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스크랩(報紙剪貼)

서라벌에 깃든 석당(石堂) 최남주의 향기따라 <35>

含閒 2024. 3. 2. 09:26
서라벌에 깃든 석당(石堂) 최남주의 향기따라 <35>
해방 직후 총독부 관계자 “최남주 절대 채용말라”
서라벌신문 기자 / 2024년 02월 29일
SNS 공유
   
현암 최 정 간
매월다암원장
차문화연구가
1945년 8월 15일 정오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에서 일본인 관장 오사카 긴타로와 조선인 최남주는 일본천황의 항복목소리를 라디오로 듣고 긴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1945년 8월15일 경주박물관
오사카는 모든 것을 체념한 얼굴로 석당 최남주에게 경주박물관 열쇠를 맡기면서 박물관인수를 제안하였다. 그리고 자신과 가족이 무사히 경주를 떠나게 해달라고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부탁하였다. 최남주는 순간적으로 이제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고 조선이 진정으로 독립이 되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되었다. 1943년 일본인 경주경찰서장은 석당이 동학가문의 후손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경주를 찾아온 건국동맹의 이여성, 이상백 등을 비롯한 여러 독립투사들과 접촉한 사실을 알고 총독부 박물관에 압력을 넣어 경주박물관 분관원직을 그만두라고 하였다. 이어 석당의 가택을 수색하여 동학혁명의 주역 해월 최시형 선생의 순교직전의 사진과 고려혁명당 최동희 선생의 편지 등을 압수해갔던 것이다. 이러한 일본 제국주의의 악랄함을 깊이 가슴에 담고 있던 석당은 일본인 관장 오사카로부터 경주박물관을 인수해달라는 소리를 듣고 만감이 교차하였다. 석당은 오사카에게 아직 상황이 어떻게 될 것인지 조금 더 지켜보자고 하였다.
 
 
 
해방직후 사재를 털어 경주고적보존회를 결성한 석당 최남주. 경주인근의 고인돌을 답사하고 있다.
 


운명의 박물관 두 사람
1945년 8월 17일 서울 경복궁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김재원이라는 조선인이 자신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멤버는 아니지만 위원회로부터 위촉받았다라고 소개하며 총독부박물관장인 아리미쓰 교이치를 찾아와 박물관인수에 대한 담판을 하였다. 8월 17일 경주박물관 최남주 앞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문화선전부장 이여성이 긴급상경하라는 전보를 보냈다. 이여성은 8월 18일 상경한 최남주에게 신라천년고도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경주박물관을 하루속히 일본인 관장으로부터 인수하라는 명령과 건준명의의 경주박물관장 임명장을 주었다. 석당은 곧바로 경주로 내려와 이사실을 일본인 관장 오사카에게 전하였다. 오사카 역시 최남주에게 경주박물관을 잘 인수하라고 하며 자신은 일본으로 하루속히 떠날 준비를 하였다.
한편 김재원의 회고담에 의하면 8월 말이나 9월 초경 백남운(당시 학술원원장)에게 총독부박물관 지방분관 인수관계로 상의하면서 여비를 얻어서 경주와 부여로 출발하였다고 한다. 출발하기전 김재원은 총독부박물관에서 관장인 아리미쓰와 조선인 행정책임자 최영희와 면담을 하였다. 이때 아리미쓰와 최영희는 경주에 가면 학예직을 맡을 사람이 없으니 지금 군청(경주군청)촉탁으로 있는 최순봉을 당분간 관장으로 있도록 할 것과 최순봉 외에 최남주라는 사람이 박물관을 드나드는 그는 사무능력이 없으니 절대로 채용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 내용은 아리미쓰의 회고록 ‘조선고고학 75년’에는 빠져있다. 그의 말처럼 최남주가 경주박물관을 드나드는 인물이었고 업무능력이 없었다면 ‘1937년 조선 고적조사보고서’에 일본고고학의 교토학파 거두 우메하라 세이지가 쓴 서문에는 아리미쓰와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원 최남주가 고적발굴 조사업무에 참가하였다고 왜 기록을 하였을까?

아리미쓰의 교활함
일본고고학의 교토학파 막내로서 아리미쓰는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장으로 재직하였다. 이때 최남주는 경주고적보존회 소속으로 매일 박물관에서 얼굴을 마주하며 근무하였다. 석당이 본 아리미쓰의 첫인상은 매우 차가웠고 일본식민지 청년고고학자로 조선인들을 멸시하는 행동을 자주하였다고 한다. 1932년 봄날 최남주는 경주 남산아래서 발견한 석탑재를 운반하여 박물관에 전시하는 문제로 그와 심한 언쟁을 벌인 일이 있었다. 석당은 민족의식이 강한 성격이라 자기보다 두 살 어린 아리미쓰의 불손한 태도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고 그 일 이후로 아리미쓰는 석당을 계속 경원시하였다. 그는 김재원에게도 최남주에 대한 불쾌함을 드러내며 경주박물관장 임명에서 배제시키고 최순봉을 추천한 것이다. 김재원도 건준의 이여성으로부터 최남주와의 친분 이야기를 듣고 경계하였다. 일제강점기 독일에서 고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김재원은 한번도 경주박물관에서 석당 최남주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1945년 9월 9일 미군정하에 김재원은 영어를 할줄 아는 고고학자로서 미군정과 교섭하여 그 해 12월 국립박물관을 설립하고 박물관장에 취임하였다. 석당 최남주는 그동안 박물관에 대한 축적된 경험을 못살리고 박물관을 떠났다. 그는 해방된 조국에서 신라문화유산에 대한 사랑을 포기할수 없어 사재를 털어 순수민간단체인 경주고적보존회를 창설하여 외길을 걸어가야만 했다.
서라벌신문 기자 / 2024년 02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