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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동양미술사학자 존 카터코벨(Jon Carter Covell) 박사의 하동 차문화사랑

含閒 2023. 9. 4. 10:40

[기고] 동양미술사학자 존 카터코벨(Jon Carter Covell) 박사의 하동 차문화사랑

  • 기자명김회경 기자
  • 입력 2023.09.04 07:25

현암 최정간(매월다암원장 차문화연구가)

[경남=뉴스프리존]김회경 기자= 최근 언론에서는 옥션의 고가 미술품 경매 기사가 앞다투어 취급되고 있다. 단색화가들의 호당가격이 얼마에 팔렸다는 등 온통 카지노식 흥미 위주의 기사가 독자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한국미술사의 선구자 우현 고유섭(오른쪽)과 석당 최남주와 함께 경주 문무대왕의 호국얼이 서린 동해구 유적답사 장면(1938년 봄).(사진=현암 최정간)

일부 인기화가에 집중된 이러한 미술시장은 결코 바람직스러운 현상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하도 세상이 속도와 외형의 가치만을 추구하다 보니 이런 사회적인 현상이 미술시장에서도 통하고 있는 것이다. 

카지노식 경매에 참가하고 있는 많은 미술품 애호가들은 정작 한국미술의 어머니와 같은 미술사의 학술적 가치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 같다.

왜냐하면 ‘미술사 연구’란 형이상학적인 철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현실에서 돈이 되지 않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명기 한국미술사의 선각자인 우현 고유섭(1905~1944) 선생 같은 분이 존재했기에 오늘날 한국 미술계가 더욱 풍요로워지고 있다. 

그는 1938년 봄 경주를 방문해, 석당 최남주와 함께 감은사 석탑과 대왕암 등의 문무대왕의 호국정신이 깃든 동해구 유적지를 답사했다. 이에 해마다 경주의 신라문화 유산들을 답사하고 많은 글을 발표해 한국 미술사의 초석을 놓은 것이다.

중세 한일차문화교류사를 강의하는 코벨박사(오른쪽 1982년 봄).(사진=현암 최정간)

▶코벨 박사는 누구인가

외국인 미술사학자 중에 한국미술을 사랑한 몇 사람이 있었다. 그 중에 필자가 가장 잊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은사인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1910~1996) 박사다. 

코벨 박사는 1978년부터 1986년까지 한국의 역사와 미술사를 사랑해 서울에 체류하면서 영문으로 한국미술사에 관한 1400편의 글을 발표했다.

저서로 ‘한국문화의 뿌리’, ‘한국이 일본문화에 미친 영향’, ‘한국도자기의 세계’ 등 여러 권을 영문판으로 출판해 미국과 유럽의 학계에 소개했다.

그녀는 1910년 미국 위스콘신 태생으로 오벌린 대학에서 에드윈 라이샤워(Edwin Oldfather Reischauer, 전 주일대사, 동양사학자)와 함께 일본사를 전공한 후 1930년 콜럼비아대학원에서 일본인 미술사학자 후쿠이리키치로(福井利吉郞, 1886~1972)와 미국인 미술사학자 랭던 워너(Langdon Warner, 미군정하 경주 호우총발굴 참관)의 지도로 동양미술사를 전공했다.

코벨 박사는 틈나는 대로 미시간대학에서 중국어와 한문고전을 공부해 중국 미술사에도 해박한 지식을 습득했다. 1933년부터 프랑스 파리 대학에서 고고학을 3년 동안 연구했다.

1941년 ‘15세기 일본선화가(日本禪畵家) 셋슈(雪舟) 연구’로 서양인 학자로서는 최초로 콜롬비아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마침 이때는 일본과 미국이 태평양전쟁 중인 관계로 상대국을 적대시하는 등 몹시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대국의 화가와 작품 세계를 연구해, 미국의 심장부인 뉴욕에서 그것도 자신이 출판 경비를 부담해 한권의 책으로 탄생시켜 미국학계에 소개했다.

이러한 코벨 박사의 국경과 이념을 초월한 학자적 양심과 학문적 열정이 아니었다면 중세 일본의 선화가 셋슈란 인물은 서양학계 알려지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렇게 탄생된 것이 바로 ‘봉인된 셋슈, Under Seal of Sesshu’다.

코벨박사와 현암 최정간(1983년).(사진=현암 최정간)

▶2차 대전당시 일본에 있던 우리 귀중한 차(茶)문화유산 잿더미 될 뻔

1944년 미국은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전쟁을 조기 종식시키기 위해 일본의 문화유산이 가장 많이 밀집된 고도(古都) 나라(奈良), 교토(京都)에 2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할 계획이었다.

이때 코벨 박사의 남편인 셀돈 코벨(Sheldon Covell, 당시 미국 정보국 공군대령)과 하버드대학 일본 미술사 교수인 랭던워너 박사는 이 두 도시가 가지는 세계문화유산적 가치를 먼저 인식하고 미국방성에 원폭투하를 철회하라는 긴급탄원서를 제출했다.

미 공군은 탄원을 받아들였다. 이후 원폭투하는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됐다. 나라와 교토에는 고대로부터 한반도에서 건너간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많이 산재하고 있었다.

또한 15~16세기에 건너간 우리의 귀중한 차문화 유산들이 많이 보존돼 있어 하마터면 모두가 잿더미로 변해버릴 뻔 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코벨 박사는 필자에게 당시 긴박한 순간을 회고하면서 “지성과 학문의 힘이 결국 승리한 순간이었다”고 이야기해 줬다.

태평양 전쟁이 종전된 후 코벨 박사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외신으로 접하고 귀중한 한국의 문화유산들이 사라지는 것을 가장 안타깝게 생각했다고 했다. 

이때 남편은 미 공군에서 전역한 후여서 후배 조종사들에게 각별히 남과 북의 문화유산 폭격을 피해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코벨 박사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 때, 우리의 귀중한 많은 문화유산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코벨 박사는 1959년부터 미국의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과 하와이 대학에서 동양미술사와 한국미술사를 강의하면서 1978년에 본격적인 한국미술사를 연구하기 위해 서울로 왔다.

현암 최정간의 조선호텔 전시회.(오른쪽) 최정대 코리아타임즈 컬럼리스트, 코벨박사, 현암 최정간(1984년 5월).(사진=현암 최정간)

▶초암차와 일본국보 이도(井戶)다완 조선 전래설을 찾아 하동을 답사하다 

코벨 박사는 일본 미술사를 전공하고 연구를 계속한 결과 일본문화의 뿌리는 한국이란 결론에 도달한 후 1978년 서울 체류를 결심했다.

미국 대학에서 재직중 방학을 이용해 다년간 일본을 방문, 일본문화와 미술사에 대한 동양미적 시각으로 ‘다이도쿠지의 선(大德寺の禪)’, ‘일본의 정원’, ‘잇큐선사연구’ 등의 영문판 연구서적을 잇따라 출간했다.

코벨 박사는 또한 15세기 무로마치시대 일본 초암차와 이도다완 연구에도 많은 정열을 쏟았다. 

필자가 코벨박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79년 1월경, 형님이신 최정대(코리아타임즈 컬럼리스트)와 함께 당시 주한미국대사관 문정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제임스호잇 박사(James Hoyt, 한국가사문학전공)의 소개로 이뤄졌다. 

그 후 필자가 본격적으로 코벨박사에게 일본 미술사와 다도사를 사사하기 시작한 것은 한국 현대사 최대 비극인 5.18 관계로 수형생활 이후 하동으로 낙향한 1982년 봄부터였다. 

이때 코벨 박사는 ‘코리아헤럴드’와 ‘코리아타임즈’, 유네스코 기관지인 ‘코리아저널’ 등 영문매체들을 통해 지속적이고 새로운 시각으로 한국 고대사와 미술사를 연구한 결과를 발표하게 된다. 

코벨박사의 한국문화와 미술사에 대한 영문판 저서들.(사진=현암 최정간)

주로 일본문화의 뿌리는 한국문화라는 주제였다. 필자는 당시 16세기 조선의 남부지방에서 건너간 일본 국보 이도(井戶)다완의 생산지가 경남 하동군 진교면 사기마을 새미골이란 가설을 가지고 연구와 재현에 청춘을 바치고 있을 때였다. 

코벨박사와의 첫 만남은 필자의 저서 ‘한차문명의 동전’의 시발점이 된 큰 행운이었다. 코벨 박사는 이때 서울 서대문 봉원사 옆 정일형 박사(정대철 헌정회 회장 선친) 댁 사랑채를 연구실 겸 거주지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때만 해도 서울과 하동의 교통시설이 열악해 거의 10시간 정도가 소요됐다. 필자는 한 달에 두 번씩 코벨 박사 연구실을 찾았다. 

이러한 필자의 학문에 대한 열정을 가상히 여겨 필자의 서툰 영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코벨 박사는 15~16세기 일본 미술사와 다도사를 자상하게 지도해 주셨다. 

이때 코벨 박사는 능숙한 한문으로 필담까지 해 주었다. 코벨 박사가 집중적으로 교시한 분야는 15~16세기 일본 무로마치시대 다도 역사, 다완 역사, 수묵화가의 계보였다. 

이때 일본 수묵화가 이수문(李秀文, 조선인 출신), 슈분(周文), 조세스(如拙), 셋슈(雪舟), 셋숀(雪村) 등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다.

이들은 한결 같이 조선의 수묵화풍에 크게 영향을 받은 작가라고 했다. 무로마치시대 상류층 다회(茶會)에는 항상 이들의 작품이 걸려 있게 됐다.

그리고 교토 다이도쿠지(大德寺)가 조선 초암차 전래의 교두보란 학설도 가르쳐 줬다. 1983년 7월초 코벨 박사는 이도다완의 고향를 찾아 필자의 도요가 있는 경남 하동군 진교면 사기마을 새미골 도요지를 답사했다.

이곳 옛도요지에서 발견된 도편들을 정밀 조사한 후 이곳이 아오이도(靑井戶) 다완의 고향이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려줬다.

또한 하동 쌍계사일대 한국최초 차 시배지도 방문하고 하동차 맛이 일본 차 맛보다 좋다고 극찬을 했다.

일본 오사카 구자쿠미술관에 소장된 이도(井戶)다완.(왼쪽부터) 권병현 당시 외교부 아주국장∙주중대사역임, 하마다요시아키 쿠자쿠 미술관장, 현암 최정간(1985년4월).(사진=현암 최정간) 

코벨 박사는 하동지역의 민가인 초가형태가 일본 초암다실 원형과 가깝다고 이야기했다.

그 후 ‘현암 최정간 도요지’ 방문기를 코리아 헤럴드에 기고해주고 영문판 저서에도 소개를 해줬다. 코벨 박사는 1986년 여름, 고령과 폐렴으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돼, 고향 미국으로 돌아갔다. 

1996년 4월 미국에서 작고한 후 다시는 한국땅에 돌아오지 못한 한국 미술사 연구의 극락조가 됐다.

그의 유해는 조선에서 건너간 초암차 동전의 무대인 다이도쿠지 신주안(眞珠庵)에 모셔졌다. 필자는 2007년 4월 일본 다이도쿠지 신주안을 방문 코벨 박사 영전에 하동차 한잔을 올리면서 박사의 따뜻한 학은(學恩)에 때늦은 사죄를 드렸다.

그리고 한국문화와 한국 미술사에 매료돼 온갖 난간을 무릎 쓰고 한국 미술사를 해외에 소개한 코벨 박사께 정부는 문화훈장이라도 수여해야 되지 않는 것인지 상념에 젖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