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야기

[스크랩] 國立顯忠院안의 銅雀陵 이야기

含閒 2017. 11. 24. 15:46

 

 

國立顯忠院안의 銅雀陵 이야기

 

 
昌嬪 安씨의 銅雀陵
 

 
창빈안씨 신도비

 

한강을 안은 공작… 묘역 전체에 길한 기운

흔히 동작동 국립묘지를 이승만 대통령의 명으로 1950년대 초에 터 잡기가 이루어진 곳이라고 소개하지만, 이곳에는 이미 450년 전 ‘동작릉’이 있었다. 동작릉의 원래 주인은 TV 사극 ‘여인천하’에도 등장한 창빈 안씨(昌嬪安氏, 1499~1549)다.

창빈은 조선 11대 임금 중종의 후궁으로 중종과의 사이에 2남1녀를 두었다. 둘째 아들이 덕흥군이고, 덕흥군의 막내아들 하성군(河城君)이 훗날 선조 임금이다.


이와 관련해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1549년 10월 창빈이 죽자 처음에는 경기도 양주 장흥 땅에 모셨다. 그러나 터가 좋지 않아 이듬해에 서울 동작동으로 이장하고 능의 이름을 동작릉(銅雀陵)이라 불렀다. 이곳 동작릉에 창빈을 안장한 뒤 덕흥군은 막내아들 하성군을 얻었다(1552년). 당시 임금은 문정왕후 소생인 명종. 아들이 없었던 명종은 조카들 가운데 하성군을 특히 총애해 궁궐에 자주 불렀다. 명종이 붕어하자 하성군이 그 뒤를 잇게 되는데 바로 선조 임금이다(1567년). 이렇게 후궁의 막내 손자가 임금이 되자, 동작릉의 명당발복 때문이라는 소문이 난 것이다.


실제 창빈이 묻힌 동작릉은 풍수적으로 좋은 땅일까?

동작릉을 찾아가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국립묘지 정문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 묘소로 가면 왼쪽에 비교적 넓은 주차공간이 나오는데, 그곳에 ‘창빈 안씨’ 묘소를 알리는 안내표지와 창빈 안씨의 신도비가 보인다. 신도비에서 20m쯤 올라가면 곡장(曲牆)이 둘러처진 창빈 안씨의 무덤이 단아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동작동 국립묘지의 가운데에 위치한 창빈 안씨의 무덤은 풍수에서 말하는 혈처(穴處)다. 정문에서 이곳을 바라보면 주변을 감싸고 있는 산들이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펼친 모습이다. 동작릉은 바로 그 날개 속에 감싸인 알의 형상이다. 동작(銅雀)이란 위나라 조조가 구리로 만든 봉황새를 옥상에 올려두었다는 동작대(銅雀臺)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동작이란 곧 봉황을 의미한다. 지형지세를 사물의 형세에 비유해 표현하는 것을 물형론(형국론)이라고 한다. 이곳을 물형론에 대입해보면 봉황포란형(鳳凰抱卵形)의 땅이다.

 

창빈 안씨 무덤 뒤로 이어지는 산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내각 수반, 장관, 유명인사, 장군들이 안장된 작은 산봉우리가 하나 있다. 동작동 국립묘역에서 창빈 안씨 무덤 다음으로 좋은 지기가 뭉쳐 있는 곳이다. 동작릉과 이곳을 중심으로 좌우와 앞쪽으로 수많은 애국자들의 무덤들이 늘어서 있다.
 

 

이곳은 조선 11대 왕인 중종의 후궁이자 선조의 할머니인 창빈안씨(1499∼1549) 묘가 있어 동작릉이라 불린다. 동작구와 동작동의 지명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본래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 원은 세자와 세자비 그리고 아들이 왕위에 오른 후궁의 무덤이다. 후궁의 무덤은 그냥 묘라고 한다. 그런데 창빈안씨 묘는 동작릉이라고 높여 불렀다. 그 이유는 손자인 선조(1552∼1608)가 14대 왕에 오른 후 마지막 왕인 27대 순종(1874∼1926)까지 그 후손들이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창빈안씨는 본관이 안산이며 시흥에서 태어나 9살에 궁녀로 들어갔다. 생김새가 단정하고 행동이 정숙했다고 한다. 중종의 모후인 정현대비의 눈에 들어 중종의 후궁이 되었고 종3품인 숙용에 이르렀다. 그녀는 중종과의 사이에 2남 1녀를 낳았다. 큰아들 영양군은 장가를 들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둘째는 덕흥군 초로 3남 1녀를 두었다. 그중 셋째가 하성군 균으로 임금이 되자 아버지 덕흥군은 덕흥대원군으로 할머니는 정1품인 빈(창빈)으로 추존되었다. 참고로 왕비는 품계가 없지만 후궁들은 종4품부터 정1품까지 품계가 있었다. 정1품(빈), 종1품(귀인), 정2품(소의), 종2품(숙의), 정3품(소용), 종3품(숙용), 정4품(소원), 종4품(숙원)이다. 그 이하 정5품 상궁부터는 궁중내의 일을 도맡아하는 나인들이다.

 

창빈안씨는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궁궐을 떠나 중이 되려고 하였다. 그러나 문정왕후의 특명으로 궁중에 머물다가 명종 4년(1549) 세상을 떠났다. 처음은 경기도 양주군 장흥에 장사 지냈다가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이듬해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다. 그 뒤 발복이 시작되었다. 중종은 9명의 부인(왕비3, 후궁6)에게서 9남 11녀의 자녀를 낳았다. 이중 창빈안씨는 6번째이고 그녀가 낳은 덕흥군은 중종의 아홉 번째 아들이다. 선조는 할머니와 아버지 서열로는 왕위를 물려받을 입장이 아니었다. 그런데 기회가 주어졌다.

 

중종의 장남 인종(장경왕후 윤씨 소생)은 왕위에 오른 지 9개월 만에 자녀를 남기지 않고 죽었다. 그 후임으로 중종의 차남 명종(문정왕후 윤씨 소생)이 즉위하여 22년 동안 통치하였다. 그는 인순왕후 심씨 사이에서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13세 어린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성품이 어질었던 명종은 비록 배는 다르지만 조카들을 좋아하였다. 그중 하성군을 각별히 좋아하여 자주 곁으로 불렀다고 한다.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인순왕후는 하성군을 양자로 받아들여 왕위를 물려주었다. 후궁 소생으로는 처음 왕이 된 것이다.


이곳의 산세는 관악산(632m)에서 비롯되었다. 최고봉인 연주봉에서 북쪽으로 갈라져 나온 맥이 남현동 고개를 지나 까치산공원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사당아파트와 상도중학교, 상현중학교가 있는 능선을 따라 국립서울현충원의 주산인 동작봉(174.8m)으로 이어진다. 동작이란 산세가 공작이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이고, 이 일대의 돌 색깔이 구리 빛을 띤 것이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작봉에서 좌우로 뻗은 능선은 병풍을 치듯 묘역 전체를 감싸고 있다. 앞에는 한강이 흐르고 있어 배산임수의 지형을 이루었다.


창빈안씨 묘의 주룡은 동작봉에서 우측 두 번째 봉우리에서 내려왔다. 첫 번째 봉우리 아래에는 박정희 대통령 묘가 있으며 이곳 주룡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주룡의 맥은 크게 과협 한 다음 장군제1묘역이 있는 봉우리를 세웠다. 귀인처럼 단정하게 생겼으며 현무봉이다. 이 중심 맥은 북쪽으로 내려가는데 그 끝자락에 창빈안씨 묘가 있다. 이곳을 중심으로 내청룡 자락에는 이승만 대통령 묘가 있고, 우백호에는 김대중 대통령 묘가 있다. 김영삼 대통령 묘는 외청룡에 해당되는 곳에 있다. 그러므로 동작릉이 정혈이고 나머지 묘의 능선들은 이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고 풍수를 보는 지관들은 말한다


ㅇ옮겨온 글ㅇ

 

출처 : 演好마을
글쓴이 : 설봉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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