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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에 깃든 석당(石堂) 최남주의 향기 따라 - 신라원광법사부도 발견 경위 -

含閒 2022. 11. 12. 15:23

 

서라벌의 다향(茶香)을 따라
서라벌에 깃든 석당(石堂) 최남주의 향기 따라 - 신라원광법사부도 발견 경위 -
서라벌신문 기자 / 2022년 10월 26일
 
               
   
 
현암 최정간
매월다암원장, 차문화 연구가
1970년 8월 24일자 조선, 동아, 한국, 중앙 등 각일간지 사회면에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 금곡산(해발 500m)에서 국보급 신라원광법사부도 발견’이란 제목으로 일제히 보도되었다. 당시 함종혁 동아일보 경주주재 기자는 신문에 게재할 원광법사 부도 발견 사진이 얼마나 중요하고 급했는지 경주에서 택시를 대절하여 사진전송 장비가 있는 대구지사까지 가서 서울본사 사진부로 사진을 전송하기도 했다. ‘경주주재 함종혁 기자 대구지사 경유 전송’이라고 되있는 당시 동아일보 기사 사진설명이 이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이때만 해도 경주에는 동아일보 함종혁, 한국일보 우병익, 조선일보 황인석, 대한일보 우동선, 대구매일 김상두, KBS 대구지국 손원조, 포항MBC 권오신 기자 등의 많은 기자가 경주 문화재 발견 전문기자로 활동했다. 석당 최남주에 의해 일제 강점기부터 추적해왔던 신라 화랑도 세속오계 계율을 지은 주인공 원광법사(圓光法師, 542-640)부도는 이렇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복원된 원광법사3층부도탑 앞에 모인 최정필 한국박물관문화재단 이사장, 최정대 코리아 타임스 칼럼리스트, 최정표 서라벌문화재연구원 이사, 최정간 차문화연구가
 

금곡사가는 길

석당은 일제강점기 때 화랑들이 하늘에 맹세한 내용의 글귀가 적힌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을 발견한 이후 신라 화랑들의 유적지 답사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중에서도 원광법사의 부도와 관련된 유적지 발견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석당은 신라불교문화 최고의 사료인 <삼국유사 권제4 원광서학조(卷第四 圓光西學條)>의 기록을 주목했다. 삼국유사에 “원광의 나이 80여세로 정관(貞觀, 627-649)년간에 입적하였고 부도는 삼기산(三岐山) 금곡사(金谷寺)에 있다, 지금 안강(安康)의 서남쪽 골짜기다. 또한 명활산 서쪽이다.”라는 기록이었다.
 
위 기록을 추적하여 삼기산 금곡사를 찾는데 주력했다. <여지승람>과 <동경지> 산천조에 삼기산을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뜻밖의 발견을 하였으니 ‘비장산(臂長山) 재부 서삼십리 금곡사 주산야(在府西 三十里 金谷寺 主山也)’라는 기록을 보고 삼기산의 다른 이름이 비장산이란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수이전>에 의하면 원광법사가 금곡사에서 입산수행 중일 때 여우귀신이 자주 나타나 자신에게 팔뚝을 보여주었다고 해서 팔뚝 비자를 사용해 ‘비장산’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처럼 삼기산이 비장산, 금곡산 등으로 이름이 바뀌어 불리게 된 것이었다.

1939년 석당은 안강 지역의 고노(古老)들에게 금곡산 금곡사의 위치를 탐문한 끝에 금곡사 답사 계획을 세웠다. 이때 마침 석당의 지기이자 미술사학자인 우현 고유섭이 경주를 방문하여 석당과 몇일 동안 신라문화유산들을 답사했다. 석당은 금곡사지의 원광법사부도가 현존하는지 함께 답사할 것을 권유했다.
 
우현은 이 때 ‘조선탑파연구’의 집필을 구상할 때라 한국 최초의 부도인 원광법사부도 유적 답사에 큰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마침 초여름이라 우현은 답사 출발 전날 밤 음식을 잘못 먹어서인지 출발 당일 복통이 심하여 답사를 후일로 기약했다. 그 후 우현은 원광법사부도 답사를 끝내 하지 못했고 1944년 서방정토로 떠나버렸다.

2022년 가을에 원광법사3층부도탑을 답사하며
1970년 8월 석당은 그동안 미루어왔던 금곡사지 원광법사부도를 찾아 당시 대학생이었던 넷째 아들 최정표, 정영호 교수와 동행하여 기차로 동해선 사방역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다시 산길로 30여리 길을 걸었다. 8월 이글거리는 태양은 산행하는 이들을 온통 땀으로 흠뻑 젖게 만들었다.
 
심산유곡 험준한 산골을 장시간 가다보니 마침내 그토록 소망하던 금곡산 산골짜기 중앙 도달하여 역사가 깊은 유적지가 위치한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국보급 원광법사부도가 어느 정도 파괴된 채였지만 천년의 세월을 견디며 반갑게 맞이한 것이었다. 부도탑의 1층 탑신의 높이가 86cm 폭이 87cm으로 사면이 아치형으로 되어있었으며, 특이한 문양을 한 감실과 이중으로 된 연화대 위 석가여래좌상이 광배와 함께 힘차게 사방불로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었다. 한국부도양식에 3층 승탑으로된 최고의 석조예술이었다.

지난 9월 28일 석당의 아들 최정필 한국 박물관 문화재단 이사장, 최정표 서라벌문화재연구원 이사, 최정대 코리아타임즈 칼럼리스트, 최정간 차문화 연구가 네 형제는 오랜만에 석당의 향기가 묻어있는 금곡사지를 답사하며 옛 추억에 스며들었다. 네 형제는 복원된 원광법사 3층 부도탑에 합장배례를 드렸다. 금곡사를 지키고 있는 청운 주지스님과 반세기 전 석당선생의 원광법사부도 발견에 관한 추억담을 나누었다.
 
서라벌신문 기자 / 2022년 10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