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야기

[스크랩] 이 순신장군의 숨겨진 이야기

含閒 2014. 7. 16. 15:01

 

 

 

   이 순신의 숨겨진 이야기

 

 

바다를 모르고 군인을 경멸하는 시대에 태어나 조국과 민족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고 뚜벅뚜벅 걸어간 李舜臣, 그의 자살설은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리라.

 

全書를 만들도록 한 뒤였다. 편찬자가 亂中日記라고 붙인 것이지

李舜臣이 그렇게 붙인 것은 아니다. 李舜臣은 그의 死後에 자신의

日記가 알려지고 국보로까지 지정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日記는 전란속에서 가슴에 쌓아둘 수 없었던 울분, 걱정, 한탄을

기록한 것이지 나중에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려고 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이 일기를 읽을 때 유념해야 할 일이다.

   

李舜臣은 일기에서 자신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세상에 알려질 일이 없으리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자와 같은 호기심 많은 사람으로서는 李舜臣의 그런 착각이

무척 다행이다. 솔직한 자기토로에 의해서 드러나는 李舜臣의

裸像(나상)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傳記작가들에 의해 신격화되고 박제품이 된 근엄하고 딱딱한

李舜臣과 달리 亂中日記속의 李舜臣은 피가 끓고 미움과 사랑이

교차하며 憂國과 분노가 뒤섞이고 비통함과 집념이 뒤엉키는 격동하고

생동하는 바로 우리와 같은 보통사람이다. 聖人도 아니고 聖雄도 아니다.

그의 傳記 10권을 읽는 것보다는 亂中日記 한 권을 읽는 것이 그에게

훨씬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다.

   

超人이 아닌 병약했던 사람: 신경성 위장병을 앓다

正祖 시대 난중일기를 처음 활자판으로 간행할 때 누락시킨 부분이

많은데 주로 조정을 비판하고 元均에 대해서 험한 이야기를 한 경우이다.

이 누락부분이야말로 李舜臣의 진면목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안팎이 모두 바치는 뇌물의 多少로 죄의 輕重을 결정한다니,

이러다가는 결말이 어찌 될지 모르겠다. 이야말로 한 줄기 돈만

있다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는 것인가>(丁酉年 5월21일)

   

원균이 온갖 계략을 다 써서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역시 운수인가.

뇌물짐이 서울로 가는 길을 연잇고 있으며, 그러면서 날이 갈수록

나를 헐뜯으니, 그저 때를 못만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丁酉年 5월8일)

   

<새벽부터 저녁까지 사무치고 슬픈 마음에 눈물은 엉기어 피가

되건마는 아득한 저 하늘은 어찌 내 사정을 살펴주지 못하는고,

왜 빨리 죽지 않는가>(丁酉年 5월6일)

   

1998년에 서울대학교 박헤일 명예교수와 최희동 원자핵공학과 교수,

배영덕-김명섭 원자력연구소 연구원이 같이 쓴 「李舜臣의 일기-

親筆草本(친필초본)에서 國譯本에 이르기까지」에는 난중일기를

분석하여 李舜臣의 행동을 엿보게 한 대목이 있다.

   

李舜臣이 자신의 일기에서 몸이 불편하다든지 병에 걸린 것을

언급한 대목이 180여 회에 이른다.

   

1597년 8월21일자 일기: 「새벽 2시쯤에 곽란이 일어났다.

차게 한 탓인가 하여 소주를 마셔 다스리려 했다가 인사불성에

빠져 거의 구하지 못할 뻔했다. 토하기를 10여 차례나 하고 밤새

도록 고통을 겪었다」

   

8월22일: 「곽란으로 인사불성, 기운이 없고 또 뒤도 보지 못하였다」

   

8월23일: 「병세가 몹시 위급하여 배에서 거처하기가 불편하고 또

실상 전쟁터도 아니므로 배에서 내려 포구 밖에서 묵었다」

   

이 기사를 본 내과전문의의 소견은 「극심한 신체적 과로와 정신적

압박에서 비롯된 일종의 신경성 위장반응이며 급성 위염의 증상군에

속하는 病狀(병상)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난중일기엔 술마신 기록이

140여회나 나온다. 그는 속앓이를 하면서도 술을 즐겨 했다. 나라가

되어 가는 모습에 대한 울분, 고향에 있는 어머니와 아내 걱정, 서로

성격이 맞지 않는 元均에 대한 경멸과 미움, 왜적에 대한 증오, 民草의

참상에 대한 동정심으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던 李舜臣은 몸을

돌보지 않고 술로써 시름을 달랬던 것 같다. 토사곽란을 소주로 치료

하려고 했을 정도이다.

   

위장병을 술로 다스리려고 한 사람

   

신경성 위장병의 원인은 과도한 걱정과 울분이었을 것이다.

李舜臣 일기엔 꿈에 대한 이야기가 수십 차례나 나온다. 그는

꿈자리가 어지러웠던 사람이다. 꿈의 내용도 주로 가족들에

대한 걱정과 나라 걱정이다.

   

<丙申 정월12일: 새벽 2시쯤, 꿈에 어떤 곳에 이르러 영의정(柳成龍)과

함께 이야기했다 잠시 함께 속 아랫도리를 끄르고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서로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을 털어 놓다가 끝내는 가슴이 막히어 그만

두었다. 이윽고 비바람이 퍼붓는데도 오히려 흩어지지 않고 조용히 이야기

하는 중에 「만일 서쪽의 적이 급히 들어오고 남쪽의 적까지 덤비게 된다면

임금이 어디로 다시 가시랴」하고 걱정만 되뇌이며 할 말을 알지 못했다>

   

꿈속에서 비바람이 퍼붓는데도 가슴이 막힐 만큼 나라 걱정을 하는

李舜臣은 元均에 대해서만은 아주 경멸스러운 용어를 쓰고 적개심마저

드러낸다. 그를 元凶(원흉)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이 난중일기의 元均

인물평으로 해서 임진왜란 뒤 3명의 일등공신 중 한 사람(다른 두 사람은

李舜臣과 권율)으로 선정되었음에도 元均은 실제보다 더 나쁘게 알려진

억울한 면도 있다. 난중일기를 읽고 있으면 李舜臣은 글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울분과 恨(한)을 가슴 속에 묻고 지낸 사람이란 느낌이 든다.

   

   기록문학

   

李舜臣의 진면목은 역시 海戰을 기록한 대목에서 잘 나타난다.

특히 전멸하다시피한 朝鮮 水軍에서 겨우 13척의 戰船(전선)을

수습하여 일본 水軍 200여 척과 대결한 명량대첩날의 기록은

悲壯(비장)하고 문학적이다.

   

<이른 아침에 別望軍(별망군)이 다가와 보고하기를 수효를 알 수

없도록 많은 적선이 鳴梁(명량)으로 들어와 곧장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으로 오고 있다고 하였다. 즉각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0여 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적은 수로 많은 敵을 대적하는 것이라 모두 회피

하기만 꾀하는데 右水使 金億秋가 탄 배는 이미 2마장(1마장은

십리나 오리 정도 거리) 밖으로 나가 있었다. 나는 노를 재촉하여

앞으로 돌진하여 地字(지자), 玄字(현자) 등 각종 銃筒(총통)을 폭풍과

우뢰같이 쏘아대고 군관들이 배 위에 총총히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가 물러났다가 하였다.

   

그러나 겹겹이 둘러싸여서 형세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어 온 배의

사람들이 서로 돌아다 보며 얼굴 빛을 잃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되 적선이 비록 많다고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치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을 동하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하여 적을 쏘고 또

쏘라 하였다. 여러 장수들의 배들을 본 즉, 먼 바다로 물러서 있는데,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고자 해도 적들이 그 틈을 타서 더 대들 것이라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호각을 불어 中軍에게 군령을

내리는 깃발을 세우게 하고 또 招搖旗(초요기)를 세웠더니 中軍將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로 가까이 왔으며 거제현령 安衛(안위)의

배가 먼저 다가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친히 安衛를 불러 말하기를, 너는 군법으로 죽고싶으냐,

네가 군법으로 죽고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니, 安衛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하였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여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피할 것이냐, 당장에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가 또한 급하니 우선 功(공)을 세우게 하리라 하였다.

   

그래서 두 배가 앞서나가자 敵將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2척에 지시하여

일시에 安衛의 배에 개미가 붙듯이 서로 먼저 올라가려 하니 安衛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죽을 힘을 다하여 혹은 모난 몽둥이로, 혹은 긴 창으로,

혹은 水磨石(수마석) 덩어리로 무수히 마구 쳐대다가 배 위의 사람들이 거의

기진맥진하므로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쫓아 들어가 빗발치듯 마구 쏘아댔다.

적선 3척이 거의 다 엎어지고 쓰러졌을 때 鹿島萬戶(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들이 뒤따라 와서 힘을 합해 적을 사살하니 몸을 움직이는

적은 하나도 없었다.

   

투항한 倭人 俊沙(준사)는 안골포(지금 진해시 안골동)의 적진으로부터

항복해 온 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바다를 굽어보더니 말하기를, 그림

무늬 놓은 붉은 비단옷을 입은 저 자가 바로 안골포 적진의 적장 마다시요

라고 했다. 내가 無上(무상:물긷는 군사) 김돌손을 시켜 갈구리로 뱃머리에

낚아 올린 즉, 俊沙가 좋아 날뛰면서 바로 마다시라고 말하므로 곧 명하여

토막토막 자르게 하니, 적의 사기가 크게 꺾였다.

   

이때 우리 배들은 적이 다시 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북을 울리며 일제히

진격하여 地字, 玄字 포를 쏘아대니 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화살을

빗발처럼 퍼부어 적선 31척을 깨뜨리자 적선은 퇴각하여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우리 수군은 싸웠던 바다에 그대로 묵고 싶었으나 물결이

몹시 험하고 바람도 역풍인 데다가 형세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당사도로

옮겨 가서 밤을 지냈다. 이번 일은 실로 天幸(천행)이었다>

(朴惠一 외 3명이 쓴 「李舜臣의 日記」에서 인용. 서울대학교 출판부)

   

   어머니와 아들의 죽음 앞에서

   

1594년 5월9일 일기: 「비, 비. 종일 빈 정자에 홀로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밀어 마음이 산란했다. 무슨 말을 하랴, 어떻게 말하랴.

어지럽고 꿈에 취한 듯, 멍청이가 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

   

   이처럼 잠못 이루는 밤속에서 읊은 시조가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一聲胡茄(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이다.
 

달빛 비친 바다를 바라보면서 수심에 잠긴 李舜臣의 모습은

亂中日記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는

걱정이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다. 亂中日記 어디를 보아도 느긋한,

유쾌한 李舜臣을 찾아보기 어렵다. 한 시대의 짐을 몽땅 혼자서 진

모습의 연속이다.

   

난중일기엔 아산에 모신 어머님에 대한 걱정이 100여회나 등장한다.

丁酉 4월13일:잠시후 종 順花(순화)가 배로부터 와서 어머님께서는

돌아가셨다고 말한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였다.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다.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어찌 적으랴.

   

丁酉 4월19일: 일찍이 길을 떠나며, 어머님 靈筵(영연)에 하직을

고하고 목놓아 울었다. 어찌 하랴, 어찌 하랴. 天地간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李舜臣은 군인을 경멸하는 文民 지배의 정치질서 속에서 제대로

뜻을 펴보지 못했다. 왜적과 싸우는 戰線사령관을 모함에 걸어

잡아들이고 고문하는 양반 지도층 인사들의 등쌀에 그는 心身이

골았다. 그런 가운데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막내아들을 잃었다.

아버지가 죽었을 땐 李舜臣이 억울한 옥중생활에서 풀려나 죄인의

신분으로 白衣從軍중이었기 때문에 문상만 하고 장례식에도 참여

하지 못한 채 戰線으로 떠나야 했다. 막내아들(면)의 戰死통지를 받을 때

심경을 李舜臣은 이렇게 적었다.

   

<1597년 10월14일: 저녁에 천안으로부터 사람이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겉봉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심기가 혼란해졌다.

겉봉을 대강 뜯고 열의 글씨를 보니 바깥 면에 통곡이란 두 자가 쓰여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목놓아 통곡,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고,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맞거니와 네가 죽고

내가 살아 있으니 이렇게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으랴.

천지가 어두워지고 캄캄하고 밝은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기로 하늘이 이 세상에 놔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죄를 지어 앙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지금 세상에 살아 있으나, 마침내 어디에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같이 힘쓰고 같이 울고싶건마는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또한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따름이다.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1년 같구나. 하룻밤 지내기가 1년 같구나. 이날 밤 10시경 비가 내렸다>

   

3일 뒤 일기에서 李舜臣은 「내일이 막내아들의 부음을 들은 지 나흘째

되는 날인데 마음껏 통곡해보지도 못했으므로 소금 만드는 사람인 강막지의

집으로 갔다」고 적고 있다.

   

   엄격한 장군

   

난중일기엔 탈영한 군인들을 잡아와서 처형하고 엉터리 보고를 한

군관에게 곤장을 치는가 하면 뇌물을 받고 戰船(전선)을 빌어준 군인들을

처벌하는 따위의 벌주는 기록에 110여회나 등장한다. 李舜臣은 결코

자애로운 장군이 아니었다. 아랫사람들의 실수를 엄격하게 다스렸다.

   

군대를 기피하려는 사람들이 많고 軍需(군수)공급은 제대로 되지 않는

劣惡(열악)한 상황에서 軍紀(군기)를 엄정하게 잡아가자니 강력한 體罰

(체벌)이 동원되었으리라.

   

 러일 전쟁 중 대마도 해협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대패시킨 일본 해군

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가 『나를 넬슨 제독에 비교하는 것은 몰라도

李舜臣에 비교하는 것은 황공한 일이다』란 취지의 말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도고의 다음 설명이다.

   

『넬슨이나 나는 국가의 전폭적인 뒷받침을 받아 결전에 임했다.

그러나 李舜臣은 그런 지원 없이 홀로 고독하게 싸운 분이다』

   

 무장이 武將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이 말이 바로 李舜臣의 실존적인 고독,

그 핵심을 이야기하고 있다. 무능한 王朝(왕조), 바다를 모르는 육지의 양반들,

엉터리 전쟁지도, 오지 않는 軍需 지원. 이런 가운데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敵을

상대해야 했던 李舜臣. 바다를 모르고 군인을 경멸하는 시대에 태어나 조국과

민족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고 뚜벅뚜벅 걸어간 李舜臣, 그의 자살설은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리라.

   

 그가 최후의 해전에서 살아 개선했다면 과연 명대로 살았을까?

李舜臣의 가장 큰 多幸(다행)은 최후 전장에서의 장렬한 죽음이었다는

느낌이다. 李舜臣의 일기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그의 행동은 활쏘기이다.

270여회.

 

인물평으로 해서 임진왜란 뒤 3명의 일등공신 중 한 사람(다른 두 사람은

李舜臣과 권율)으로 선정되었음에도 元均은 실제보다 더 나쁘게 알려진

억울한 면도 있다. 난중일기를 읽고 있으면 李舜臣은 글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울분과 恨(한)을 가슴 속에 묻고 지낸 사람이란 느낌이 든다.

   

   기록문학

   

李舜臣의 진면목은 역시 海戰을 기록한 대목에서 잘 나타난다.

특히 전멸하다시피한 朝鮮 水軍에서 겨우 13척의 戰船(전선)을

수습하여 일본 水軍 200여 척과 대결한 명량대첩날의 기록은

悲壯(비장)하고 문학적이다.

   

<이른 아침에 別望軍(별망군)이 다가와 보고하기를 수효를 알 수

없도록 많은 적선이 鳴梁(명량)으로 들어와 곧장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으로 오고 있다고 하였다. 즉각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0여 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적은 수로 많은 敵을 대적하는 것이라 모두 회피

하기만 꾀하는데 右水使 金億秋가 탄 배는 이미 2마장(1마장은

십리나 오리 정도 거리) 밖으로 나가 있었다. 나는 노를 재촉하여

앞으로 돌진하여 地字(지자), 玄字(현자) 등 각종 銃筒(총통)을 폭풍과

우뢰같이 쏘아대고 군관들이 배 위에 총총히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가 물러났다가 하였다.

   

그러나 겹겹이 둘러싸여서 형세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어 온 배의

사람들이 서로 돌아다 보며 얼굴 빛을 잃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되 적선이 비록 많다고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치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을 동하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하여 적을 쏘고 또

쏘라 하였다. 여러 장수들의 배들을 본 즉, 먼 바다로 물러서 있는데,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고자 해도 적들이 그 틈을 타서 더 대들 것이라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호각을 불어 中軍에게 군령을

내리는 깃발을 세우게 하고 또 招搖旗(초요기)를 세웠더니 中軍將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로 가까이 왔으며 거제현령 安衛(안위)의

배가 먼저 다가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친히 安衛를 불러 말하기를, 너는 군법으로 죽고싶으냐,

네가 군법으로 죽고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니, 安衛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하였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여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피할 것이냐, 당장에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가 또한 급하니 우선 功(공)을 세우게 하리라 하였다.

 

그래서 두 배가 앞서나가자 敵將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2척에 지시하여

일시에 安衛의 배에 개미가 붙듯이 서로 먼저 올라가려 하니 安衛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죽을 힘을 다하여 혹은 모난 몽둥이로, 혹은 긴 창으로,

혹은 水磨石(수마석) 덩어리로 무수히 마구 쳐대다가 배 위의 사람들이 거의

기진맥진하므로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쫓아 들어가 빗발치듯 마구 쏘아댔다.

적선 3척이 거의 다 엎어지고 쓰러졌을 때 鹿島萬戶(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들이 뒤따라 와서 힘을 합해 적을 사살하니 몸을 움직이는

적은 하나도 없었다.

   

투항한 倭人 俊沙(준사)는 안골포(지금 진해시 안골동)의 적진으로부터

항복해 온 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바다를 굽어보더니 말하기를, 그림

무늬 놓은 붉은 비단옷을 입은 저 자가 바로 안골포 적진의 적장 마다시요

라고 했다. 내가 無上(무상:물긷는 군사) 김돌손을 시켜 갈구리로 뱃머리에

낚아 올린 즉, 俊沙가 좋아 날뛰면서 바로 마다시라고 말하므로 곧 명하여

토막토막 자르게 하니, 적의 사기가 크게 꺾였다.

   

이때 우리 배들은 적이 다시 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북을 울리며 일제히

진격하여 地字, 玄字 포를 쏘아대니 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화살을

빗발처럼 퍼부어 적선 31척을 깨뜨리자 적선은 퇴각하여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우리 수군은 싸웠던 바다에 그대로 묵고 싶었으나 물결이

몹시 험하고 바람도 역풍인 데다가 형세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당사도로

옮겨 가서 밤을 지냈다. 이번 일은 실로 天幸(천행)이었다>

 

(朴惠一 외 3명이 쓴 「李舜臣의 日記」에서 인용. 서울대학교 출판부)

   

어머니와 아들의 죽음 앞에서

1594년 5월9일 일기: 「비, 비. 종일 빈 정자에 홀로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밀어 마음이 산란했다. 무슨 말을 하랴, 어떻게 말하랴.

어지럽고 꿈에 취한 듯, 멍청이가 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

   

이처럼 잠못 이루는 밤속에서 읊은 시조가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一聲胡茄(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이다.

   

달빛 비친 바다를 바라보면서 수심에 잠긴 李舜臣의 모습은

亂中日記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는

걱정이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다. 亂中日記 어디를 보아도 느긋한,

유쾌한 李舜臣을 찾아보기 어렵다. 한 시대의 짐을 몽땅 혼자서 진

모습의 연속이다.

   

난중일기엔 아산에 모신 어머님에 대한 걱정이 100여회나 등장한다.

丁酉 4월13일:잠시후 종 順花(순화)가 배로부터 와서 어머님께서는

돌아가셨다고 말한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였다.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다.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어찌 적으랴.

   

丁酉 4월19일: 일찍이 길을 떠나며, 어머님 靈筵(영연)에 하직을

고하고 목놓아 울었다. 어찌 하랴, 어찌 하랴. 天地간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李舜臣은 군인을 경멸하는 文民 지배의 정치질서 속에서 제대로

뜻을 펴보지 못했다. 왜적과 싸우는 戰線사령관을 모함에 걸어

잡아들이고 고문하는 양반 지도층 인사들의 등쌀에 그는 心身이

골았다. 그런 가운데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막내아들을 잃었다.

 

아버지가 죽었을 땐 李舜臣이 억울한 옥중생활에서 풀려나 죄인의

신분으로 白衣從軍중이었기 때문에 문상만 하고 장례식에도 참여

하지 못한 채 戰線으로 떠나야 했다. 막내아들(면)의 戰死통지를 받을 때

심경을 李舜臣은 이렇게 적었다.

   

<1597년 10월14일: 저녁에 천안으로부터 사람이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겉봉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심기가 혼란해졌다.

겉봉을 대강 뜯고 열의 글씨를 보니 바깥 면에 통곡이란 두 자가 쓰여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목놓아 통곡,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고,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맞거니와 네가 죽고

내가 살아 있으니 이렇게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으랴.

천지가 어두워지고 캄캄하고 밝은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기로 하늘이 이 세상에 놔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죄를 지어 앙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지금 세상에 살아 있으나, 마침내 어디에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같이 힘쓰고 같이 울고싶건마는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또한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따름이다.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1년 같구나. 하룻밤 지내기가 1년 같구나. 이날 밤 10시경 비가 내렸다>

   

3일 뒤 일기에서 李舜臣은 「내일이 막내아들의 부음을 들은 지 나흘째

되는 날인데 마음껏 통곡해보지도 못했으므로 소금 만드는 사람인 강막지의

집으로 갔다」고 적고 있다.

   

   엄격한 장군

   

난중일기엔 탈영한 군인들을 잡아와서 처형하고 엉터리 보고를 한

군관에게 곤장을 치는가 하면 뇌물을 받고 戰船(전선)을 빌어준 군인들을

처벌하는 따위의 벌주는 기록에 110여회나 등장한다. 李舜臣은 결코

자애로운 장군이 아니었다. 아랫사람들의 실수를 엄격하게 다스렸다.

   

군대를 기피하려는 사람들이 많고 軍需(군수)공급은 제대로 되지 않는

劣惡(열악)한 상황에서 軍紀(군기)를 엄정하게 잡아가자니 강력한 體罰

(체벌)이 동원되었으리라.

   

러일 전쟁 중 대마도 해협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대패시킨 일본 해군

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가 『나를 넬슨 제독에 비교하는 것은 몰라도

李舜臣에 비교하는 것은 황공한 일이다』란 취지의 말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도고의 다음 설명이다.

 

『넬슨이나 나는 국가의 전폭적인 뒷받침을 받아 결전에 임했다.

그러나 李舜臣은 그런 지원 없이 홀로 고독하게 싸운 분이다』

 무장이 武將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이 말이 바로 李舜臣의 실존적인 고독,

 

그 핵심을 이야기하고 있다. 무능한 王朝(왕조), 바다를 모르는 육지의 양반들,

엉터리 전쟁지도, 오지 않는 軍需 지원. 이런 가운데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敵을

상대해야 했던 李舜臣. 바다를 모르고 군인을 경멸하는 시대에 태어나 조국과

민족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고 뚜벅뚜벅 걸어간 李舜臣, 그의 자살설은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리라.

   

 그가 최후의 해전에서 살아 개선했다면 과연 명대로 살았을까?

李舜臣의 가장 큰 多幸(다행)은 최후 전장에서의 장렬한 죽음이었다는

느낌이다. 李舜臣의 일기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그의 행동은 활쏘기이다.

기록에는 270여회나온다.

모셔온글

 
뮤지컬-한산섬 달 밝은밤에

 

 
출처 : 演好마을
글쓴이 : 설봉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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