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박수량(朴守良) 이야기
(1491-1554년)
전남 장성읍에 소재한 홍길동 생가의 바로 옆에 청백당(淸白堂)이
위치하고 있다.
그 곳이 바로 청백리의 표상처럼 알려져 있는 아곡(莪谷) 박수량 선생을 기리기 위해 명종이 하사한 집터를 복원한 것인데 원래는 현재의 홍길동 생가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청백리
(淸白吏)’
로
선정된 사람은 총 217명이다.
청백리(淸白吏)는
나중에 죽어서 붙여진 이름이고 살았을 때는 염근리(廉謹吏)라
하여 다른 사람의 표상으로 기리고 있는데 감사원은 황희,
맹사성,
박수량을 대표적 청백리로
선정하였다.
청백당(淸白堂)
건물
그는
39년동안
공직에 종사하면서 오직 공직자 사명에만 충실하고 명예와 재물에는 아무런 욕심을 두지 않고 살다가 간 인물이다.
명종은
박수량 선생이 청백하였다는 말을 듣고 암행어사를 보내 그의 생활을 알아보니 생계를 겨우 연명할 뿐 집은 낡아서 비가 샐 정도였다고
한다.
아곡(莪谷) 박수량((朴守良)은
1491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에
이곳 전남의 장성읍에서 태어났고 본관은 태인이다.
1514년
23세
때에 소과에 급제하고 다음 해에 24세로
별시문과에서
대과에 급제하여 광주향교 훈도를 지내었다.
다음해
에는 부정자(副正字)·전적·예조좌랑·충청도도사를
지내고,
1522년
사헌부지평(持平)이
되었다.
1525년
고부군수,
1531년
보성군수,
사예·군기시정
등에 임명되었다.
1534년에
함경도 경차관(敬差官)이
되어서 지방관아를 순시하였다.
다시
나주목사로 임명하자 삼공(三公)이
박수량은 대간이나 시종이 될만한 인재이므로 외직이 아닌 내직에 임명할 것을 청하였다.
1536년에는
통정대부에 봉해지고,
1537년
동부승지로 특진하고 전위사(餞慰使)가
되어서 명나라 사신을 전송하였다.
호조참판·공조참판에
이어 1539년
오위도총부부총관·예조참판을
지내고,
명종
1년인
1546년
춘추관동지사(同知事)로서
《중종실록》,《인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형조판서·우참찬을
지내고,
이듬해에
좌참찬에 올랐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로 전직하여 노모를 봉양하였다.
1552년
우참찬에 재임명되었으며,
이듬해
한성부판윤·중추부지사에
이르렀다.
이곳 사람인 하서 김인후가 쓴 묘지명에는 “언제나
두 아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초야로부터 외람되게 정이품(판서)의
벼슬까지 이르렀는데,
분수에
넘는 영광이다.
내가
죽으면 절대로 시호(諡號)를
청하거나 비석을 세우지 말라’
고
하였다”
하는
구절이 있다.
그리고
부친이 병환으로 몸져 눕자,
벼슬을
버리고 시중하면서 효성을 다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한양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변변한 집 한 채도 갖지 못하고 청빈하게 살았으며 명종 9년인
1554년
명종 63세에
죽기 직전에 후손들에게 유언을 남겨 "고향에 장사를 지내되, 묘는너무 크게도 하지말고 비석도 세우지말라"
후손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명종은
선생의 부음을 듣고 크게 슬퍼하시어서 사람을 보내 조의를 표하고,
고향으로
운송할 장례비조차 없어서 고향에 가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 비용을 마련해 주고서 예장할 것을 명하였다.
그가
죽을 때 남긴 유산으로서는 은 10여냥과 낡은옷 몇벌, 낡은 궤짝, 비단과 베 각 한필
뿐이었다고 기록에 남어있다.
그는
죽어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산 33번지에
묻혔는데 그의 묘소 비는 다른 산소와 달리 아무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은데 그 이유는 그가 죽자 당시 임금 명종이 그를
청백리(淸白吏)로
선정한 후,
서해바다
암석을 골라서 백비를 내리면서 “그의
청렴한 생활상을 알면서 빗돌에다 그의 청빈상을 쓴다는 것은 오히려 그의 청렴을 잘못 아는 결과가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글자없이
세우라”
고
백비(白碑)를
세웠다.
그리고
하남골(현재
장성군 황룡면 아치골)에
99칸짜리
집인 청백당을
후손들에게 내려서 그를 기렸으나 아깝게도 이 집은 정유재란 당시 소실되었다가 최근에 2010년에
장성군에서 이를 기려 다시 세웠다.
잘
알려져 있듯이 백비(白碑)는
중국의 ‘무측천(武側天)’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일반적으로
공이 너무 커서 다 쓸 수 없을 정도임을 나타내기 위해 상징적으로 아무 글자도 새기지 않는 것임을 미루어 볼 때 당시에
세인에게 알려진 그의 청빈함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그의 백비의 옆에는 이러한 뜻과는 달리 그의 생전의 벼슬과 행적을 기린 묘비가 세워져 있어 이를 어찌 해석하여야 할까
궁금해진다.
그리고
박수량의 시호는 정헤(貞惠)인데
청백수절(淸白守節,
청백으로
절개를 지킨 다는 의미)에서
‘精’을
애민호여(愛民好與,
백성을
아끼며 즐거움을 같이 한다)에서
‘蕙’
를
따서 지었는데,
1786년인
정조 10년에
박수량의 후손들이 시호를 내려 줄 것을 거듭 건의하였으나 정조는 선조의 뜻이 그렇지 않다면서 무엄하다는 타박까지 받기도 하였다가 순조
5년인
1805년에야
‘정혜(貞惠)’란
시호가 내렸다 한다. 過恭은 非禮라 하였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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