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야기

[스크랩] 澗松 全螢弼 이야기

含閒 2014. 4. 23. 17:05

 

 

 

澗松 全螢弼 이야기


 

"나는 열심히 모아 지키고. 훗날 좋은 시절이 오면 너희들이 세상에 알려라.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을, 조선백자의 단아함을, 신라와 고려 석탑의 당당함을,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결코 초라하지 않음을, 내가 알리지 못하면 너희들이 알려라. 내가 왜 조선의 역사와 문화의 흔적을 미친 듯이 모았는지 너희들의 세상에서라도 알려다오"(이충렬 지음, <간송 전형필>)

'민족문화유산의 수호신', '한국미의 품격과 기준을 만든 선각자', '조선의 국보와 혼을 지킨 수문장' 등 최고의 찬사를 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은 부모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대 자산가였지만, 재산의 전부를 팔아 일제강점기 절망의 시대에 우리 민족의 혼과 얼이 담긴 수많은 문화재를 지키고 보존하는 일에 앞장선 한국 근대문화계의 진정한 애국자이다.

 

 

 

그의 애장품을 보관하기 위해 건립한 간송미술관은 일제강점기인 1938년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개인박물관이다. 비록 일제의 방해로 개관하지 못하고 해방 후에야 문을 열었지만, 지금은 매년 5월과 10월에 열리는 특별기획전시회 때마다 한국 대표 고미술품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감상하려는 관람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대표적인 문화명소로 손꼽힌다.
 

전형필은 서울 출신으로 1906년 종로 4가 112번지 99칸의 대 저택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정선이며, 호는 간송인데 간송이란 깊은 산 속에서 흐르는 물이라는 '간'과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 '송'으로 22살 때 스승인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으로부터 받았다.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 출신으로 1929년 부친이 별세하자 1930년 서울로 돌아와 사업을 이어받았다. 당시 유산으로 받은 재산은 논 800만평(4만 마지기)으로 지금 돈으로 하면 6천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약관 24살, 요즘 말로 입에 금수저를 물고 세상에 태어난 재벌가의 자식인 셈이다. 하지만 일본인들의 손으로 넘어가는 우리 서화와 전적들을 지키는 선비가 되겠다던 어릴적 자신과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고 일평생 수많은 재산과 젊음을 바쳐 일본으로 유출되는 서화, 도자기, 불상, 석조물, 서적들을 수집해서 이 땅에 남겼다. 이미 일본으로 건너간 문화재 중에서도 꼭 찾아와야 할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서면 망설임 없이 그 값을 따지지 않고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평생 모은 수집품은 광복 후 그 가치를 인정받아 12점이 국보로, 10점이 보물로, 4점이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수집품 중에는 겸재 정선과 혜원 신윤복, 단원 김홍도의 그림, 고려청자, 훈민정음 해례본 등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우수한 작품이 총망라되어 있다. 많은 이가 간송을 '민족문화유산의 수호신'이라 부르고, 그의 수집품을 거론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미술사 연구 논문을 쓸 수 없다고 하는 데엔 이런 이유가 있다.
 


 

전 국립광주박물관장이었던 이원복은 간송에 대해 "남다른 미감과 각별한 심미안의 소유자였던 간송은 당시 고서화 최고의 감식안이었던 위창 오세창 등의 도움에 힘입어 철저한 고증을 거쳐 우리 문화재를 모았다. 단순한 개인의 취향이나 즉흥적인 수집과는 시작부터 다르다. 값의 고하를 따지지 않고 명품 위주로 수집했기 때문에 많은 국보급 문화재를 모을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성북동 성북초등학교 옆 산자락에 아늑하게 자리한 간송미술관은 설립 당시 스승인 오세창이 '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집'이라는 뜻에서 '보화각(葆華閣)'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일반인들에게 개방하지 못했다. 해방이 되어서도 고적보존위원으로 임명되어 전국에 흩어져 있는 문화재를 정리, 보존하는 일에 참여하느라 개관하는 일은 훗날로 미뤘다. 한국전쟁 때에는 보관하고 있던 문화재를 북한군에 빼앗길 위기를 맞았지만 천우신조로 극복하였다. 다만 불행하게도 미처 피난 보내지 못한 소장품들을 대부분 도난당해 개관은 또다시 미뤄졌다. 1953년 휴전 후 미술사학자들과 함께 남은 소장품들을 정리하며 보다 규모 있는 박물관을 구상하던 중 갑작스럽게 닥쳐온 병마로 고통스러운 투병생활을 하다가 그해 안타깝게 별세했다. 후손들은 수집품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연구하기 위해 1966년 봄,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미술관 내에 설립하여 수집품의 본격적인 정리와 연구를 진행했고, 1971년 가을에 정식 개관하면서 지금까지 매년 2회(5월과 10월) 소장품 전시회를 열고있다.
 

 
가곡- 내마음
 

 
출처 : 演好마을
글쓴이 : 설봉헌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