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야기

[스크랩] 두 세한도(歲寒圖)

含閒 2014. 7. 22. 12:23

 

 

 

歲寒圖

 

 
국보 180호 추사의 세한도  개인소장

 

세한도는 조선 말기 1844년 완당 김정희(金正喜)가 제주도 유배온지 5년이 되었을 때 완당 생애 최고의 명작으로 곱히는 "세한도"를 그려 그의 제자인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에게 그려 준 사의체(寫意體)의 문인화입니다. 화면 오른쪽에 '세한도'라는 화제와 우선 이상적이 완상하라는 '우선시상(藕船是賞)'과 '완당'이란 관지(款識)가 적혀있고, '정희(正喜)'와 '완당'이라는 도인(陶印)이 찍혀 있습니다.

완당 김정희가 1840년 윤상도(尹尙道) 사건에 연루되어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하고 제주도에서 8년 동안 귀양살이을 한 적 있었습니다. 벼슬이 높은 시절에는 그를 따르는 사람도 많았지만,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자 대개는 등을 돌렸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유배객을 가까이하게 되면, 자신도 불리한 처지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어려운 여건에서도 제자 이상적은 스승이 귀양살이하는 동안에 정성을 다해 중국 연경에서 어렵게 구한 책을 멀리 절해고도에 계시는 완당에게 보내곤 하였습니다. 이에 완당이 제자의 그 따뜻한 마음과 변함 없는 의리가 너무나 고마워 어느 날 이 제자를 위해 그림을 한 점 그렸습니다. 세한도입니다.

완당은 소나무와 잣나무을 그린 까닭도 글로 써서 그림에 이어 붙였습니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둘 다 늘 푸른 나무입니다. 날이 좋고 따뜻할 때는 늘 푸른 나무가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모든 나무들이 푸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추운 겨울 세한이 되어 나무들의 잎이 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을 때면 비로소 소나무나 잣나무가 얼마나 의연한지 알 수 있습니다. 김정희는 소나무의 의연함을 빌어 제자의 한결같은 마음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잣나무를 통해, 어려움 속에도 희망이 가까이 있음을 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제자 이상적은 중국에 갈 때 이 그림을 가져갔습니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이 그림에 깃든 사연을 읽고 모두 감동하였습니다. 다투어 그림 끝에 시를 써서 붙이니, 그림은 한없이 길어졌습니다. 10 m가 넘는 두루마리가 이렇게 완성되었습니다. 세한도의 그림 부분은 간단하지만, 그림에 깃든 마음은 한없이 깊고 넓고 포근합니다. 조선 말기를 풍미하였던 김정희의, 조선시대 문인화의 가장 대표적인 이 세한도는 북풍한설 추위 속에 따스한 제자의 체온을 받고 그렇게 태어났던 것입니다.

 

權敦仁의 歲寒圖

 
又髥의 歲寒圖 국립박물관소장

 

權敦仁(자 경희(景羲), 호 이재(彝齋)·우염(又髥)·과지초당노인(瓜地草堂老人))은 추사보다 세 살 위이나 아주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서첩을 합벽(合璧)하거나 서로 그림을 주고받는 등 돈독한 우정을 자랑했습니다. 추사는 그에게 〈묵란〉을 그려주기도 했고 특히 〈모질(耄耋)〉은 추사가 귀양가면서 권돈인에게 축수로 그려준 그림입니다. 이 〈세한도〉는 그 답례로 권돈인이 추사에게 준 것으로 벗에 대한 따사로운 정이 담겨 있습니다. 때로는 글씨도 두 사람의 구별이 힘들 정도로 유사해 넓은 의미로 추사파에 속한고합니다. 송시열의 애제자인 권상하의 5대손으로 관직은 우의정에까지 올랐습니다.

이 〈세한도〉는 두루마리로 되어 있는데, 먼저 추사가 '세한도'라 제목을 썼고, 그림에 이어 두
발문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두〈세한도〉를 비교해 살펴보면, 추사는 마른 붓인데 비해 이재는 물기 많은 먹이며, 소재 역시 추사는 소나무와 잣나무인데 비해 권돈인은 소나무·대나무·매화를 그린 삼청입니다. 사방 벽이 없는 모옥은 바위·뒤뜰의 대나무·두 그루의 소나무·매화 등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습니다. 조촐하고 담담한 문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선비 그림이라고 할수있습니다. 추사는 권돈인의 〈세한도〉가 형사(形似)에서 벗어난 높은 경지이며, 시뿐만 아니라 그림 또한 뛰어나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생강  - 한 오백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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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演好마을
글쓴이 : 설봉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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