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겨울 소나무 / 도종환

含閒 2010. 1. 26. 10:04

겨울 소나무 / 도종환

고개를 넘는데 싸락눈이 칩니다.
먼 산과 하늘의 경계를 부옇게 지우며
눈을 머금은 구름이 밀려옵니다.

길 위에 얇게 쌓이려다가 바람에 날려가는 모습이
물안개가 솟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벌목을 해서 하얗게 눈이 덮이는 산의 어깨와
구불구불 쌓아놓은 나무의 긴 줄이
흰 호랑이 몸과 줄무늬를 닮았습니다.
저 산맥도 어쩌면
야생의 짐승처럼 달려가고 싶은지도 모르겠습니다.

가까운 기슭에는 소나무들만 짙푸른 빛으로 서서
눈발을 맞고 있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여름과 가을의 녹색은 아니고
조금 어두운 초록빛입니다.

겨울을 지내느라 잔뜩 긴장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모든 활엽수들이 잎을 버리고 난 뒤에도 
푸르게 자신을 지킨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소나무 잎을 만져보니 바늘 여러 쌈을
손에 쥐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살아 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 혹한에
자신의 빛깔을 지킨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찬바람 눈보라 몰려오는 계절에도 자신의 모습,
자신의 빛깔을 지키며 사는 소나무를 보며
절개 있는 나무라 하지만 홀로 푸르게 사는 일은
얼마나 외로운 일입니까?

고독하게 사는 건 독하게 사는 것이기도 합니다.
청정하게 사는 일은 얼마나 힘들게 사는 일이며,
늘 한결 같은 모습으로 사는 일은
하루하루를 얼마나 매섭게 사는 것입니까?

그러나 맹추위 속에서 푸르게 사는
소나무 바늘잎은 사막에서 살아남은
식물의 바늘잎과 다릅니다.

사막에서 살아남은 식물의 바늘잎은 가시가 되어
언제라도 찌를 준비가 되어 있는 잎인데,
소나무 잎은 유연함을 지닌 바늘잎입니다.

자신을 향해서는 날이 서 있지만
남을 찌르려는 잎은 아닙니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는 푸른 마음으로
다가가는 잎입니다.

소나무를 가까이 하지 않는 나무가 많다고 합니다.
홀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먹은 독한 마음이 주는
차가움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나무 있어 겨울 산이 덜 적막합니다.
소나무조차 없는 잿빛으로 덮여 있다면
산은 참으로 삭막할 겁니다.

홀로 푸르게 사는 일은 눈물 나는 일입니다.
나는 그런 사람 몇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 있는 나무 있어
눈 쌓인 겨울 산은 아름다운 풍경화가 됩니다.




-도종환 시인의 산방일기에서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 편지 / 황금찬  (0) 2010.03.17
나, 당신과 사귐에 있어   (0) 2010.02.26
12월의 엽서  (0) 2009.12.28
[스크랩] 농담 / 이문재  (0) 2009.12.10
겨울 사랑 / 문정희  (0) 2009.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