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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한국1세대 미술 평론가 석도륜(昔度輪)선생과 통영 전혁림 화백

含閒 2023. 6. 29. 01:41
[기고] 한국1세대 미술 평론가 석도륜(昔度輪)선생과 통영 전혁림 화백
  •  김회경 기자
  •  승인 2023.06.27 16:33

현암 최정간(매월다암 원장, 차문화 연구가)

[경남=뉴스프리존]김회경 기자= 1962년8월23일∼9월2일까지 서울국립중앙공보관 2,3층 전시실에서 한국 최초 신라석조미술품과 금석문탁본 전시회가 개최됐다.

현암 최정간(매월다암원장, 차문화연구가)

탁본 전시회의 주인공은 경주 신라 고고학의 선구자인 석당 최남주(石堂 崔南柱 1905∼1980)선생과 그의 아들 최정채(1940∼1978 전 미국 뉴멕시코 박물관 연구원), 최정필(고고학자, 전 국립박물관 문화재단 이사장) 부자였다. 

탁본 전시회를 주최한 단체는 영국왕립 아시아학회 한국지부, 주한 스웨덴 영사관, 후원은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이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개최되는 신라석조미술품과 금석문탁본전시회라서 중요 일간지와 영자 신문, 코리아타임즈(Korea Times)와 코리아 리퍼블릭(Korea Republic)에 연일 고고학부자(考古學父子) 탁본 전시회란 제목으로 보도가 됐다.

특히 초대 주한프랑스 대사 로제 샹바르(Roger Chambard 1904∼1982)는 고고학과 언어학자답게 신라조형예술의 탁본가치를 첫눈에 알아보고 석당 부자와 많은 대화의 시간을 가졌고, 이를 계기로 경주를 방문, 신라문화에 매료되기도 했다.

그밖에 우리 역사학계 석학인 서울대학교 김상기 교수, 이상백, 조명기(불교학자이자 동국대학총장), 최호진(연세대교수 경제학자), 김원룡, 황수영, 이경성(홍익대교수 미술평론가), 최순우, 미국인 미술사학자 부시멘, 게리 레드야드(후에 미국 콜롬비아대학 교수) 등 많은 인사들이 신라예술의 진수를 하얀화선지에 표현된 탁본으로 감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탁본 전시장에 아주 특이한 인물 한사람이 찾아와서 유심히 탁본들을 감상하고 석당과 그의 아들들에게 정중히 인사를 청했다.

자신은 원래 일제 강점기 동경제국대학교에서 미학을 공부하던 시절 동양금석문과 고대 불교조각탁본에 많은 관심을 가진 바가 있다고 했다.

중일전쟁 당시 학병으로 징집됐다가 조국이 해방된 후 귀국해 이런저런 사연으로 입산 승려생활을 10여년 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뜻한 바가 있어 환속해 신문기자 생활을 잠시한 후 이제막 미술평론가로 데뷔활동을 하고 있는 석도륜(昔度輪 1921∼2011)이라고 소개했다.

석당 최남주 선생 가족들이 본 석도륜의 첫인상은 눈빛이 형형하고 동서고금의 미술사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천재형이고 청나라 말 양주팔괴 처럼 다소 괴기스럽게 보였다고 회상했다.

신라 탁본 전시회를 통해 석당 가족들과 우리나라 1세대 미술평론가 석도륜과의 아름다운 인연의 꽃은 이렇게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석도륜은 당시 석당에게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조선인 최초로 경주 신라 불교문화 유산발굴과 보존에 헌신한 내용을 불가(佛家)에 있을 때부터 듣고 존경했다고 한다.

1978년9월 현암 최정간의 주한프랑스 문화원 초대전 당시(왼쪽부터) 박영애(화가겸 가수 현경과 영애), 석도륜, 현암 최정간, 석당 최남주.(사진=현암 최정간)

탁본 전시회가 개최되는 동안 석도륜은 매일 전시장을 찾았다. 이때 영자신문 코리아리퍼블릭(Korea Republic) 문화부장 천승복(미술평론가) 코리아타임즈(Korea Times) 문화부 기자 백승길(미술평론가),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 이구열(미술평론가), 판화가 이항성, 화가 겸 판화가 정규, 서양화가로서 신라와당 예술탁본에 많은 관심을 가진 박수근, 서양화가 권옥연, 서예가 검여 유희강, 여류화가 천경자, 공예가 이완석(가로수길 인문학당 당주 김용식 외조부) 등과 함께 탁본 전시회를 관람하고 신라석조 예술미에 대해 열띤 토론도 했다.

그 후 1962년 11월 석도륜은 석당의 경주 고택을 방문해 여러날 숙식을 하면서 석당과 함께 신라 불교 미술의 정수인 경주 남산을 답사할 기회를 가졌고 석당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이때부터 석도륜은 석당을 진정한 경주남산 불교문화 유산의 수호신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자신의 젊은 날의 짧고 파란만장 했던 삶의 여정을 흑백 영화처럼 고백했다.

석도륜은 1921년 부산 동래에서 속성 이씨(李氏)로 태어났다고 했다. 유년시절 어떤 사연으로 인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일본 동경제국대 예과를 다녔다. 

이때부터 동서양의 역사, 철학, 문학, 미술사 등 다양한 서적을 다독했고, 당대 석학과 거장들을 만나 사숙했다.

동아시아선(禪)철학의 대가 스즈키다이세쓰(鈴木大拙 1870∼1966), 미술사학자 후쿠이 리키치로(福井利吉郞 1886∼1972), 조각가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郞1883∼1956), 서양화가 쓰다세이슈(津田正周), 니시무라이사쿠(西村伊作, 이중섭의 스승) 등과 일본전각의 대가들과 교류했다. 이들 모두가 석당 최남주와 경주에서의 인연이 있었던 인물들이었다.

1988년 석도륜의 작품(사진=최정대 소장)

▶운명의 태평양전쟁과 석도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학병으로 강제 징집돼, 중국전선으로 투입됐다.

1944년 가을 중국산시성(山市省)에 있는 북위시대 최대 불교석굴인 대동운강석굴(大同雲岡石窟)을 학병신분으로 답사를 했다. 이곳 답사를 통해 후일 동양불교 미술사를 공부하게 됐다고 석당에게 술회를 했다.

사람의 운명이란 시간과 공간에 의해 정해지는가? 석도륜의 운명도 태평양전쟁과 세기적인 사건인 나가사키 원폭투하 장면을 직접 목격하고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됐다.

일본군이 중국전선에서 소련의 참전으로 패색이 짖어지자 그의 부대는 일본 함선을 타고 나가사키항까지 무사히 철수하게 된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기항지 나가사키항 함선위에서 섬광이 번쩍하는 세기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미공군이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리고 함상에서 자신의 전우가 피폭당하면서 죽어가는 모습에서 생자필멸 회자정리의 큰 깨달음을 얻게 됐다.

1948년 3월15일 바로 해인사 백련암 선원으로 입산해 버린다. ‘효산당 법안’을 은사로 삭발수계 후 일체 세속과 멀리하고 불법에 정진했다.

6.25 한국 동란 중에는 부산 범어사 청풍선원에서 동산 혜일선사와 수행 정진했고 그 후 오대산 월정사 방한암 선사, 탄허스님 등과 한철을 지냈다. 

입산수행 10년 동안 전국각지의 사찰순례하고 사천다솔사 효당 최범술 스님, 한국 철학의 대가 김범부 선생, 진주의 내고 박생광 화백 등 수 많은 인사들과 교류했다.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일화는 성철대종사와 고성 옥천사에서 함께 수행을 했었다는 것이다.

1960년대 전혁림 화백의 작품‘나부’(사진=다온바이뱀부 소장)

▶통영출신 전혁림 화백을 스타로 만들다

석도륜운 1960년부터 1980년대까지 우리나라 미술평론계 1세대 답게 중요 일간지와 미술잡지에 많은 작가론을 발표했다.

때로는 도끼자국과 같은 글귀로 대가들의 작품을 신랄하게 비평하기도 했고, 서울의 명문 미술대학들에서 동양미술사를 강의했다.

짬짬히 시간을 내어 그의 날카로운 철필로 수많은 전각작품과 독창적인 서예작품을 남겼다. 

또한 그는 1979년 ‘계간미술’(중앙일보사 발행)에 ‘작가를 재평가한다’는 특집에서 유일하게 통영출신 전혁림(1915∼2010) 화백을 주목하고 한국의 서양화단의 대가반열에 올려놓는 호평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전혁림은 단순한 지방 작가가 아니라 서울의 유명화랑에서 초대전이 개최되고, 일약 한국 화단의 대가가됐다.

화풍은 대담해지고 색채는 강렬하고 화려해졌다. 오늘날 전혁림 화백의 예술적 영광이 있기까지는 석도륜의 평론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석도륜은 전혁림이 한국 추상화단에 거장으로 성장할 잠재성을 일찍부터 눈여겨 봐 왔기 때문이다. 

석도륜이 소장했던 천경자 화백 초기유화작품 앞에서(왼쪽) 여송 이승만 선생(사진=다온바이뱀부)

전혁림은 2010년 5월25일 통영의 쪽빛바다를 안고 서방정토세계로 떠났고, 석도륜은 2011년 6월18일 곧 뒤따라갔다. 

한시대 한국 미술계의 등불이 된 두 거장은 아직도 우리들에게 진한 예술의 향기를 남기고 있다. 석도륜은 부산 경남예술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 느티나무와 같은 존재였다. 

한국화의 거장 소산 박대성 화백과 일본의 유명 사진작가 후지모토 다쿠미(藤本巧) 등도 한때 그의 영향을 받았다. 

한편 석도륜 최후의 고제(高弟) 여송 이승만 선생이 아직도 서울 송파우거에서 가난하고 진솔한 철필로 그의 전각 예술혼을 계승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