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과 死

'포철신화 철강왕' 박태준 前총리 별세(종합)

含閒 2011. 12. 13. 18:31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편히 잠드소서

 

'포철신화 철강왕' 박태준 前총리 별세(종합)
연합뉴스|
고형규|
입력 2011.12.13 18:00
|수정 2011.12.13 18:21
영욕의 84년..'철의 사나이' '군부정치인' 이미지 겹쳐

한국 철강산업 반석 위에..포스코의 '시작과 끝'

(서울=연합뉴스) 고형규 조민정 기자 =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13일 오후 5시께 지병인 폐질환 악화로 별세했다. 향년 84세.

고인이 입원, 치료를 받던 연세대 세브란스병원과 포스코 측은 이날 그의 타계를 공식 확인했다.

유족 측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특1호실에 임시빈소를 마련한 뒤 장례절차에 대해 논의할 계획이다. 다만 고인은 총리를 지냈기 때문에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앞서 고인은 지난달 9일 호흡 곤란으로 흉막-전폐절제술을 받기 위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고인은 수술 후 회복될 것이라는 주변의 기대에도 이달 5일 급성 폐손상을 겪으며 중환자실로 옮겨져 치료받았지만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다.

이번 수술은 10년 전에 흉막 섬유종으로 미국 코넬대병원에서 종양 제거수술을 받은 후유증 때문에 시행한 것이었다고 병원 측은 설명했다.

고인은 1927년 경남 양산 출신으로 '포철 신화'를 이뤄낸 '철강왕'인 동시에 5.16 군사쿠데타 세력으로 분류되는 군부 정치인이라는 이중적 이미지로 대중에 각인돼 있다.

일본 와세다대(중퇴)와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6기)를 거친 뒤 1961년 쿠데타 이후에는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으로 발탁된다. 그러면서 '개발독재'와 '산업화'의 양면을 그리는 대한민국의 성장 드라이브를 주도하게 된다.

결정적으로 대한중석 사장을 지내던 중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1968년 포항제철 사장으로 지명돼 새로운 운명을 맞는다.

일본 철강업계의 선진기술 도움과 대일 청구권 자금에 기대어 포철의 일관제철소 사업을 이끌면서 한국 철강산업을 반석 위에 올려놓게 되는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고인은 '철강왕'으로 한국 철강산업의 산증인으로 자리매김한다.

전두환 신군부가 등장하는 1980년대 이후에는 민정당(11대.81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정계에 진출한다.

13, 14, 15대 국회를 거쳐 1990년 민정당 대표최고위원으로 3당 합당에 의한 민자당 창당을 맞는다.

그러다가 김영삼정부 출범후 당시 김 전대통령과 갈등을 겪으며 92년 10월 민자당을 탈당하고 이듬해 포철 명예회장직을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까지 되고는 4년간의 일본 망명생활을 지내고 1997년 국회의원으로 컴백한다.

이어 고인은 자민련 총재로 영입된 뒤 김대중-김종필(DJP) 연합을 통해 탄생한 김대중정부 시절(2000년) 공동정부의 자민련 몫으로 총리까지 지냈으나 부동산 투기 문제가 불거지면서 단명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장옥자(80) 여사와 1남4녀가 있다.

한국 철강사 쓴 '철의 사나이' 눈감다
 
아시아경제|
조슬기나|
입력 2011.12.13 17:32
|수정 2011.12.13 17:48
 
[아시아경제 조슬기나 기자]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에게 철은 곧 국가였다. '철의 사나이'라는 수식어는 국내 제일의 철강사 포스코(구 포항제철)의 첫번째 수장으로 오늘날 한국 철강업을 일군 박 명예회장이었기에 붙은 별칭이다.

미국의 철강왕 카네기는 당대 35년 동안 연간 조강생산 800만t을 이뤘지만 박 명예회장은 25년간의 사장 및 회장 재임기간 중 2100만t을 달성했다. 그가 첫 삽을 뜬 포스코는 오늘날 세계 5위, 연간 조강생산량 3540만t에 달하는 굴지의 철강사로 성장했다.

박 명예회장은 1968년 포항종합제철의 사장을 맡은 후 1992년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민영화를 거치며 포항제철이 포스코로 바뀌고 새로운 전문 경영인들이 등장했지만, 포스코에 대한 그의 애정은 늘 변함이 없었다.

올초 포스코 청암재단 시상식을 찾은 박 명예회장은 포스코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뒤에 있는 정준양 회장의 어깨를 두드리며 "정 회장이 잘하고 있다"며 믿음을 드러냈다. 9월에는 과거 포항에서 자신과 함께 근무했던 퇴직직원들과 19년만에 재회하는 자리를 마련해 "청춘을 바친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며 우리의 추억이 포스코의 역사와 조국의 현대사 속에 묻어 있음을 잊지 말자"고 언급키도 했다.

박 명예회장이 포항제철소 건설을 진두지휘하기 전, 국내 철강산업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한국 정부가 철강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최초의 종합제철 건설 계획을 세운 것은 1958년 자유당 정부 시절이었으나 연간 선철 20만t 생산을 목표로 했던 이 계획은 자금 부족, 정국 혼란 등으로 무산되고 말았으며 결국 다섯 차례에 걸친 제철소 건설 시도는 모두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종합제철 건설 계획이 보다 구체화된 것은 1961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부터다. 정부는 철강산업이 다른 산업에 기초 소재를 제공하는 산업으로 빈곤에서 탈피하고 자립경제를 달성하기 위해 제일 먼저 기초를 다져야 할 필수 산업임을 인식하고, 조국 근대화라는 국가적 비전을 이루기 위해 종합제철건설을 구상했다. 이 특명을 받은 자가 바로 당시 대한중석 대표이사 사장으로 재직중이던 박 명예회장이다.

박 명예회장은 1968년 4월 1일 34명의 임직원들과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의 창립식을 가졌다. 그리고 1970년 4월, 경북 포항 영일만에 조강연산 103만t 규모의 1기 설비 착공에 돌입했으나 공사는 좀처럼 진전되지 않았다. 건설 경험도, 기술도 없던 터라 더욱 쉽지 않았던 도전이었다. 박 명예회장은 "혈세로 짓는 제철소 건설이 실패하면 역사와 국민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해 영일만에 투신해야 한다"며 입술을 깨물고, "국가숙원사업에 동참한 긍지와 사명감을 갖자"며 직원들을 독려했다.

불퇴전의 각오로 매진하자는 리더의 강력한 의지는 현장에도 그대로 녹아들었다. 결국 예정보다 1개월 앞당긴 1973년 6월 9일 우리나라 최초 용광로에서 첫 쇳물이 흘렀다. 한 달 뒤에는 연간 조강생산능력 103만t의 1기 설비가 성공적으로 완공됐다. 이후 박 명예회장의 '우향우 정신'은 오늘날 포스코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상징이자 기업문화로 자리잡았다.

1981년 2월 18일 조강연산 850만t 규모의 포항4기 설비종합 준공에 이르기까지 포항제철소 건설사업은 규모나 물량, 공사 금액, 기간 등 어느 모로 보나 사상 초유의 대역사의 연속이었다.

포스코는 주설비 착공 13년만에 910만t 체제의 대단위 제철소를 세계 에서 가장 저렴한 건설비로, 가장 짧은 기간 내에 완공하는 기록을 세웠다. 특히 1972년 7월 후판공장 가동 이후부터는 조업과 건설을 병행하는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매기(每期)마다 공기(工期)를 단축해 왔다.

특기할 일은 260만t 체제의 2기 설비를 준공한 1976년 5월 이후부터 우리의 철강생산 능력이 북한을 앞지르기 시작하여 910만t 체제가 완료 된 1983년 5월에는 2배 이상의 조강생산 능력을 갖추게 됐다는 것이다. 또한 1기 가동 6개월만인 1973년 말 46억원의 흑자를 기록한 이래 매년 흑자행진을 지속하면서 2기부터 자체자금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설비확장 투자를 진행할 수 있게 됐다. 이어 포스코는 1978년 10월 제2제철 실수요자로 확정되면서 광양에 4기에 걸친 총 1140만t 규모의 일관제철소 건립을 시작했다. 1992년 10월 2일 4반세기 대역사 종합준공을 함으로써 광양 제철소는 최적의 생산규모를 갖춘 세계 최대의 단일제철소이자 21세기 최신예 제철소로 탄생됐다.

오늘 날 세계 5위(조강생산량 기준) 철강사로 성장한 포스코의 역사는 한국 경제의 성장사와도 궤를 같이하고 있다. 연간 조강생산 103만t 규모의 1기 설비로 시작한 포스코는 지난해 조강생산량 3370만t, 매출액 32조5820억원, 영업이익 5조470억원, 순이익 4조2030억원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창립 당시 34명의 임직원은 1만7450여명(계약직 포함)으로 늘어났다.

또한 포스코는 조업 개시 이래 품질 좋은 철강재를 공급함으로써 조선, 가전, 자동차 등 국가 산업발전의 근간이 되는 주요 관련 산업이 선진국 수준으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태준 유언 “포스코 세계최고 되길” 개인명의 재산 하나도  없어
  2011-12-14 09:20:39

 
지난 12월 13일 별세한 박태준 회장의 유언은 세계 최강 포스코가 되길 바라는 것이었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유족 측 대변인인 김명전 삼정 KPMG 부회장은 13일 빈소에서 박태준 회장이 병실에서 가족들과 나눈 대화내용을 공개했다.

김명전 부회장은 박태준 회장이 별세 전 "포스코가 국가 경제 동력으로 성장해 만족스럽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밝혔다.


박태준 회장은 이어 "포스코가 더 크게 성장에 세계 최고가 되길 바란다"며 포스코 임직원들에게 애국심을 갖고 일해줄 것을 당부했으며 포스코 창업 1세대 중 어려운 이들이 많은 것에 대해서도 안타까워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태준 회장은 유족 중 장옥자 여사에게 "고생시켜 미안하다"고 했으며 가족에게는 "화목하게 잘 살도록 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김명전 부회장은 "박태준 회장 개인 명의로 된 재산 및 유산은 하나도 없었다"고 확인했다. 김명전 부회장은 "박태준 회장은 평소에도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았다. 자식들의 도움으로 생활비를 받아 살았고 현재 살고 있는 집도 큰딸 소유의 집"이라고 했다.

한편 박태준 회장은 지난 13일 오후 5시께 별세했다. 사인은 급성 폐손상으로 알려졌다.

박태준 회장은 폐부종 증세가 악화돼 한달 전께부터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다. 지난 11월 9일 입원을 한 박태준 회장은 지난 11월 11일 흉막-전폐절제술을 받았다. 그러나 지난 12월 5일 급성 폐손상이 발생,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계속해오다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박태준 회장은 지난 2001년 당시 흉막섬유종으로 인해 미국에서 폐에 생긴 물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으나 이후 폐기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는 등 후유증을 겪어왔다. 당시 박태준 회장의 폐에서는 모래성분이 발견돼 젊은 시절 영일만 벌판에 포스코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먼지를 장기간 흡입한 게 폐질환의 원인이 아닌가 하는 추정이 나오면서 주위를 안타깝게 하기도 했다.

포스코는 박태준 회장이 포스코와 국가 경제에 이바지한 점을 고려해 최대한의 예우로 장례를 준비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