있던 수 백 명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또, 테레사 수녀의 고향인 마케도니아에서도 기념행사가 열렸다. 테레사 수녀가 태어난 곳인 마케도니아 수도 스코페에서 약 50명이 테레사 수녀 기념관에 모여 기쁨을 나눴다.

한편, 테레사 수녀가 빈자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향상시키는 데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단순 구호에만 치중하고, 독재자들이 건넨 자선기금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등 한계를 안고 있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또, 그가 힌두교를 믿는 인도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하려 한 '종교적 제국주의자'였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시성식 모습. 2016.9.4(AP=연합뉴스)
시성식 모습. 2016.9.4(AP=연합뉴스)
1979년 노벨평화상 수상하는 테레사 수녀 [AP=연합뉴스 자료사진]
1979년 노벨평화상 수상하는 테레사 수녀 [AP=연합뉴스 자료사진]

 

ykhyun14@yna.co.kr



성인 테레사 수녀, '또다른 얼굴' 주장 왜 자꾸 나오나

평생 빈자를 돌본 '어머니'.."고통받는 환자들, 치료 소홀했다" 주변 증언도아시아경제 | 김희윤 | 입력 2016.09.07. 10:58


“가난한 사람들이 이기도록 도와주는 사람
몸이 부서지도록 일하는 사람
밤새도록 달을 바라보는 사람, 그러면
세상이 너의 비석이 될 거야-”

- 아틸라 요제프의 시 ‘일곱 번째 사람’ 중에서

‘빈자의 성녀’라 불리며 일생 극빈자를 돌본 공로로 ‘복자’에 오른 테레사 수녀가 현지시각 어제(4일) 바티칸에서 ‘성인’에 추대됐다. 가톨릭 성인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할 까다로운 절차와 증명은 인구에 회자되어 온 테레사 수녀의 대중적 지지와 교황의 배려, 그리고 기적으로 인정받은 사건 등을 통해 신속히 진행, 이례적으로 선종 19년 만에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대립과 반목이 계속되는 국제사회의 갈등관계 속에 세상을 껴안았던 어머니의 이름을 세계 각국에서 반기고 있는 것이다.

일생을 빈자를 돌보는데 투신한 테레사 수녀는 2003년 복자 추대에 이어 지난 4일,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에서 시성식을 통해 성자로 추대됐다.
일생을 빈자를 돌보는데 투신한 테레사 수녀는 2003년 복자 추대에 이어 지난 4일,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에서 시성식을 통해 성자로 추대됐다.
테레사 수녀가 되기 전, 학창시절의 아녜즈 곤제 보야지우(Anjeze Gonxhe Bojaxhiu)는 성가대 활동과 봉사에 열심인 평범한 학생이었다.
테레사 수녀가 되기 전, 학창시절의 아녜즈 곤제 보야지우(Anjeze Gonxhe Bojaxhiu)는 성가대 활동과 봉사에 열심인 평범한 학생이었다.


정치인의 딸에서 신의 종으로

구유고슬라비아 정치인 가문의 막내딸로 태어난 테레사 수녀의 본명은 ‘아녜즈 곤제 보야지우’로 1928년 19세의 나이로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수녀회에 입회, 1937년 수녀로서 종신서원을 하면서 구도자의 길에 들어섰다. 약자를 보살피라는 소명을 받고 인도에 정착한 것은 1952년. 한 신도가 제공한 집을 ‘임종자의 집’이라 이름 붙이고 그에 앞서 그녀가 수녀회에서 가르치던 제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사랑의 선교회’를 통해 죽음을 앞둔 빈자들과 고아가 된 그들의 자식을 돌보기 시작하며 본격적인 활동범위를 넓혀갔다.

그녀는 일생을 신께 서원하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혼자 내버려두지 않는 것’을 자신의 봉사 방향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으로 고아가 된 자녀들 또한 돌보기 시작하면서 빈자의 어머니로서 낮은 곳에서 절망에 신음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자선을 베풀었다.

1979년 12월 10일, 노벨평화상 수상 후 소감을 밝히는 테레사 수녀 / 사진 = NovelPrize.org 영상 캡쳐
1979년 12월 10일, 노벨평화상 수상 후 소감을 밝히는 테레사 수녀 / 사진 = NovelPrize.org 영상 캡쳐


사회가 외면하는 사람들 품다

197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그 선행이 알려진 테레사 수녀는 수상 소감에서 “배고프고 벌거벗고 집이 없고 신체에 장애가 있으며 눈이 멀고 질병에 걸려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거부당하며 사랑도 받지 못하고 사회에 짐이 되고 모든 이가 외면하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이 상을 기쁘게 받겠다”고 밝히며 자신이 돌봐온 빈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수상을 계기로 세계 각국에서 구호와 성금이 밀려오자 테레사 수녀의 사랑의 선교회 또한 활동영역이 확대되었다. 한센병과 결핵, 에이즈 환자를 위한 요양원을 설립하고 극빈자와 고아들을 위한 무료 급식소와 상담소, 그리고 학교를 세워 깊은 사랑을 실천한 테레사 수녀의 활동아래 손쉽게 죽음에 이르렀을 많은 환자들이 모여들어 안식과 위안을 얻고 새로운 삶을 찾아갔다.

캘커타 마더 테레사 하우스 (임종자의 집) 내부 풍경. 사진 = motherteresa.org 제공
캘커타 마더 테레사 하우스 (임종자의 집) 내부 풍경. 사진 = motherteresa.org 제공


선행의 빛과 그림자

역사적 기록이 아닌 동시대를 함께 숨 쉬고, 생활했던 성인의 등장은 그 이전 단계인 복자 추대 때부터 다양한 논란을 불러왔다. 아름답고 헌신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인간이기에 간과하고 행한 실수와 과오를 모두 지켜본 사람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테레사 수녀의 모습 이면의 진실에 대해 끈질기게 밝혀오고 있다. 바티칸 내부 또한 성인 추대 과정에서 후보자의 과오를 조목조목 조사하고 밝히는 악마의 대변자(Advocatus Diaboli)가 그녀의 행적과 품성에 있어 회의적 의견을 다각도로 제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가 운영했던 ‘임종자의 집(칼리가트)’은 수많은 환자와 걸인들이 치료와 안식을 얻은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이 시설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했던 이들의 증언은 그와 다른 풍경을 증언한다. 먼저 테레사 수녀가 이곳 시설을 개선하는 데에 의지가 전혀 없었고, 열악한 운영을 고집했다는 것. 한 자원봉사자의 증언에 따르면 주삿바늘을 찬물에 씻어 재활용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며, 중환자와 가벼운 증상의 환자 구분은 물론 남녀 구분이 따로 없이 일괄 수용하면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으면 나을 수 있는 사람들이 그저 몇 달, 몇 년간 누워만 있다가 죽어갔다고 고백했다.

이는 테레사 수녀의 확고한 신념에서 기인한 일들인데, 그녀는 “가난과 고통은 하나님의 축복”이라 믿었으며 이 때문에 세계 각지에서 이어지는 후원과 구호물품을 통해 시설을 개축하고 현대화된 의료장비를 갖추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미국의 칼럼니스트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테레사 수녀의 구호활동 이면의 의혹을 가감없이 밝혀낸 대표적 무신론자이다. 그는 테레사 수녀의 성인 추대에 앞서 교황청에서 해당 인물을 검증하기 위해 선정하는 '악마의 대변인' 측으로부터 초빙, 그녀의 과오에 대해 낱낱이 지적한 바 있다.
미국의 칼럼니스트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테레사 수녀의 구호활동 이면의 의혹을 가감없이 밝혀낸 대표적 무신론자이다. 그는 테레사 수녀의 성인 추대에 앞서 교황청에서 해당 인물을 검증하기 위해 선정하는 '악마의 대변인' 측으로부터 초빙, 그녀의 과오에 대해 낱낱이 지적한 바 있다.


자비와 논란

사실 테레사 수녀는 의사나 간호사가 아니고, 의학 공부는 수녀회를 떠나던 해 기초 간호학을 속성으로 수료한 1년이 전부였다. 전문 의료인이 나서 시설을 운영해도 의료적 혜택을 환자에게 고루 줄 수가 없는 상황에서 그녀는 의학상식에 앞서 종교적 믿음과 이들을 돌봐야 한다는 동정심을 앞세워 구호활동에 매진했고 이 같은 활동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져 가는 그녀의 명성에 반해 방치되다시피 한 환경에서 죽어가는 환자들로 극단적 대비를 이뤘다. 이는 미국의 저널리스트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책 ‘자비를 팔다’를 통해 널리 알려진 바 있다.

평화를 부르짖는 그녀의 호소에 긴장 일로의 미국과 이라크 간 갈등이 두 정상의 화해 제스처로 종전에 이른 것은 당시 그녀가 가졌던 영향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녀는 엄격한 가톨릭 교리를 이유로 강간피해 여성의 출산을 권장한 일과 독재정권하에 고통 받는 아프리카 대륙의 사람들에게 무조건적 인내를 권한 일 등을 통해 당대 흑인 인권운동가 맬컴 엑스를 통해 “종교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착취와 차별로 얼룩진 아프리카 원주민을 순한 양처럼 반항하지 못하게 만든 점”이라고 우회적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일 열린 시성식 준비행사에서 참가자들이 테레사 수녀의 성화를 운반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2일 열린 시성식 준비행사에서 참가자들이 테레사 수녀의 성화를 운반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인간에서 성자로

실수가 없는 인간의 삶은 바꿔 말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삶’일 것이다. 병자를 돌보느라 허리를 굽혀 생활한 탓에 말년에는 허리가 완전히 굽어 버렸고, 2차 심장발작 이후에도 병자를 돌보려다 말라리아에 감염돼 고통의 순간을 보냈던 그녀의 삶 전체가 무지와 독선에서 비롯된 과오로 인해 아예 없던 것이 될 순 없을 것이다.

그녀에 대해 비난의 날을 세웠던 칼럼니스트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교황청으로부터 성자 추대에 앞서 테레사의 과오를 살피는 악마의 대변인 역할로 초빙받아 바티칸에서 그녀의 실수와 잘못을 낱낱이 지적한 사실을 밝힌 바 있다. 자비와 긍휼을 모두 외면하는 시대, 한 시대를 품은 ‘어머니’의 모습은 우리에게 여전히 빛과 그림자로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김희윤 작가 film4h@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