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산책(漢詩散步)

이율곡의 산중(삼도헌의 한시산책 325)

含閒 2014. 11. 25. 10:42

이율곡의 산중(삼도헌의 한시산책 325)

 

 

 

선운사 단풍

 

 

 

산속에서[山中]

 

李栗谷(이율곡)

 

                               採藥忽迷路 (채약홀미로) 약초 캐다 홀연히 길을 잃었는데 

                         千峰秋葉裏 (천봉추엽리) 일천 봉우리가 가을 낙엽 속에 있네. 

                         山僧汲水歸 (산승급수귀) 산중 스님이 물 길어 돌아가더니 

                         林末茶烟起 (임말다연기) 숲 끝에서 차 달이는 연기 피어나네.

 

 

   삼도헌과 함께 맛보기

 

   만추의 계절, 눈에 보이는 산봉우리 마다 붉은 물감이 칠해졌다. 멀리서 보면 산마다 울긋불긋하지만 가까이 가면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약초 캐러 산 속으로 들어갔는데 가을 단풍에 취해 그만 길을 잃어 버렸다. 낙엽 너머 스님이 물을 길어 돌아가더니 어느새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른다. 아마 차를 끓이기 위해 불을 지핀 것 같다.

 

   율곡선생의 이 시는 시각적인 묘사가 탁월하고 선경(仙境)을 보는 듯하다. 일찍이 불가에 귀의해 보았던 그의 마음이 엿보인다. 기구에서는 당나라 가도가 읊은 심은자불우(尋隱者不遇)’가 생각난다. “소나무 아래 동자에게 물어보니[松下問童子], 스승은 약초 캐러 갔다고 말한다[言師採藥去].” 동자는 스승이 산 속에 있기는 하지만 구름이 깊어 찾지 못한다고 대답한다. 낙엽은 상실의 상징이다. 우리는 상실되어야 그 진수를 알게 된다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렇다.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 소중함을 깨닫는다. 낙엽, 금전, 건강, 친구 등등이 그렇다. 시적화자는 약초 캐는데 정신이 팔려 만산이 단풍 속에 물든 줄 몰랐는데 길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가을이 깊었음을 깨닫는다. 

 

   전구와 결구에서는 고려의 백운 이규보가 노래한 정중월(井中月)’이 떠오른다. “산속 스님이 달빛을 탐하여[山僧貪月色], 함께 병속에 길러 담았네[竝汲一甁中]” '산 속에 사는 스님이 달빛이 고와 물병에 담아왔다'고 백운이 노래했다면, '산에 사는 스님이 물 길러 돌아가 차를 끓이기 위해 모락모락 연기를 피워 올린다'고 율곡은 말한다. 그 스님은 먼발치에서 길 잃어버린 사람을 보고 차 한 잔 마시고 가라고 차를 달이는 게 아닐까. 상실의 계절에 중생을 위해 베풀려는 스님의 차 맛은 어떤 맛일까. 이 시를 음미하면서 함께 맛보시기 바란다. 읽으면 읽을수록 여운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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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李珥, 1536~1584)

 

   조선시대의 문신, 성리학자이며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 작가, 시인이다. 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원수(元秀)이며,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이다. 어려서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1548(명종 3) 13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다. 16세에 어머니를 여의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서 3년간 시묘(侍墓)했다. 1554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스스로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다시 유학에 몰두했다. 155823세 되던 해에 예안(禮安)의 도산(陶山)으로 가서 당시 58세였던 이황을(李滉)을 방문했다. 그 뒤 몇 차례 서신을 통하여 경공부(敬工夫)나 격물(格物궁리(窮理)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156429세가 되어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기까지 모두 9번에 걸쳐 장원을 하여 세간에서는 그를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었다. 1564년 호조좌랑에 처음 임명된 뒤 예조좌랑·정언·이조좌랑·지평 등을 지냈다. 1573년 직제학이 되고 이어 동부승지로서 참찬관을 겸직했으며, 다음해 우부승지·병조참지·대사간을 지낸 뒤 병으로 사직했다. 그 후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사직하고, 율곡과 석담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했다. 1581년 대사헌·예문관제학을 겸임하고,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냈다. 이듬해 이조·형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83년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의 탄핵으로 사직했다가 같은 해 다시 판돈녕부사와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584년 정월,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했다.

 

 

 

삼도헌의 한시산책 325

2014년 11월 24일 발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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