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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세대 판화가 유강열과 통영 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를 회상한다.

含閒 2023. 10. 22. 12:49

한국 1세대 판화가 유강열과 통영 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를 회상한다.

  • 기자명김회경 기자
  • 입력 2023.10.20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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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뉴스프리존]김회경 기자= 문명과 예술은 수평선을 넘어 파도와 함께 밀려와 꽃을 피운다. 우리나라에서 지리·환경적으로 가장 해양성 예술이 꽃핀 곳은 경상남도 통영이다.

바다의 땅 통영은 1604년(조선왕조 선조 37년) 제6대 삼도수군통제사 이경준 장군의 원대한 전략적 견지에서 ‘삼도수군통제영’(조선수군총사령부)으로 건설된 계획도시다. 

현암 최정간(매월다암원장,차문화연구가).(사진=현인 최정간)

또한 1604년 우리나라 문헌에 최초로 기록된 서양 도래인 포르투칼 상인 주앙멘데스가 상륙한 곳도 통영이다. 삼도수군통제영에는 전시군수물자를 조달하는 12공방이 설치됐다. 평화시에는 나전칠기를 비롯한 조선왕조의 다양하고도 미적으로 뛰어난 공예품이 생산된 곳이다. 

12공방에서 생산된 공예품은 조선후기 공예사에 백미를 장식하고 있다. 이러한 12공방의 전통은 한국근현대공예예술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일찍이 통영은 삼남(三南)에서 풍부한 물산들이 모였고, 또한 지역특성인 수산물을 기반으로 한 해양지역경제가 발달된 곳이다. 근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서양문화예술들이 수평선 너머를 통해 통영에 이전 활착됐다. 

이러한 지리적환경과 문화예술적 토양은 각 분야에 걸쳐 세계적인 거장들을 탄생시켰다. 우리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6.25전쟁 때도 이중섭을 비롯한 수 많은 예술가들은 작품을 통해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독창적인 ‘통영시대’를 창조하였던 것이다. 

■ 전쟁 중에 탄생된 한국 최초 공예디자인 하우스

우리나라 1세대 판화가 유강열(劉康烈 1920~1976)은 6.25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을 왔다가 나전칠기의 고향인 통영으로 거쳐를 옮긴다. 이때 서울에서 함께 피난 온 통영 출신 나전칠기 공예가 김봉룡(金奉龍1902~1994)과 함께 옛 통제영 12공방의 나전칠기공예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그 질적인 향상을 위해 기능인력의 조형의식 및 현대적 미의식 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는데 두 사람은 의기 투합 했다. 

유강열은 당시 북한군의 공격으로 수도가 부산까지 옮겨온 어려운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김봉룡과 함께 1951년 8월 정원 40명의 2년제 교육기관인 경남도립나전칠기기술원 강습소를 지금 문화동 세병관 앞 김봉룡 생가부근에 조촐하게 개소했다. 

이듬해 1952년 당시 부산공예조합연합회 김영호와 유강열은 제4대 경남지사인 양성봉(梁聖奉 1900~1962)을 설득하여 그해 12월 항남동 적산가옥 2층 목조건물에 경남도립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로 승격하여 정식 개소했다. 그후 교육기간은 2년에서 3년으로 개편되었다. 또한 명칭도 충무시 공예학원으로 변경됐다. 

경남지사 양성봉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미국 유학을 갔기 때문에 선진문화 예술의 힘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문화 도지사 였다. 그는 미국유학 당시 어느 미술관에서 통영나전칠기공예품의 아름다움을 접하고 무한한 감회에 젖기도 했다고 한다. 

전쟁 중에 병사들을 훈련하는 양성소를 세워야 할 판국에 경남도립 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를 통영에 설립한 양성봉 경남지사. 그의 이름은 한국나전칠기 공예사에 꼭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현대나전칠기 공예 전문기능인들의 양성의 산실인 경남도립 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는 6.25의 전장(戰場) 포화 속에서 이렇게 탄생됐다. 교과과정은 데생, 디자인, 설계, 제도, 나전, 옻칠, 이론 등을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당시 교수진은 다음과 같다. 교장역할한 주임강사 유강열(일본미술대학교 공예도안과 출신), 기술강사 김봉룡(1925년 파리만국공예품박람회 은상 수상), 미술강사 장윤성(일본태평양미술학교 출신), 데생 및 미술사 강사 이중섭, 남관, 김경승(조각가), 박생광 등이 있었다. 전시(戰時) 통영에 개소된 경남도립 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는 우리나라 최초 공예디자인 하우스 역할을 했다.

■ 판화가 유강열은 누구인가 ?

유강열은 우리나라 근현대공예사에 있어서 거성(巨星) 같은 존재였다. 그는 한국 1세대 판화가, 염색공예가, 장식미술가로 선각자의 길을 개척해나갔다. 그의 예술세계의 근원은 한국 전통문화유산들이였다. 

유강열의 판화 꽃과 벌 1959년작 31×76cm(사진=다온바이뱀부 소장)

우리문화유산들을 보는 높은 안목은 그의 예술세계로 녹아 새롭게 재탄생되었다. 신라토기, 백자항아리, 나전칠기, 민화 등은 그의 작품에 승화되어 전혀 다른 예술세계로 우리들을 초대했다. 

최순우와 이경성도 그의 예술의 영감은 우리의 수준 높은 문화유산들이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비록 수화 김환기화백과는 장르를 달리했지만 우리 전통문화유산에 대한 현대적 조형 해석에는 서로 통하는 바가 많았던 것이다. 

특히 조선백자 달항아리를 한 사람은 판화로 또한 사람들은 유화로 재해석한 것은 미(美)를 통한 진정한 도반이라 할수 있다. 오광수의 지적처럼 유강열은 우리나라 장인 공예를 현대 조형이란 디자인 개념으로 혁신한 위대한 예술가였던 것이다. 그가 남긴 국회의사당벽화(세라믹타일)와 프랑스 대사관 벽화는 한국의 미를 현대조형의식으로 표현한 불멸의 명작이다. 

유강열은 1920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나 1944년 일본대학교 공예도안과를 졸업하고 1946년 귀국하여 고향 북청에서 잠시 중학교 교편을 잡았다. 1947년 금강산 신계사에서 사촌동생 유택열, 이중섭, 한묵등과 생활하다가 6.25 동난으로 인해 남쪽 거제도로 피난했다. 그후 부산에서 미술사가 최순우, 건칠공예가 강창원, 이중섭, 박고석, 정규, 김훈, 장욱진 등과 어울렸다. 

1952년 통영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로 이중섭을 데생강사로 초청하여 어려운 파난살이 하던 그를 도왔다. 유강열은 누구보다 이중섭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고 존경했다.

나전칠기 강습소 2층에 이중섭의 작업실을 마련해주고 이중섭은 통영에서의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흰소’ 등 통영풍경 여러작품을 제작하여 성림다방에서 전시회도 열어서 피난살이 생활에 도움이 됐다. 

이중섭의 말(馬) 판화 1941년작 10×15cm(사진=다온바이뱀부 소장) 

1954년 3월 통영 호심다방에서 유강열, 이중섭, 장윤성, 전혁림 등 4인전을 개최하였다. 이 전시를 마지막으로 유강열은 통영을 떠나게 된다. 최순우의 요청으로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미술연구소 예술부 주임 등 1962년까지 재직하면서 많은 작품과 제자들을 길러냈다. 

1958년 미국 록펠러재단 초청으로 도미하여 여러 전시에 작품도 출품하고 뉴욕 등지에서 현대공예의 새로운 흐름등을 연구했다. 1960년 김환기 화백의 권유로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교수가 되어 후학들을 지도하면서 다양한 작품들을 제작했다. 

1964년 그가 통영 시절 한국의 바우하우스를 꿈꾸며 열정을 쏟아부었던 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가 충무시 공예학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큰 보람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유강열은 아시아재단에 후원을 요청하였고 시찰단을 꾸려 통영 현지 조사를 하고, 나전칠기공예 제품개발에 대한 기술지원이 이뤄지도록 했다.

이처럼 그의 통영나전칠기공예 사랑은 통영을 떠나서도 계속된 것이다. 유강렬은 50대 열정적으로 창작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해외 여러전시회에 출품하여 한국공예의 미의 위상을 드높였다. 

건강을 돌보지않고 계속된 창작의 고뇌가 화근이 되어 1976년 11월7일 새벽 서울 불광동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56세의 한창 나이에 저별나라로 가고 말았다. 1978년 3월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초대유작전이 개최됐다. 

남관의 문자추상 1977년작 72×60cm(사진=다온바이뱀부 소장)

■ 현암 최정간과 유강렬의 예연(藝緣)

1954년 유강열이 국립중앙박물관 제2과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 경주박물관을 가끔 찾았다. 특히 신라토기와 토우, 와당 등을 좋아하여 작품의 소재로 삼기도 했다. 

그는 또한 신라왕릉의 12지신상 조각탁본에도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유강열은 필자의 선친인 석당 최남주가 일제강점기부터 경주고고학의 선구자로서 신라문화 유산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실을 국립중앙박물관 최순우로부터 들었다. 

이런 연유로 경주를 답사할 때마다 석당 최남주로부터 신라문화유산들에 대한 교시를 받았다. 그리고 신라능묘의 12지신상 탁본도 함께 하기도 하고 신라 조각 예술에 대해서 진지한 토론도 했다.

특히 한국 미술사의 개척자 우현 고유섭이 일제강점기때 경주신라문화유산 답사에 대한 일화를 석당 최남주를 통해 듣고 많은 감동을 받기도 했다. 

박생광의 십장생도 1983년작 48×20cm(사진=다온바이뱀부 소장)

필자가 유강열 선생을 처음 뵌 것은 1964년 초등학교시절 경주박물관 정원에서 선친과 함께였다. 매우 자상하게 필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며 "앞으로 자라면 신라 예술을 많이 공부하라"는 한마디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필자가 유강열이란 이름을 다시 기억하게 된 것은 1978년 3월 서울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대규모 유작전을 감상하면서 였다. 그리고 세월은 다시 흘러 그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2004년 필자가 당시 진의장 통영시장을 자문하여 통영역사문화도시의 기본계획을 수립할 때였다. 

통영 항남동 경남도립 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 설립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면서 유강열이란 인물을 뜻밖에 통영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그가 나전칠기양성소를 설립했고, 1952년에 이중섭화백을 통영으로 초청해 정성을 다해 돌봐준 분이 바로 내가 아는 유강열이란 분과 동일한 인물이란 것을 처음 알게 됐다. 

희미한 저편 기억의 창고구석에서 마치 잃어버린 전설을 찾아내듯이 유강열이란 거장은 다시 내곁으로 다가왔다. ‘얘야 너는 지금 경주가 아닌 통영에서 나를 이렇게 만나고 있구나’하고.

2019년 통영시는 항남동에 있는 경상남도도립 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 옛건물을 매입했고 문화재청은 2020년 12월 국가등록문화재 제801호로 지정했다. 

통영시 항남동에 있는 경남도립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 옛건물, 2층에는 이중섭 화백이 머물면서 황소를 비롯한 통영시대의 명작들을 탄생시켰다.(사진=현암 최정간)

2023년 3월 통영시는 이 건물에 대한 종합정비계획 최종 보고회를 가졌다. 6.25 한국전쟁 시절 통영에서 최초로 개소한 한국의 바우하우스, 경남도립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가 복원·정비되는 날을 기다려본다. 

그날이 오면 양성봉 전 경남지사, 유강열 판화가, 이중섭 화백은 다시 쪽빛 바다가 보이는 통영으로 초혼될 것이다.

현재 서울 논현동 다온바이뱀부에서는 옛 경남도립 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 시절 강사들인 유강열, 이중섭, 남관, 박생광, 전혁림 등의 작품들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김회경 기자 inkim12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