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과 死

각계 권위자 잇단 자살은 `경쟁사회의 그림자'

含閒 2010. 2. 26. 10:43

각계 권위자 잇단 자살은 `경쟁사회의 그림자'

연합뉴스 | 입력 2010.02.26 08:23 | 수정 2010.02.26 10:06 |

 

"전문가일수록 인정욕구 충족 안 되면 극단적 선택"

"인내력 부족도 요인"…"삶의 질을 중시하는 태도 필요"

(서울=연합뉴스) 이한승 기자 = 산업계와 학계 권위자들이 최근 잇달아 자살한 데 이어 서울의 유명 대학병원 교수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져 우리 사회에 충격을 주고 있다.

이들은 각자 소속 분야에서 정상급 위치를 굳혀 일반인이 보기에 남부러울 것이 없는데도 부귀영화도 포기한 채 고귀한 목숨을 버리는 것은 치열한 경쟁사회가 낳은 병리현상으로 분석된다.

각계 권위자들이 평생 쌓은 지식과 기술을 우리 사회에 충분히 베풀지 못한 채 쉽게 삶을 접는 세태는 실적 압박감 등이 원인인 만큼 약육강식으로 상징되는 `정글'에서 가끔 벗어나 삶의 질을 중시하는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다고 전문가들이 조언했다.

26일 경찰에 따르면 최근 한 달 새 서울의 명문 사립대 교수와 대학병원 의사, 대기업 임원이 잇따라 자살했다.

모 대학병원 교수 A씨(39)는 지난 20일 오전 9시34분께 소속 병원 6층 옥상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A씨 연구실에서는 평소 복용하던 우울증 치료약이 있는 점으로 미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된다.

24일에는 초전도 연구 분야의 국내 최고 권위자로 알려진 서울 사립대 물리학과 교수 B(58)씨가 "좋은 논문을 내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채 사망했다.

지난달 26일에는 삼성전자 반도체 D램 분야의 핵심 기술 인력이었던 부사장급 임원 이모(51)씨가 과중한 업무 부담감을 호소하며 주상복합 자택의 옥상에서 건물 아래로 투신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각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은 이들조차 자살로 내몰리는 것은 실적 위주의 경쟁사회가 낳은 비극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했다.

승자만이 인정받는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우수한 실적을 남기지 않으면 언제든지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과도한 두려움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강은호 삼성서울병원 정신과 교수는 "의식주 등 생물학적인 욕구가 해결되면서 현대인들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커졌다. 전문가집단에서 특히 강한 인정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자포자기 심정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오진탁 한림대 생사학연구소 소장 역시 "우리 사회가 글로벌 경쟁력을 강조하고 있지만, 현실은 국제적 능력을 갖춘 권위자까지 자살로 내몰 정도로 가혹하다. 경쟁과 실적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홍강의 서울의대 신경정신과 명예교수는 "경쟁이 치열해진 것도 사실이지만 어려운 상황을 견뎌낼 수 있는 인내력이 약해지면서 자살률이 늘어나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자살을 막으려면 삶의 질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의식을 바꾸고, 우울증 조짐이 생기면 주저하지 말고 병원을 찾아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 전반에 `경쟁력 신화'가 만연하면서 행복지수는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며 "사회에서 전문가로 인정받고 안정적인 지위를 가진 계층부터 삶의 질을 중시하고 경쟁력이 전부가 아니란 생각을 해야 사회 전반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강은호 교수는 "우울증 증상이 심해지면 호르몬 변화가 일어난다. 개인적인 의지나 생각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만큼 병원에서 치료받는 것을 망설이면 안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