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태의 들국화(삼도헌의 한시산책324)
현재 심사정 <들국화와 잠자리>
들국화[野菊]
홍세태(洪世泰)
野菊本無主(야국본무주) 들국화는 본래 임자가 없는데 寒花開爲誰(한화개위수) 차가운 꽃 누굴 위해 피었을까 行人來自折(행인래자절) 길가는 나그네가 꺽어 馬上有新詩(마상유신시) 말 위에서 새로운 시 읊조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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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에 피는 꽃이 매화라면 국화는 모든 꽃이 진 가을에 피는 꽃이다. 문인묵객들은 수많은 시에서 국화를 소재로 삼고 있다. 특히 차가워진 가을에 서리를 이겨내면서 핀 들국화의 속성을 사랑한 선비들이 많았다. 송대 소동파는 “연꽃은 지고나면 비를 받칠 덮개가 없지만, 국화는 시들어도 서리를 이겨내는 가지가 있다 [荷盡已無擎雨蓋,菊殘猶有傲霜枝]”고 상찬했다.
위나라 장수 종회(鍾會)는 국화부(菊花賦)에서 “국화에는 다섯 가지 아름다움이 있다. 둥근 꽃송이가 높이 달린 것은 하늘을 본받은 것이고, 잡티없이 순수한 황색은 땅의 색이며, 일찍 심어 늦게 꽃이 달리는 것은 군자의 덕이고, 찬 서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꽃을 피우는 것은 굳세고 곧은 기상을 드러낸 것이며, 술잔에 가볍게 떠 있는 것은 신선의 음식이다 [夫菊有五美焉,圓花高懸,準天極也。純黃不雜, 后土色也。早植晚登,君子德也。冒霜吐穎,象勁直也。 流中輕體,神仙食也。]”라고 국화를 군자에 비유했다.
이와 같이 여러 사람들이 시문에 국화를 올렸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선비들이 얼마나 국화를 아끼면서 관찰했는지 알 수 있다. 시문과 서화를 통해 국화가 지닌 인고와 절개의 성정를 본받고, 수양과 양생의 문화로까지 승화시켰다.
이 시에서도 들판에 핀 들국화를 보면서 시적화자가 느낀 감흥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주인없는 들국화는 누구나 완상하면서 시로 읊을 수 있는 소중한 경물이 되는 것이다. 길가는 나그네가 말에서 내려 두어 송이 꺾어 그윽한 들국화 향기에 취하면서 새로운 시상에 잠길만 하지 않겠는가.
홍세태 (洪世泰,1653(효종 4)~1725(영조 1)
조선 후기의 시인.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도장(道長), 호는 창랑(滄浪)·유하(柳下). 무관이었던 익하(翊夏)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문장에 재능을 보였으나 중인 신분이었으므로 제약이 많았다. 경사(經史)와 시(詩)에 능통하여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이규명(李奎明) 등의 사대부들과 수창(酬唱)하며 친하게 지냈다. 또한 임준원(林俊元)·최승태(崔承太)·유찬홍(庾纘弘)· 김충렬(金忠烈)·김부현(金富賢)·최대립(崔大立) 등의 중인들과 낙사(洛社)라는 시사(詩社)를 만들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 1675년(숙종 1) 식년시에 잡과인 역과(譯科)에 응시하여 한학관(漢學官)으로 뽑히고 이문학관(吏文學官)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이문학관에 부임하게 된 것은 이로부터 16년 뒤인 1698년이었다. 1682년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갔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묵(詩墨)을 얻어 간직했다. 1698년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 좌의정 최석정(崔錫鼎)이 추천하여 시를 지어 보인 것이 임금에게 인정받아 제술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문학적 재능은 뛰어났으나 평생을 궁핍하고 불행하게 살았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광좌(李光佐)의 도움으로 말년에는 울산감목관(蔚山監牧官)·제술관· 남양감목관 등을 지내기도 했다. 1712년(숙종 38) 위항시인 48명의 시작품을 모아 〈해동유주 海東遺珠〉라는 시선집을 편찬하는 등 위항문학의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731년 사위와 문인들에 의해 시문집인 〈유하집〉 14권이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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