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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山 丁若鏞의 末年
다산이 한창 왕성하게 식견과 포부를 펼쳐나가야 할 40세는 요즘의 50세 중반 정도에 해당되므로 남성갱년기였습니다. 갱년기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성호르몬의 감퇴로 여러가지 증상들이 나타나는 시기로서 초로기에 해당됩니다. 남성갱년기는 보통 55세경에서 65세 사이인데, 50세 혹은 그 이전에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정조대왕의 총애를 받은 엘리트 관료였던 다산은 정조가 사망하자 대역죄로 몰려 40세부터 18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하게
됩니다. 다산은
온 집안이 풍비박산을 당하고 심신이 쇠약해진 상태로 외딴 곳에서 혼자 귀양살이를 하였으니 요즘의 ‘기러기 아빠’보다 훨씬 더 어려운 형편이었죠. 그러니 건강에 큰 이상이 생길 수 있었고, 갱년기장애가 나타나기 쉬운 상황이었습니다. 갱년기장애가 생기면 우울증, 위장장애, 전립선염, 전립선비대증, 성기능장애 등이 생기기 쉽고, 노화가 촉진됩니다.
남성에 갱년기가 오는 원인은 뭘까요? 40대 중반 무렵부터 고환의 기능이 위축되면서 정자 수와 남성호르몬의 분비가 감소되고, 전립선 조직이 위축되며 부신이나 갑상선 등의 내분비기관이
쇠퇴해져 면역계통이 약화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뇌세포의 위축과 뇌세포 수의 감소로 인해 인체내 평형상태가 깨어지면서 신경계통과 정신활동이 저하되는 탓이죠. 특히 생활환경의 변화나 과도한 근심, 걱정, 긴장 등에 의해 촉진되므로 명예퇴직, 조기 실직 등을 겪는 경우에 나타나기 쉽습니다.
한의학 문헌에도 40세가 넘으면 음기가 반으로 줄고 50세가 넘으면 양기가 날로 쇠퇴해져서 건망증이 생기고 나태해지며 시력과 청력이 떨어지고 화를 잘 내며 식욕이 없고 불면증이 생긴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러한 갱년기장애 증상이 확실히 나타날
경우에는 노화도 빨라집니다. 주된 원인은 신장의 음기와 양기가 부족해진 것이며, 선천적으로 체질이 허약하거나 음식 섭취의 장애로 비위장이 손상되거나 과로하여 기가 소모되거나 신경을 많이 쓰고 짜증과 화를 내는 것 등이 신장과 심장, 비위장의 허약을 일으킨 것이죠. 다산이 남성갱년기를 극복하고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뭘까요?
첫째, 충분한 운동을 꾸준히 하다
다산이 귀양지를 옮겨 오래 머물렀던
다산초당은 남해바다가 한 폭의 수채화처럼 보이는 만덕산(전라남도 강진군) 자락에 있었죠. 초당에서 백련사에
이르는 산길은 그림 같은 바다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몸은 산에 두고 마음과 눈은 바다에 두고 걸을 정도라고 합니다. 야생 차나무와 접목들이 우거져서 건강낙원이나 다름없는 바로 그 길을 다산이 매일 걸었던 것이죠. 이처럼 남성갱년기를 극복하고 성인병을 예방하려면 허리와 하체의 근력을 강화시키는 운동을 꾸준히 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날마다 허리 체조를 하고 매일 40분 이상 약간 빠른 속도로 걷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땀이 약간 날 정도로 해야 효과가 있지요. 특히 체중이 많은 분들은 더 열심히 운동해서 땀을
많이 흘리고 배가 나오지 않도록 관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면역력도 증가되지요.
다산 정약용이 귀양 내려와 지내던 터에 새로 마련된 다산초당.
둘째, 육식을 비롯한 영양 보충을 충분히 하다
중년 이후에도 남성호르몬을 적절히 유지하고 성생활을 원활하게 지속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육식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중년기 이후에 성기능이 떨어지는 원인 가운데는 동물성 음식 섭취가 너무 부족한 탓도 있기 때문이죠. 정액과 정자를 만들어내는 원료가 단백질이고 콜레스테롤은 남성호르몬의 원료인데, 동물성 식품에는 이들이
풍부하기 때문이죠.
또한 채식으로 얻을 수 있는
영양에는 한계가 있고, 채식만 하면 기력이 약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육체노동이나 정신노동이 많거나 기력이 쇠약해진 경우에는 육식을 해야 활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다산은 넉넉지 못한 형편에 먼 타향으로 귀양을 갔는데 어떻게 육식을 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강진 인근에 살고 있던 다산 부친의 친구가 인근에서 가장 부호였고, 훗날 사돈이 되는 그의 아들은 다산의 죽마고우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외가인 해남 윤씨들의 경제적인 도움이 있었고, 게다가 당대 최고의 학자가 시골에 오니 인근에서 자손들의 공부를 가르쳐달라는
부탁이 줄을 잇게 됩니다. 그래서 여유 있는 생활과 함께 많은 저술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죠.
다산에서의 여유롭던 시절의 모습
“내가 다산에 우거한 지 이제 4년이 되는데 언제나 꽃이 피면 산보를 나갔다. 산의 오른쪽 고개를 하나 넘고 시내를 건너가 석문(石門)에서 바람을 쐬며, 용혈(龍穴)에서 쉬고 청라곡(靑蘿谷)에서 물을 마시고 농산(農山)에 있는 농막에서 잠을 잔 뒤에, 말을 타고 다산으로 돌아오던 것이 늘상 하던 일이다. 윤서유와 그의 사촌아우가 술과 물고기를 가지고 와서 때로는 석문에서 기다리고, 때로는 용혈에서 기다리거나 때로는 청라곡에서 기다렸다. 취하도록
마시고 배불리 먹은 뒤에는 그들과 함께
농막에서 낮잠을 자는 것도 늘상 하는 일이었다.” <조석루기(朝夕樓記)>
인근에서 가장 부호였던 사돈네 집의 ‘조석루’라는 정자의 기(記)로 지은 글에 그 당시 즐기던 생활을 자세히 기록해 두었던 것이죠. 친구이자 나중에 사돈이 되는 윤서유 집안에서 자기를 대접하던 모습이었으니, 이만하면 죄인의 유배 생활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였죠. 이만하면 유배를 갈 만하지 않을까요?
그러니 다산처럼 18년이나 길게 하지만 않는다면 귀양살이가 건강장수에 도움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귀양을 다녀온 사람들
중에 장수한 사람이 많습니다. 우암 송시열은 늙어서 7년 정도나 귀양살이를 했지만 83세까지 살다가 사약을 마시고서야 죽었고, 고산 윤선도는 14년 넘게 귀양을 다녔지만 85세까지 장수했으며, 추사 김정희도 9년이나 귀양을 다녀왔으나 71세까지 장수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잡한 관직생활과 극심한 당쟁으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심신을 편안케 할 수 있는 기회였고, 맑은 공기와 소박한 음식에다 매일같이 산책을 하며 유유자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귀양을 다녀오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혹은 장기간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휴양을
하였던 경우에도 장수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셋째, 적당한 성생활을 하다
괴롭고 외로운 귀양살이를 오래 하는 다산에게 큰 도움이 된 것이 또 있습니다. 바로 표서방의 딸입니다. 표서방은 음식 솜씨 좋은 딸이 만든 음식을 다산에게 매일 날라다 주었는데, 표씨 여인의 음식으로 다산이 입맛과 기력을 되찾은 낌새를 눈치 챈 주모는 아예 다산의 밥상까지 그녀에게 들려 방안으로 들여보냈죠. 그녀가 끼니마다
정성껏 마련해 주는 음식은 보약이 되어 다산의 건강을 회복시켰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서 표씨 여인은 다산의
잔심부름까지 맡게 되고 귀양살이하는 다산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표씨 여인은 스물 두 살의 청상과부로서 15세 때 가난하고 나이 많은 남자에게 시집갔다가 자식도 낳지 못한 채 남편이 돌림병으로 죽자 친정에 돌아와 있었는데, 워낙 가난한 친정 형편 때문에 고을 부자 양반댁의 찬모로 들어가 전라도 음식을 하나하나 익혔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표씨 여인은 다산의 첩실이 되었고, 다산과 그녀 사이에 딸이 하나 생겼다고 합니다. 남성갱년기를 극복하는 데는 잘 먹고 심신의 안정을 취하는 것과 더불어 적당한 간격의 성생활이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생활이 부족하게 되면 성 호르몬의 생성도 부족하게 되어 성기능이 더욱 떨어지면서 갱년기장애 증상이 더 심해지게 되기 때문이죠. 또 성 호르몬의 역할이 성기능 뿐만 아니라 뇌기능, 골 대사, 근육과 지방 분포, 심장혈관계 등 우리 몸의 곳곳에 영향을 나타내므로 적당한 간격의 성생활을 가져 성 호르몬이 분비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산이 그린 특별한 매조도
‘의증종혜포옹매조도(擬贈種蕙圃翁梅鳥圖)’는 2009년 6월에 처음 공개됐습니다.
다산이 52세 때 다산초당에서 매화를 그린 소품이지만 정갈하면서도 내력이 깊은 작품으로서 7언 절구의 시가 곁들여져 있습니다.
묵은 가지 다 썩어서 그루터기 되려더니 푸른 가지 뻗어 나와 꽃을 다 피웠구려 어디선가 날아온 채색 깃의 작은 새는 한 마리만 응당 남아 하늘가를 떠도네
고매(古梅)의 묵은 가지가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봄을 맞아 푸른 가지를 쭉 뻗더니만 내친 김에 기대하지도 않은 꽃을 마저 피웠다. 그 꽃을 보고 날아든 채령작 한 마리가 쓸쓸히 하늘가에 떨어져 머물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 그림과 글은 강진 유배 시절 다산이 소실에게서 얻은 딸에게 보내는 애틋한 심정을 담은 것이라고
합니다. 마르고 썩은 가지에 새싹이 돋아 꽃을 피웠다는 것은 자신이 뜻하지 않게 이 곳에서 새 인연을 맺게 된 사정을 암시하며, 어디선가 날아든 채색 깃털의 작은 새는 그 사이에서 얻은 딸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는 것이죠. 고미술품 전문가에 의하면 “매조도의 가치도 의미 있지만 다산의 행서는 명필의 반열에 들어도 손색없을 만큼 빼어난 예술성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행복했던 다산의 귀향기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다산 정약용의 생가.
다산은 57세(1818년) 봄에 <목민심서> 집필을 마치고, 8월에 유배에서 석방되어 강진을 떠나 고향인 남양주의 마재 본가에 돌아왔습니다. 60대 중반을 넘은 이후 다산은 정말로 아름답고 즐거운 노년을 보냈다고 합니다. 젊은 시절에 찾았던 고향 마을 근처의 명승지를 다시 찾아 옛날을 회고하며 아름다운 시와 글을 지었습니다. 용문산에도 오르고 용문사에 들러 글을 지었고, 강원도의 명승지도 찾아 나서 소양강의 흐르는 물에 뱃놀이도 하고 정자에 올라 회포를 풀기도 했습니다. 젊은 시절에
형제들과 함께 노닐었던 천진암에서 당대의 학자들과 함께 글을 짓기도 했습니다. 외롭고 쓸쓸했던 유배 시절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노년기의 다산에게는 많은 친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다산은 75세 때 회혼일에 자손과 친척들이 모인 상태에서 세상을 하직하였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건강하게 장수한 다산의 삶은 감동 그 자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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