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이 사퇴를 거부한 채 출근 투쟁을 벌이고 있다. 천길 벼랑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겠다고 바동거리는 모습이 겹쳐진다. 손을 놓으면 나락이다. 그렇다고 휙 뛰어오를 가망은 없어 보인다. 얼마큼 버틸지는 의문이지만 종당에는 손을 놓아야 할 것이다.
진보를 표방한 그는 정의를 앞세워 서울시 교육감에 당선됐다. 전임 공정택 교육감이 비리로 몰락한 것을 시의 적절하게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만 알았지 둘은 몰랐다. 정의가 무엇인지를. 정의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정의를 지키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정의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우리는 정의를 너무나 쉽게 입에 올린다. 정의야말로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목표임에는 이의가 없다. 대학의 교훈 중에 정의가 많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동시에 유토피아(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적 존재다.
정의는 어느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다. 소유물이 될 수도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묘하게 상황이 전개되어 왔다. 정의는 소위 진보파의 전유물이 되었다. 진보는 깨끗하고 보수는 유능하다는 검증되지도 않는 2분법에서 유래되었다. 하나의 신화였다. 그러던 것이 정권교체를 거치면서 정체가 드러났다. 진보도 불의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보수는 무능의 덩굴에 칭칭 감겨 오가도 못한다는 새로운 사실이 폭로되었다.
정의는 알고 보면 대단히 잔인하고 가혹하고 냉정하고 엄격하고 무섭다. 정의의 실체를 알면 함부로 입에 담기조차 두려워진다. 정의에는 부자지간도, 친형제사이도, 혈육도, 벗도, 은인도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다. 정의를 실현키 위해서는 태산도 깨뜨려야 한다. 인정과 관용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의 개념이 이를 잘 설명해준다. 비 기독교인에게는 다소 지겹겠지만 (나도 철저한 무신론자다.) 구약 성경을 인용할까 한다. 구약 창세기에 처음 등장하는 하느님은 정의의 신을 의미한다.
그러나 두 번째부터는 관용, 용서, 화해의 신으로
이름이 바뀐다. 신의 속성이 정의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은 관용과 화해의 신을 원했다. 인간의 본성은 실수요, 신의 본성은 용서라는 말이 이를 잘 함축하고 있다. 인간 실존의 나약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곽 교육감은 정의의 칼을 휘두르면서 서울시 교육의 수장으로 우뚝 섰다. 그러나 이제 그의 정의는 불의와 동의어임이 확인됐다. 그의 정의는 허위였고, 기만이었고, 위선이었고, 독선으로 판명 났다.
그를 교육감으로 밀어 올렸던 그 정의가 이제 그를 교육감에서 내려오라고 아우성치고 있다. 정의가 사랑보다는 엄정함을, 관용과 용서보다는 정당한 처벌과 대가를 요구하는 가혹한
부메랑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못내 아쉬운 듯 교육감 직에 연연하고 있다. 벼랑 끝 돌부리를 잡고 올라오려고 용을 쓰는 모습이 못내 안타깝다.
그는 알아야 한다. 그에게 후보매수 의혹의
그물이 씌워지면서 그는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다. 식물 교육감으로 전락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출근하여 결재 서류에 서명을 하고 부하 직원을 다 잡아챈다고 교육감인 것은 아니다. 그의 말과 행동은 제대로 영이 서지 않는다. 직무수행은 물 건너 간 것이다. 외형은 저두굴신(低頭屈身)하더라도 본심은 그를 떠나 있다. 면종복배(面從腹背)의 불의만 키울 따름이다. 그가 신주처럼 떠메고 다녔던 정의의
현판은 떨어져 산산조각으로 박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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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서울시 교육감 선거당시 박명기 서울교대 교수에게 2억원을 진보진영 후보 단일화에 대한 대가성으로 지불했다는 의혹을 받고있는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이 29일 오후 서울시의회 임시회 본회의에 참석해 머리를 만지고 있다.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
그가 내세웠던 각종 교육 공약도 무산의 위기에 처했다. 상당수 공약은 이념 지향적이거나 지나치게 진보적이어서 추진 과정에서 적잖은 반발이 수행되었을 것이다. 일부 공약은 교육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 넣었을 것이다. 변화는 원래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 역사의 오랜 가르침이기도 하다. 시작도 해보기 전에 그의 이념과 꿈은 사멸한 것이다. 그 자신의 개인적 불행이기도 하지만 우리 교육계로서도 아쉬운 대목이기도 하다.
또 있다. 그가 그 자리에 억지로 앉아 있을수록 서울의 초중등 교육은 형해화한다.
학사행정의 비정상화로 교육의 제1차적 당사자인 학생과 교직원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는 것은 자명하다. 학부모의
가슴도 멍들게 한다. 그가 하루라도 빨리 물러나면 교육정상화를 그만큼 앞당기게 된다.
곽 교육감은 선거 전후의 자신을 되돌아보는 지혜가 요청된다. 전임 교육감의 불의와 비리를
손가락질하고 매도하기에 열을 냈던가를. 서울시 교육에 부정과 비리와 탐욕을 걷어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도록 하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기억한다.
이제 본인이 비리의 장본인이 되어 버렸다. 당신이 전임자에게 했던 것보다 더 혹독한 돌팔매질을 서울시민이, 아니 대한민국 국민이 하고 있다. 당신의 정신적 고향이요, 피난처이자, 정신적 지주인 재야와
시민단체와 야당도 당신에게 돌을 던지고 있다. 거의 모두가 당신에게서 등을 돌린 것이다.
곽교육감은 ‘선의’로 2억 원을 건넸다고 한다. 그 설명의 구차함과 옹색함은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알 것이다. 오죽했으면 그의 지지세력, 우군,
동지들도 그 말을 귓등으로 흘려듣고 있다.
사법부의 최종 판단이 아직 남아 있다. 유죄 판결이 나더라도 1년은 현직을 유지할 수 있다. 행여 그것을 버팀목으로 활용한다면 교육자의 본분은 상실한 것이다. 잡범이나 할 짓이다. 교육의 길, 선비의 길로 들어 선 자로서는 차마 못할 짓임을 알아야 한다.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돈으로 후보를 매수하는 것은 죄질이 나쁘다. 선거법에서도 후보매수를 가장 나쁘게 보고 있다. 금품으로 후보를 매수하는 것은 주권자인 국민의 선택권을 원천 봉쇄하는 중대범죄다. 그것은 국민을 우롱하는 짓이요, 국민의 주권을 유린하는 행위다. 교육자로서는 금단의 열매를 딴 것이다.
일부의 주장대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주민투표 패퇴를 덮으려는 표적수사일 수도 있다. 정국의 국면 전환을 노린 정치적 음모 내지는 공작정치일 지도 모르겠다.
먼 후일 사실이 그렇다 할지라도 곽 교육감이 그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벼랑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모습은 추하다. 그것은 서울, 아니 이 땅의 학생, 교사, 학부모, 국민 모두의 눈길을 어디 둘 줄 모르게 당황케 하는 것이다.
고양이 쥐 생각하는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곽 교육감이 고집을 부릴수록 10월로 예정된 서울시장 선거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그가 교육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진보세력의
단합된 힘이었다. 그런 그가 버티는 것은 그의 본가요 친정인 진보세력을 배신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하나의 잘못에 또 다른 잘못을 추가하는 결과가 된다.
갖은 변설과 온갖 수사로 변명하는 것보다 떠나는 것이 훨씬 아름답다. ‘떠나야 할 때 떠나는 이의 뒷모습이 아름답다’는 시인의 말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단물이 우러나온다. 그것은 해법이요 지지자들에 대한 도리요
인사이기도 하다. 자칫 벽에 x칠 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가 입술로 되뇌었던 정의, 공정, 청렴이라는 어휘에 대한 존경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미안한 감도 마음 한 구석에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교육감이라는 허울은 과감히 벗어 던져야 한다. 억울하고 가슴 아픈 사연이 있더라도 민간인 신분으로 싸워야 한다. 그게 선비의 도리요 대장부의 길이다.
마지막으로 두 번의 서울시 교육감 직선은 서울시민과 많은 국민에게 깊고도 암울한 생채기를 남겼다. 한 개인만의 잘못이 아닐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이번 일을 계기로 단체장과 교육감을 동일 티켓으로 묶는 방안도 고려해 봄직하다. 다만 교육이 정치의 포로 내지는 볼모가 된다는 단점이 있어 망설이게 한다.
그렇다고 정치인처럼
사시사철 정치자금을 모금하고
후원회를 두도록 허용하고 교육행정보고회도 인정한다면 교육계는 정치판으로 돌변할 것이다. 두 번의 선거가 안겨준 숙제다. 10월 선거는 현행대로 갈 수밖에 없다. 다음 선거부터는 이런 불미
스런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두 손을 모은다.
글/조병철 언론인·전 세계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