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관련(高尔夫球關聯)

우승컵 대신 안고가는 건… 겸허함

含閒 2013. 8. 6. 14:17

우승컵 대신 안고가는 건… 겸허함

 

입력 : 2013.08.06 03:01 | 수정 : 2013.08.06 03:56

[세인트 앤드루스(영국) 민학수 기자]

불운 탓하거나 핑계 대지 않은 세계 랭킹 1·4위… 성숙한 태도에 팬들은 큰 박수

-그랜드슬램 놓친 박인비
"이번 대회에서 매 순간 평생에 다시 오기 힘든 값진 경험을 했다"
-마지막 두 홀서 2위로 밀린 최나연
"모든 상황의 샷에 직면하는 브리티시오픈… 많은 것 배워간다"

올드 코스의 마지막 18번홀(파4) 그린을 향해 걸어가는 박인비(25)의 표정은 이번 대회 들어 가장 편안해 보였다. 언제 이렇게 나쁜 성적을 올렸는지 기억하기 힘들 정도의 스코어(6오버파)였지만 결과야 어떻든 온 세계가 그녀만을 바라보는 듯한 중압감에서 마침내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팬들은 위대한 도전을 마치는 박인비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그녀는 "다시 오기 힘들 훌륭한 경험을 했고, 마침내 끝나서 기쁘다"고 말했다.

5일 오전(한국 시각) 스코틀랜드 세인트 앤드루스의 올드 코스(파72·6672야드)에서 막을 내린 브리티시 여자오픈. 이번 대회는 강풍으로 3라운드가 지연돼 마지막 날 대부분 선수가 3·4라운드를 함께 치렀다.

박인비가 도전했던 프로골프 사상 초유의 그랜드슬램(한 시즌 4개 메이저대회 연속 우승)은 이뤄지지 않았다. 선두에 9타 뒤진 채 4라운드를 맞았던 박인비는 버디 2개, 보기 6개, 더블보기 1개를 기록하며 6타를 잃어 최종 합계 6오버파 294타로 공동 42위에 머물렀다. 퍼팅이 최고의 장기인 박인비는 강풍에도 플레이할 수 있게 느리게 세팅한 올드 코스의 그린에서 최악의 퍼트 수를 기록했다. 1라운드 30개였던 퍼트 수는 2라운드 37개, 3라운드 36개, 4라운드 40개로 치솟았다. 4라운드에선 1번홀(파4)부터 4퍼트를 하며 무너졌다.

또 박인비 대신 우승을 차지해 '코리안 슬램(Korean Slam·한국 선수의 올 시즌 4연속 메이저 대회 우승)'을 이룰 것 같았던 최나연(26)의 도전도 마지막 순간 어긋났다.

12번홀까지 3타차 선두를 달렸던 최나연은 마지막 6홀에서 3타를 잃으며 박희영(26)과 나란히 공동 2위(6언더파)로 대회를 마쳤다.

박인비가 여자 골프를 휩쓸면서 세계 랭킹 1위에서 밀려났던 스테이시 루이스(28·미국)가 17·18번홀에서 연속 버디를 잡으며 최종 합계 8언더파 280타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루이스는 40만4000달러(약 4억5000만원)의 우승 상금을 받았다. 올 시즌 세 번째 우승이자 통산 8승째였다. 루이스는 척추측만증을 이겨낸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다. 그녀의 허리엔 알루미늄 나사못 5개가 박혀 있다.

루이스는 "박인비가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어려웠을지 잘 안다"며 "인비 역시 사람"이라고 했다. 세계 랭킹에서는 박인비가 12.91점으로 17주 연속 1위를 지켰고, 루이스가 9.74점으로 지난주보다 점수차를 약간 줄이며 2위를 달렸다.


	박인비(왼쪽)와 최나연.
/뉴스1·AP
작년 US여자오픈(최나연)부터 브리티시여자오픈(신지애), 올해 나비스코챔피언십·LPGA챔피언십·US여자오픈(이상 박인비)으로 이어지던 한국 선수의 메이저 대회 연속 우승 기록은 5연승에서 멈췄다.

절친한 친구인 박인비와 최나연은 이번 대회에서 우승컵과 인연을 맺지 못했지만 불운을 탓하거나 핑계대지 않는 성숙한 태도를 보여 팬들과 미디어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지난달 매뉴라이프 클래식에서 통산 2승째를 올렸던 박희영도 안정감 있는 플레이로 공동 2위를 차지하며 상승세를 유지했다.

박인비가 마지막 홀을 마치자 BBC와 ESPN 등 수많은 국내외 미디어가 모여들었다. 그녀는 특유의 엷은 미소를 지으며 "6오버파를 치고도 인터뷰하는 게 이상하지만 이번 대회에서 매 순간 평생에 도움이 될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올드 코스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엄청나게 많은 인터뷰를 하면서도 짜증 대신 웃음 띤 얼굴로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밝혔다. "브리티시여자오픈에서 우승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는 걸 느꼈다. 이번엔 바람이 나를 돕지 않았지만 다음에는 그럴 날이 꼭 올 것"이라고 했다.

대회를 마치고 귀국하는 그녀는 "아무것도 안 하고 푹 쉬면서 다음 대회를 위한 에너지를 충전하고 싶다"며 "여기서 얻은 값진 경험이 골프 인생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올해 아직 우승컵을 들지 못하고 있는 최나연은 "스테이시 루이스가 더 잘 쳤기 때문에 우승한 것"이라며 "모든 상황의 샷에 직면하게 되는 브리티시여자오픈에 참가할 때마다 많은 것을 배워간다"고 말했다.

지난 2년간 가정교사를 두고 영어 공부를 했던 그녀는 통역 없이도 능숙하게 영어 인터뷰를 했다. 최나연은 "미 LPGA 투어에 진출하기 전만 해도 영어로 한마디도 못 했는데 의사 소통이 잘 되니 투어 생활에도 더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다.

한국 여자 골프와 세계 여자 골프의 주축을 이루는 '세리 키즈'가 골프 실력을 포함해 인간적인 면모에서도 한층 더 성숙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