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에 깃든 석당(石堂) 최남주의 향기따라 <30>
‘경주공원화’ 일제 때부터 몇차례 좌절…1968년에야 성사
서라벌신문 기자 / 2023년 0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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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 최 정 간 매월다암원장 차문화연구가 |
최초로 추진된 경주공원화 계획
석당 최남주는 1973년 5월12일자 조선일보에 연재된 회고록 ‘신라의 얼 반세기’에서 경주 국립공원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경주의 공원화 역사도 우연인지 모르지만 나의 신라의 얼을 찾아 반세기 역사와 그 운명을 같이해온 파란만장의 역사였다.’ 석당 최남주가 1926년 경주 박물관 전신이자 우리나라 첫 민간 문화유산 보호단체인 경주 고적보존회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혈기 방장한 용기로 비록 일제 강점기였지만 고향 신라고도를 체계있게 공원화하는 꿈을 꾸었다. 당시 동경대학교 임학과 교수이자 조원학(造園學)의 대가인 혼다세이로쿠(本多靜六)를 경주 고적보존회에서 초청하여 며칠동안 경주 현지를 답사하게 하였다. 그후 경주 고적보존회에서 설계비로 5백원을 혼다 교수에게 지급하여 경주공원 설계를 의뢰하였다. 그의 경주 공원화구상은 대략 다음과 같다.
①불국사와 석굴암을 천년공원으로
②남산에 순환도로 개설
③포석정, 반월성, 안압지, 황룡사지, 분황사, 탈해왕릉, 무열왕릉 등을 공원화하고 이를 고적지를 잇는 순환도로를 건설하여 아름다운 ‘유람공원’을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주 공원화사업은 당시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는 일이라 그만 꿈으로 그치고 말았다.
1955년 1월 31일 경주시 승격 및 국립공원지정 조사단의 경주 박물관 방문기념 촬영. 왼쪽에서 네 번째가 석당 최남주. |
국립공원 사업 재추진
정부가 수립되자 석당은 경주 고적보존회를 다시 조직하여 아무도 돌보지 않은 경주의 신라문화 유산들을 사재를 털어 돌보았다. 그리고 1926년에 제작한 경주공원 설계도와 계획서를 정부 요로에 제출하여 경주를 공원화해줄 것을 진정하였다. 1949년 이정한 경주군수를 비록한 경주지역 인사들과 함께 상경하여 관계부처를 방문하고 경주 국립공원화 사업에 관해 상세히 설명하였다. 그후 문교부에서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서 관계 전문가들인 이천수, 김윤기, 김재원, 이한철, 임천 등을 경주로 파견하여 국립공원 계획을 수립하게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6‧25 동란으로 인해 모든 자료들이 분실되어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다행히도 1955년 1월 31일 정부에서 경주시 승격조사단을 경주에 파견하였다. 석당은 이들 조사단원들에게 경주시 승격과 함께 국립공원이 꼭 조성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설명하였다. 이들은 경주국립공원 수립계획 조사도 병행하였다. 1955년 9월1일 그토록 염원하던 경주군이 경주시로 승격되었다. 1956년 경주시가 승격된 후 이승만 대통령은 경주를 방문하여 문교부와 각 부처에 경주 문화유산 보호와 개발에 특별지시를 내렸다. 문교부가 주관이 되어 관계전문가들에게 경주 국립공원 계획안 수립용역을 의뢰하였다. 1957년 프랑스 유학에서 귀국한 건축가 김중업과 박병주(홍익대학교 도시계획과 교수 역임)는 석당의 도움을 받으면서 ‘경주 국립공원 계획안’ 수정계획에 참여하였다. 김중업은 반월성지구를, 박병주는 경주문화유산 지역의 기초 측량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계획도 예산부족으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 근대화 사업과 함께 1968년 토함산, 남산, 대본지구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1971년 관광종합개발 계획 수립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의 용단으로 그토록 경주시민들이 염원하던 경주 관광종합개발 계획이 수립되고 그후 본격적인 경주 개발의 첫 삽을 떴다. 당시 정부로서는 엄청난 예산이 소요되는 사업이자 IBRD에 경주 개발차관을 요청하였고, 1973년4월 IBRD평가 조사단이 경주 현지실사를 거친 후 무려 2500만달러의 차관을 제공하였다. 이때 조사단의 안내는 국제적으로 역사도시 경주의 가치를 공부한 석당의 2남 최정채(전 미국뉴멕시코박물관 연구원)가 맡았다. 앞으로 신라왕경이 제대로 복원되는 날 석당이 평생 꿈꾸어왔던 찬란한 서라벌의 봄은 오고야 말 것이다.
서라벌신문 기자 / 2023년 0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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