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스크랩] 나태주시인 시모음

含閒 2017. 11. 3. 17:00

결혼  /  나태주 

외로운
별 하나가
역시
외로운 별 하나와
만났다.

세상에 빛나는 별
두 개가 생겼다.

언제나 춥고
쓸쓸한 여자,
사내 옆에 서서
오늘은
따뜻해 보인다.


(나태주·시인,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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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립다  /  나태주

쓸쓸한 사람,
가을에
더욱 호젓하다

맑은 눈빛,
가을에
더욱 그윽하다

그대 안경알 너머
가을꽃 진자리

무더기, 무더기
문득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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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1  / 나태주

 

다시 한 번만 사랑하고

다시 한 번만 죄를 짓고

다시 한 번만 용서를 받자

 

그래서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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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아 안녕  /  나태주

 

꽃들에게 인사할 때

꽃들아 안녕!

 

전체 꽃들에게

한꺼번에 인사를

해서는 안 된다

 

꽃송이 하나하나에게

눈을 맞추며

꽃들아 안녕! 안녕!

 

그렇게 인사함이

백번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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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는 전화 / 나태주

살아서 숨 쉬는
사람인 것만으로도 좋아요

그럼요. 그럼요.
거기 계신 것만으로도 참 좋아요

그럼요. 그럼요.
오늘은 전화를 다 주셨군요.

배꽃 필 때 배꽃 보러
멀리 한번 길 떠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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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사람  /  나태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슬퍼할 일을 마땅히 슬퍼하고

괴로워할 일을 마땅히 괴로워하는 사람

 

남의 앞에 섰을 때

교만하지 않고

남의 뒤에 섰을 때

비굴하지 않은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미워할 것을 마땅히 미워하고

사랑할 것을 마땅히 사랑하는

그저 보통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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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산 단풍  /  나태주
  
내일이면 헤어질 사람과
와서 보시오,

내일이면 잊혀질 사람과
함께 보시오,

왼 산이 통째로 살아서
가쁜 숨 몰아쉬는 모습을.

다 못 타는 이 여자의
슬픔을 ….
(나태주·시인,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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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두고  /  나태주

 

세상에 와서

내가 하는 말 가운데서

가장 고운 말을

너에게 들려주고 싶다

 

세상에 와서

내가 가진 생각 가운데서

가장 예쁜 생각을

너에게 주고 싶다

 

세상에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표정 가운데

가장 좋은 표정을

너에게 보이고 싶다

 

이것이 내가 너를

사랑하는 진정한 이유

나 스스로 네 앞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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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세상  /  나태주

멀리서 보면 때로 세상은
조그맣고 사랑스럽다
따뜻하기까지 하다

나는 손을 들어
세상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자다가 깨어난 아이처럼
세상은 배시시 눈을 뜨고
나를 향해 웃음 지어 보인다.

세상도 눈이 부신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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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 나태주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몰라도 된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오로지 나의 것이요

나의 그리움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도 차고 넘치니까

나는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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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 / 나태주

너무 멀리 가지는 말아라.
사랑아

목소리 들리는 곳 까지만 가거라.
돌아오는 길 잊을까 걱정이다
사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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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법  /  나태주

 

그리운 날은 그림을 그리고

쓸쓸한 날은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도 남는 날은

너를 생각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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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답함  / 나태주

 

예쁘지 않은 것을 예쁘게

보아주는 것이 사랑이다

 

좋지않은 것을 좋게

생각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싫은 것도 잘 참아주면서

처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중까지 아주 나중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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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  나태주

 

하늘 아래 내가 받은

가장 큰 선물은

오늘입니다.

 

오늘 받은 선물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당신입니다.

 

당신 나지막한 몫리와

웃는 얼굴 콧노래 한 구절이면

한아름 바다를 안은 듯한 기쁨이겠습니다.

 

 

 

비단강

-나태주

 

비단강이 비단강임은

많은 강을 돌아보고 나서야

비로소 알겠습디다

 

그대가 내게 소중한 사람임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겠습디다

 

백 년을 가는

사람 목숨이 어디 있으며

오십 년을 가는

사람 사랑이 어디 있으랴……

 

오늘도 나는

강가를 지나며

되뇌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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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태주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 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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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끼지 마세요  /  나태주

 

좋은 것 아끼지 마세요

옷장 속에 들어 있는 새로운 옷 예쁜 옷

잔칫날 간다고 결혼식장 간다고

아끼지 마세요

그러다 그러다가 철 지나면 헌옷 되지요

 

마음 또한 아끼지 마세요

마음속에 들어 있는 사랑스런 마음 그리운 마음

정말로 좋은 사람 생기면 준다고

아끼지 마세요

그러다 그러다가 마음의 물기 마르면 노인이 되지요

 

좋은 옷 있으면 생각날 때 입고

좋은 음식 있으면 먹고 싶은 때 먹고

좋은 음악 있으면 듣고 싶은 때 들으세요

더구나 좋은 사람 있으면

마음 속에 숨겨두지 말고

마음껏 좋아하고 마음껏 그리워하세요

 

그리하여 때로는 얼굴 붉힐 일

눈물 글썽일 일 있다한들

그게 무슨 대수겠어요!

지금도 그대 앞에 꽃이 있고

좋은 사람이 있지 않나요

그 꽃을 마음껏 좋아하고

그 사람을 마음껏 그리워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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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사람  /  나태주

 

아름다운 사람

눈을 둘 곳이 없다

바라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니 바라볼 수도 없고

그저 눈이

부시기만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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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 / 나태주

오래
보고 싶었다.

오래
만나지 못했다

잘 있노라니
그것만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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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 나태주

여자라는 나무를
가슴 안에 숨겨서
키우는 날부터

남자는
몸이 야위어간다

어떤 여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남자는 세상에서 다시 한 번
태어나는 목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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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  /  나태주

집에 밥이 있어도 나는
아내 없으면 밥 안 먹는 사람

내가 데려다 주지 않으면 아내는
서울 딸네 집에도 못 가는 사람

우리는 이렇게 함께 살면서
반편이 인간으로 완성되고 말았다.


(나태주·시인,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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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   /  나태주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지
비어 있는 나의 잔
다 알아서 주시는 분이 계시는데
투정을 부리지 말아야지
나의 자리 낮음과
가난함과
나약함과
무능함
괜찮다 괜찮다
고개 끄득여 주시는 분이 계시는데.
(나태주·시인,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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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  나태주

 

좋다.
좋다고 하니까

나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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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나태주

하루의 좋은 시간을
다른 곳에 다 써 먹고

창문에 어둠 깃들어서야
그댈 생각해 낸다.

그댈 생각하고
그대에게 편지를 쓴다.

너무 섭섭히 생각 마시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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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1 /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25년째 서울 광화문 교보생명 본사 외벽을 장식해온 '광화문 글판’에서 시민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시구(詩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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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2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게 되면
연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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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3   /   나태주

기죽지 말고 살아봐
꽃 피워봐
참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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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 나태주

저녁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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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 연습  /  나태주

텃밭에 아무 것도 심지 않기로 했다
텃밭에 나가 땀 흘려 수고하는 대신
낮잠이나 자 두기로 하고
흰 구름이나 보고 새소리나 듣기로 했다

내가 텃밭을 돌보지 않는 사이
이런 저런 풀들이 찾아와 살았다
각시풀, 쇠비름, 참비름, 강아지풀,
더러는 채송화 꽃 두어 송이
잡풀들 사이에 끼어 얼굴을 내밀었다
흥, 꽃들이 오히려 잡풀들 사이에 끼어
잡풀 행세를 하러드는군

어느 날 보니 텃밭에
통통통 뛰어노는 놈들이 있었다
메뚜기였다 연초록 빛
방아깨비, 콩메뚜기, 풀무치 어린 새끼들도 보였다
하, 이 녀석들은 어디서부터 찾아온 진객(珍客)들일까

내가 텃밭을 돌보지 않는 사이
하늘의 식솔들이 내려와
내 대신 이들을 돌보아 주신 모양이다
해와 달과 별들이 번갈아 이들을 받들어
가꾸어 주신 모양이다

아예 나는 텃밭을 하늘의
식솔들에게 빌려주기로 했다
그 대신 가끔 가야금이든
바이올린이든 함께 듣기로 했다.


(나태주·시인, 1945-)
* 진객(珍客): 귀한 손님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

-나태주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

사랑한다는 말

차마 건네지 못하고 삽니다

사랑한다는 그 말 끝까지

감당할 수 없기 때문

 

모진 마음

내게 있어도

모진 말

차마 하지 못하고 삽니다

나도 모진 말 남들한테 들으면

오래오래 잊혀지지 않기 때문

 

외롭고 슬픈 마음

내게 있어도

외롭고 슬프다는 말

차마 하지 못하고 삽니다

외롭고 슬픈 말 남들한테 들으면

나도 덩달아 외롭고 슬퍼지기 때문

 

사랑하는 마음을 아끼며

삽니다

모진 마음을 달래며

삽니다

될수록 외롭고 슬픈 마음을

숨기며 삽니다.




멀리까지 보이는 날

-나태주

 

숨을 들이쉰다

초록의 들판 끝 미루나무

한 그루가 끌려들어온다

 

숨을 더욱 깊이 들이쉰다

미루나무 잎새에 반짝이는

햇빛이 들어오고 사르락 사르락

작은 바다 물결 소리까지

끌려들어온다

 

숨을 내어쉰다

뻐꾸기 울음 소리

꾀꼬리 울음 소리가

쓸려나아간다

 

숨을 더욱 멀리 내어쉰다

마을 하나 비 맞아 우거진

봉숭아꽃나무 수풀까지

쓸려 나아가고 조그만 산 하나

우뚝 다가와 선다

 

산 위에 두둥실 떠 있는

흰구름, 저 녀석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몸 안에서

뛰어 놀던 바로 그 숨결이다.



 

별처럼 꽃처럼

 

별처럼 꽃처럼 하늘에 달과 해처럼

아아, 바람에 흔들리는 조그만 나뭇잎처럼

곱게곱게 숨을 쉬며 고운 세상 살다가리니

나는 너의 바람막이 팔을 벌려 예 섰으마

 

많은 걸 알지

많은 걸 알지 않아도 부끄러움이 없고

여러 곳을 돌아보지 않아도 목마름이 없다면

얼마든지 고운 세상을 살 수 있는 일이다

아무한테도 상처 받지 않고 비웃음 당하지 않고

 

꽃 피는 전화

 

살아서 숨쉬는 사람인

것만으로도 좋아요

그럼요 그럼요

거기 계신 것만으로도 참 좋아요

그럼요 그럼요

오늘은 전화를 다 주셨군요

배꽃 필 때 배꽃 보러

멀리 한번 길 떠나겠습니다


☞ 나태주 시인 약력
* 1945년 충남 서천 출생.
* 1963년 공주사범학교 졸업.
* 초등학교 교사로 43년 동안 일하다가 정년퇴임.
*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당선.
* 시집 『대숲 아래서』외 여러 권.
* 공주문화원 원장

출처 : 강물의누리영상
글쓴이 : kangmue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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