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의 왕자 햄릿은 대학생이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의 비극 『햄릿』의 대사를 보면 그가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공부하다 부왕(父王)의 서거 소식에 덴마크로 돌아왔음을 알 수 있다. 몇몇 학자들은 햄릿이 대학생이라 더욱 고뇌가 컸다고 말한다. 지적인 회의(懷疑)가 많으며, 또 순수한 이상에 반하는 참담한 현실을 더 민감하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 고뇌 속에 외친 햄릿의 독백 “사느냐 죽느냐(To be, or not to be)”는 최근 KAIST 등에서 자살로 스러져간 대학생들의 고민을 연상시키며 남다른 울림으로 다가온다.
햄릿이 다녔다는 비텐베르크 대학은 실존하는 곳이다. 바로 이곳에서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1483~1546)가 교수로 일하면서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에 의문을 제기하는 ‘95개 논제’를 대자보로 써 붙였던 것이다. 결국 루터는 파문당하고 몸을 숨겨야 했다. 이처럼 대학은 신선한 지성(知性)으로 기존에 진리라고 믿어진 것을 의심하고 사색하는 곳이며, 또 그 지성으로 세운 이상이 현실과 충돌하는 것을 겪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학생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이 생각하고 회의하고 고민하게 된다. 햄릿 역시 그랬다.
러시아의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1818~83)는 이러한 햄릿이 “지적, 사색적, 비행동형 인간의 전형”이라고 유명한 에세이 『햄릿과 돈키호테』(1860)에서 말했다. ‘행동형 인간’ 돈키호테 같았으면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유령의 말이 끝나자마자 달려가 숙부를 해치웠으리라. 투르게네프는 역사를 바꿀 수 있는 것은 돈키호테 쪽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투르게네프가 행동하는 지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포함한 대부분의 19세기 지식인들은 햄릿 쪽에 더 가까웠다. 끊임없이 의문을 품고 행동의 결과를 부작용을 포함해 따져 보는 것이 지성인의 속성이며 또 의무기도 하기 때문이다. “분별심은 우리 모두를 겁쟁이로 만든다”는 햄릿의 독백처럼 그것을 스스로 냉소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19세기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은 햄릿을 자신과 동일시했다.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대가 외젠 들라크루아도 그랬다. 그는 스스로를 검은 상복을 입은 햄릿으로 묘사한 자화상을 그리기도 했고, 햄릿이 5막에서 교회 묘지 일꾼들과 만나는 장면을 유화(위의 그림)와 석판화로 제작하기도 했다. 햄릿은 일꾼이 새 묏자리를 파다 발견한 해골이 어린 시절 그를 놀아주던 광대 요릭이라는 것을 알고 해골을 든 채 인간의 필멸과 그 허무함에 대해 독백한다.
그러나 햄릿은 숙부와 재혼한 어머니에 대한 깊은 배신감과 그로 인한 여성 전반에 대한 의심 때문에 오필리아도 믿지 못하고 거친 말을 퍼부어 상처를 준다. 그 와중에 햄릿이 오필리아의 아버지 폴로니어스를 숙부로 착각해 죽이자 오필리아는 그간의 고통이 폭발해 미쳐버린다. 결국 그녀는 실성한 채로 꽃을 꺾으며 돌아다니다 냇물에 떨어져 익사했다.
오필리아의 마지막은 이렇게 묘사된다. “옷이 활짝 펴져서 잠시 인어처럼 물에 떠 있는 동안 그 애는 자신의 불행을 모르는 사람처럼, 아니면 본래 물 속에 태어나고 자란 존재처럼 옛 노래 몇 절을 불렀다는구나.”
영국 라파엘전파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의 작품(그림②)은 이 대사를 절묘하게 묘사해 수많은 오필리아 그림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다.
햄릿은 오필리아와 달리 마지막에 숙부를 죽이고 자신 역시 죽는 순간에도 사후의 일을 염려하며 번민을 놓지 못한다. 어쩌면 고뇌는 지성인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대학생들의 경우에는 그 이상이 더 풋풋하고 크기에 고뇌도 더 클 것이다.
최근 대학생들의 자살은 개인의 마음가짐으로만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학교 시스템의 개선 등 사회적 노력이 필요한 문제다. 그러나 “죽음의 잠 속에서 어떤 꿈이 올지 모르니” 죽음은 고뇌의 해결책이 아니라는 햄릿의 독백은 학생들이 기억해둘 만하다.
문소영 기자
“너희들도 연극배우냐?” 햄릿의 ‘원조 독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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