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이 내건 통합과 실용의 가치
그 깃발은 누군가가 이어가야 한다
돋보인 반응도 있었다. 안 전 지사의 트위터 지지자 그룹 ‘팀스틸버드(@TeamSteelBird)’의 지지 철회 선언문은 품격 있었다. 이들은 “보편적 인권을 말하는 안희정을 지지했다. 민주주의 절차와 시스템을 중시하는 그를 믿었다. 그러나 그의 철학과 가치는 모두 허위임이 명백해졌다”며 “이번 사건에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곁에 서겠다”고 선언했다.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을 견지하면서 정치인과 지지자의 관계가 맹목적인 편 들기가 아닌 가치공동체여야 함을 여실히 보여 줬다. 한데 너무 나간 부분이 있다. 이들은 “윤리가 결여된 예술가의 작품은 가치가 없다”는 미투 지지자들의 일반론에 기대 “마찬가지로 가해자의 정치철학은 더 이상 우리에게 의미가 없다”고 표현했다. 정치인이 지향하는 가치가 특정 개인의 전유물일 수는 없다. 가해자가 페미니스트의 탈을 썼다고 해서 페미니즘의 가치마저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정치인 안희정이 폭넓은 지지를 받았던 건 그가 내세웠던 통합과 실용의 가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안희정 민주당 후보가 충남지사에 당선되고 인수위가 꾸려지자 도청 간부들에 대한 익명의 투서가 난무했다. 그때까지 민선 충남지사는 심대평(자유민주연합)·이완구(한나라당) 전 지사였다. 보수에서 진보로 지방권력이 처음으로 바뀌었으니 ‘적폐’가 얼마나 많았겠는가. 하지만 안희정 당선자는 “투서는 안 보시는 게 좋겠다”는 조승래 당시 비서실장(현 민주당 의원)의 권고를 따랐고 투서는 모두 폐기됐다. 덕분에 공무원의 동요를 최소화하면서 잡음 없이 도정을 인수할 수 있었다. 친노(親盧)계 핵심이었지만 계파와는 거리를 뒀다. 2015년 4대강으로 여야가 격돌하고 있음에도 4대강 보에서 물을 끌어와 가뭄을 해소하는 실용의 정치를 보여 줬다. 지난해 대선 출마를 선언할 때는 정파를 초월한 통합을 강조했다.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 등 전직 경제관료들이 ‘손 내미는 진보’를 내걸고 민주당 경선에 뛰어든 안 후보에게 주목했던 것도 통합과 실용의 가치를 높이 샀기 때문이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됐지만 개국공신인 안 전 지사는 1년 뒤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법정에 섰다. 그는 최후진술에서 “저를 무겁게 처벌해 주셔서 승리자도 법과 정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증명해 달라”고 했다. 이번 사건도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민주주의 절차와 시스템에 따라 법정에서 사실이 규명되고 응당한 죗값이 매겨질 것이다. 그렇지만 ‘안희정 쇼크’ 때문에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시대정신마저 쓰레기통에 버려서는 안 된다. 막스 베버는 “모든 희망의 좌절조차 견디어 낼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의지를 갖추고 그 어떤 상황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갖고 있다”고 했다. 안 전 지사를 대선 주자급으로 만들었던 통합과 실용의 깃발을 누군가는 이어받아 ‘열정과 균형감각으로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뚫어야’ 한다. 그게 바로 베버가 말한 정치다.
서경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