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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년 신라성덕왕릉 도굴미수 사건 -

含閒 2022. 11. 26. 13:46
서라벌의 매월당
서라벌에 깃든 석당(石堂) 최남주의 향기 따라
서라벌신문 기자 / 2022년 1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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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년 신라성덕왕릉 도굴미수 사건 -
 
   
현암 최정간
매월다암원장, 차문화 연구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석당은 평생을 경주의 신라문화유산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돌봤다. 자신의 이러한 삶을 ‘주어진 운명을 체념할 수 없어서 걸어온 길을 걸어왔을 뿐 뭐 다른 할 말이 있겠냐.’고 담담하게 얘기했다. 1969년 미국의 평화봉사단원으로 경주에 체류하면서 석당으로부터 신라문화사를 지도받은 ‘데이비드 쿠비악’은 다음과 같은 석당의 신라문화유산 사랑에 대한 글을 외국 동호인들을 위해 영문으로 기고했다.
“진심으로 신라문화유산 발굴에 헌신해온 그(석당)는 영속적인 꿈의 실현을 위하여 그의 생애를 바쳤다. …언젠가 경주가 신라 천년의 왕도인 경주로서 경주의 정당한 지위를 세계의 다른 위대한 문화유산의 중심 곁으로 지향하게 되기를….” ‘데이비드 쿠비악’의 글처럼 마침내 경주는 1995년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의 도시로 지정되었다.
경주가 세계문화유산의 도시로 지정되기까지는 여명기에 석당 같은 경주신라문화유산 지킴이가 있었기에 가능하였으리라 생각된다.

도굴범의 마수로부터 보호된 성덕왕릉 유물들
1935년 6월 26일자 부산일보 기사에 의하면 신라 성덕왕릉이 도굴범으로부터 도굴 직전 신라고적보존회 최남주에 의해 발견되어 미수에 그치게 되었다고 크게 보도되었다.
석당은 1935년 6월 19일 아침 경주시 조양동산 8번지 소재 신라 33대 성덕왕릉 경내를 답사 중에 왕릉 내부까지 도굴범들의 마수가 뻗혀진 사실을 발견하고 즉각 경찰서로 달려가 신고를 했다. 성덕왕릉은 신라가 삼국통일직후 최초로 석조 입상의 십이지신상을 설치한 훌륭한 능묘양식이다.
당시 현장은 능묘 호석을 무너뜨리고 왕릉의 중심부까지 파들어 간 상황이었다. 조금만 더 파고 들어갔으면 통일신라직후 귀중한 황금보관과 유물들이 도굴범 손아귀를 거쳐 일본으로 밀반출이 되었을 것이다. 성덕왕릉 도굴 사실이 알려지자 경찰은 경주시내를 수색하였으나 도굴범들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석당의 무더운 초여름 아침 성덕왕릉 답사가 아니었다면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황금시대를 구가했던 성덕왕릉의 귀중한 유물들이 도굴되어 사라질 뻔한 것이다.
이처럼 석당은 일제강점기부터 신라문화유산들이 도굴범들에 의해 파괴되고 국외로 반출되는 것을 지키는데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문화유산을 조선 땅에 지키고 있는 것이야말로 미래의 독립된 조국의 재건에 있어서 정신적 바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기에, 독립을 향한 투쟁의 또 다른 길이자 사명이라 믿었던 것이다. 석당은 1935년 11월 성덕왕릉 부근에서 비편 2개를 발견하여 경주박물관에서 소장할 수 있게 하였다.

 
 
신라33대 성덕왕릉. 일제강점기 석당 최남주에 의해 도굴이 미연에 방지될 수 있었다,
 

해방 후에도 계속되는 도굴 시도에 대한 경계

석당은 조국이 해방된 이후에도 순수 민간단체인 경주고적보존회를 조직하여 경주 신라문화유산 보호와 보존에 앞장서왔다. 경주 외곽의 왕릉을 비롯한 석조 예술과 고분들이 도굴꾼들의 먹잇감이 되는 것을 발로 뛰어다니며 미연에 방지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잊을 수 없는 사건은 국보 39호인 현곡면 나원리 소재의 오층신라석탑 도굴을 미연에 방지한 것이다. 1969년 9월 13일 석당은 불국사 석가탑이 도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원리 오층석탑을 답사하고 도굴 유무를 확인했다. 석탑의 3층 아랫부분과 4층 옥개 아랫부분이 주먹만큼 깨져있었다. 특히 4층에는 석탑의 옥개석을 들 수 있는 ‘재키’가 있어, 도굴범들이 ‘재키’를 통해 석탑 사리공 안의 유물을 훔쳐가려 했던 것이다. 나원리 신라 오층석탑 도굴 미수에 대한 뉴스는 1969년 9월 14일자 한국일보를 비롯한 국내 일간지에 대서특필이 되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1996년 나원리 오층석탑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해체보수작업에 들어갔다. 이 때 국보급의 사리장엄구들이 수습되었다. 서기 8세기경 통일신라시대 금속공예사와 불교사상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유물들이었다. 1969년 석당에 의해 나원리 오층석탑이 지켜지지 않았다면 이 같은 유물들도 우리 곁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서라벌신문 기자 / 2022년 11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