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산책(漢詩散步)

단가행(短歌行)

含閒 2013. 7. 16. 17:12

"달은 밝고 별은 드문데 까막까치 남으로 날다 !"

조조(曹操)

(서기 155년 6월 3일 ~ 220년 1월 23일)는

중국(中國) 후한(後漢) 말기의 정치가(政治家)이자, 군인(軍人)이며 시인(詩人)이기도 하다.
자는 맹덕(孟德)이며,

 

훗날 후한(後漢)이 막을내리고 위(魏)가 건국된 이후 추증된 묘호는 태조(太祖)이고 시호는 무황제(武皇帝)로
후한(後漢)이 그 힘을 잃어가던 시기에 나타나

비상(非常)하고 탁월한 재능(才能)으로 두각을 드러내,
여러 제후(諸侯)들을 연달아 격파하고 중국대륙의 대부분을 통일하여

위(魏)나라가 세워질 수 있는 기틀을 닦아놓은 인물이 바로 그다.

 

조조(曹操)


조조(曹操)는 삼국지(三國志)의 여러 영웅들 가운데 패자(覇者)로 우뚝 솟은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는 평가와,
후한(後漢)을 멸망시킨 난세(亂世)의 간웅(奸雄)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권모술수(權謀術數)에 능한 악인(惡人)으로 저평가되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는 비록 환관(宦官)의 자손이라고는 하지만

신분의 벽을 넘어 오로지 자신의 실력으로 시대를 선도한 풍운아(風雲兒)라는
재평가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은 인물로 역사가들의 여려 평(評)이 엇갈리는 삼국시대의 중심인물이다.

조조(曹操)는 정치(政治)와 군사(軍事) 뿐만 아니라 문학(文學)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손자병법(孫子兵法) 전문(全文)에 남기는 주석(註釋)을 단 것도 그였으며
소박한 민요였던 악부(樂府)를 공식적인 문학의 한 장르로 정착시켰던것도 그였다.
그가 살았던 당시에도 최고 詩人의 한명으로 꼽히고 있었던 인물이며.
그의 작품(作品)이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지금 소개코저 하는 단가행(短歌行)을 비롯 구수수(龜雖壽) 등이 있고
그 외에도 노랫가사로 전해지는 작품도 여렀있었다고 한다.

조조는 군사(軍事), 학문(學文), 무예(武藝), 내정(內政)등 두루 탁월한 재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시문(詩文), 그림, 노래 등 풍류(風流)에도 매우 뛰어났던
예술(藝術)을 아는 멋쟁이로 삼국의 여러 통치자들 중 가장 실력이 출중했다.
또한 강력한 카리스마가 있어서 통솔력에서도 뛰어났으며.

수하 장수들을 감동시키는 방법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타고난 지도자였다.


또한 인격면에서도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냉정했으며,

당시에는 파격적인 기준으로 인재(人才)를 선발하였는데 그 기준이 바로 능력(能力)이었다.
어떠한 분야를 막론하고 한 가지 분야에 뛰어나기만 하면

그 사람의 신분이 아무리 천하다 해도 조조(曹操)는 크게 인정해줬으며
그를 가까이 맞아들였다.

하지만 가끔가다 측근들까지도 의심이 지나치기도 했다.
모개(毛?)와 최염(崔琰) 등의 간언(諫言)을 묵살했던 것을 뼈아픈 실수로 들 수 있으며
관도대전((官渡大戰) 당시 부하의 내통서류를 불태우면서 했던 말도 `나조차 두 생각을 하며 위태로웠다` 였다.
구석을 받아 위공(魏公)이 되려는 조조(曹操)에게 순욱(荀彧)은 대의명분(大義名分)에 어긋난다는 반발을 살 수가 있다는 취지에서
굳세게 간언(諫言)하였지만,
조조(曹操)는 옳게 여기지 않코 결국 그를 자결(自決)하게 만들기도 했다.

배송지(裴松之) 주(注)에 따르면
패왕지주(覇王支柱)는 남의 제사(祭祀)를 끊지 않는다.
효(孝)로 천하(天下)를 다스리는 자는 남의 어버이를 예우(禮遇)하는 것이다` 라는 말을 세기고
진궁(陳宮)의 남은 가족을 먹여살렸다고 적고 있다.
배송지(裴松之)는 동진시대(東晉時代) 문제(文帝)의 명을 받고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에 주석(註釋)을 단 것으로 유명한
동진(東晉) 말기부터 송(宋)나라 초기에 살았던 정치가(政治家)이다.
따라서 그는 나관중(羅貫中)의 소설(小說)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삼국지(三國志)에 주석(註釋)을 단 몇 안되는 인물이며,
간결했던 진수(陳壽)의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에 자료(資料)를 추가하고 살을 붙이고 생동감을 불어넣은 대단한 인물이다.

배송지(裴松之)는 덧붙이길...
조조(曹操)는 옛적 현명한 군주(君主)였던 주(周) 문왕(文王)을 본 받아 자신이 제위(帝位)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아들 조비(曹丕)에 이르러 자신이 지켜온 주공(主公)과 한실(漢室)을 떠받들었다는 명분같은 이미지를
조비(曹丕)가 이해하지 못하고 한실(漢室)의 제위(帝位)를 찬탈(簒奪)했으며
그 오명(汚名)이 조조일가(曹操一家)에 늘 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명분론(名分論)과 정통론(正統論)이

득세하던 서진(西晉) 이후에는

자식의 일로 인해 명성(名聲)이 더럽혀지기도 하였다.
소설(小說)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이르러서는
조조(曹操)를 일러 간교(奸巧)한 악인(惡人)의 표상(表象)으로 그려져,
수 많은 독자들에게 조조(曹操)의 이미지를 간교(奸巧)하고 교활한 이미지의 대명사(代名詞)인냥 나쁜쪽으로 몰아갔다.
오죽했으면 삼국지(三國志)를 내용으로 다룬 중국의 전통 연극인 경극(京劇) 공연도중
조조역(曹操易)의 배우가 흥분한 관객의 기습으로 죽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다보니 조조역을 서로 기피할 정도로 조조의 이미지를 악인(惡人)의 상징(象徵)으로 묘사하며
흑백(黑白)의 논리(論理)로 조조(曹操)의 이미지를 몰아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점점 후대로 내려오며 당(唐)나라 때부터 조조에 대한 평가(評價)를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고
재평가(再評價)를 하는 학자(學者)들이 점점 늘어났다.
여기 역사적(歷史的)으로 중요했던 인물들이 바라보는 조조(曹操)에 대한 평(評)을
몇 가지 옮기고자 한다.


당대(當代)의 평가로 동시대(同時代) 사람 중 유명한 인물비평(人物批評)의 두 사람은

조조(曹操)를 서로 상반되게 평가(評價)했는데,


양국(梁國) 사람인 교현(橋玄))은

그를 두고 치세(治世)의 무협도(武俠道)이자 난세(亂世)의 대영웅(大英雄)으로 평가했지만,


여남(汝南) 사람인 허소(許)는

그를 두고 치세(治世)의 능신(能臣)이자 난세(亂世)의 간웅(奸雄)으로 평가했다.

오(吳)나라의 마지막 승상(丞相)인 장제(章帝)는
"위(魏)나라 백성들이 조조(曹操)를 따르는 것은 그 위엄(威嚴)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지
조조(曹操)가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은 아니다"라고 말해

조조(曹操)의 이미지에 신뢰성(信賴性)을 떨어트렸다.

진수(陳壽)의 평가(評價)
진수(陳壽)가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무제기(武帝記)에서 평(評)하기를,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합리적으로 일에 대처했으며, 구악(久惡)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는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대처해 사람을 등용했다는 의미로 간주되고
춘추시대(春秋時代) 패자(覇者)의 덕목(德目)이라는 견해를 피력햇다.

시인(詩人)이자 정치가(政治家)였던 두목(杜牧)은
“조공(조조)은 손무(孫武)의 병법(兵法) 13편에 주석(註釋)을 달아 후세에 전했다."
고 하면서 조조(曹操)의 군사적(軍事的) 재능(才能)을 칭찬했다.

중국의 모택동(毛澤東)은
"조조(曹操)를 간신(奸臣)이라고 하는 것은 봉건정통관념(封建正統觀念)이 만들어낸 것으로
반동사족(反動士族)들이 봉건정통(封建正統)을 유지보호(維持保護)하는 것이었다며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 라고 하면서 조조(曹操)의 복권(復權)을 말한 바 있다.
그는 조조(曹操)의 제도(制度) 개혁(改革)과 둔전제(屯田制) 등의 정치적(政治的) 공적(公的)과 탁월한 군사재능(軍事才能) 그리고
조조(曹操)의 문학재능(文學才能)을 칭찬하면서
조조(曹操)를 공식석상에서만 서른 번 이상 언급하여,
모택동(毛澤東)이 가장 많이 언급한 역사인물(歷史人物)이 조조(曹操)라고도 한다.

연의(演義)의 평가(評價)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악인(惡人)의 상(象)으로 그려지고 있다.
나관중(羅貫中)은 조조(曹操)를 당대(當代)의 민중(民衆)이 가지고 있던 조조(曹操)에 대한 반감(反感)이 들어 있는
전승(傳承)과 민간(民間) 설화(說話) 등을 이용하고,
변방(邊方)의 사천(四川) 즉 촉(蜀)의 인사들을 대부분 우국지사(憂國之士)와 충의지사(忠義之士)로 묘사함으로써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조조(曹操)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서술(敍述)하고 있다.
또한 조조(曹操)를 악인(惡人)으로 그리기 위해 우스꽝스럽고 경망스러운,
때로는 인신모독에 가까운 묘사도 서슴없이 쓰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소설가(小說家) 이문열(李文烈)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평역(評歷)한


이문열(李文烈)의 삼국지(三國志)에서는
조조(曹操)는 자신을 위해 죽은 병사들의 충성(忠成)과 고마움을 있지않았다. 상처입은 그 가족들에게 밭을 무상으로 줌으로써
생계에 지장이 없도록 배려하기도 했던 훌륭한 지도자로 묘사되기도 하며,
스스로 세운 법(法)을 잘 지킨 지도자였다고 평(評)하기도 했다.
그 예로 조조는 농민들에게 해를 주지 않도록 철저하게 막았으며,
전쟁을 위한 원정길에도 말을 타고 보리밭에 들어가지 못하게 엄명을 내렸는데,
어느날 그만 자신의 말이 뒷거름질를 치다가 보리를 밟고말았다.
자신이 정한 법을 어겼으메 부끄럽게 여긴 조조는 병사들 앞에서 자신의 목을 자르려고 하려다가,
참모들의 조언에 따라서 자신의 목을 머리카락으로 대신하니,
군인들은 다시는 법을 어기지를 아니하고 또한 군법(軍法)을 두려워하였다고 썼다.
그는 조조(曹操)의 이미지를 부정(不正)보다는 긍정적(肯定的)인 면을 부각(浮刻)시켰다.


이와같이 근대(近代)로 접어들면서 조조(曹操)에 관한 재평가(再評價) 작업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시대(時代)에 맞게 평가작업(評價作業)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다.
심지어는 업체에서까지
조조(曹操)의 처세술(處世術)을 배워야 한다며 CEO나 간부들을 상대로 삼국지강의(三國志講義)를 하기도 한다.

-주(註)-
나는 어린시절 삼국지(三國志)를

흑백(黑白)의 논리(論理)로 읽었다.
조조(曹操)는 꽤가 많고 야비하며 나쁜사람이라는 선입견(先入見)을 가지고 책을 읽었고 또 책 내용도 거의가 그러했다.
유비(劉備)는 늘 의로운 사람이고 관우(關羽)나 장비(張飛)는 충직한 사람들로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관중(羅貫中)이 지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내용은 흑백(黑白)의 논리(論理)로 몰아간 의도가 다분히 였보인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감에 여러 삼국지((三國志)를 다시 정독(精讀)을 하고 논리적((論理的)으로
당시의 시대상(時代相)과 흐름을 유추(類推)해보면 조조(曹操)라는 인물은
대단한 카리스마와 뜨거운 가슴 그리고 문학(文學)의 멋과 깊이와 향(香)을 즐길 줄 아는 멋쟁이 이면서
정(情)이 많아 눈물 또한 많아던 지도자(指導者)였다는 걸 다시금 느끼게 된 것이다.

솔직히 말해 난 지금 조조(曹操)란 인물(人物)에 묘한 매력을 느끼고 있기도 하다.
인재(人才)를 소중하게 생각할 줄도 알았고,

충(忠)과 효(孝)도 깊이 세기며 행(行)하기도 했던 지도자(指導者)였기 때문이다.

칠보시(七寶詩)에서나 동작대(銅雀臺) 부(賦)에서도 조조(曹操)의
나쁜 버릇을 소개하기도 했는데..
천하(天下)를 움켜지고자했던 그의 야망(野望)앞에서 사적(事的)인 부분과 일부
좋지못한 행동은 그도 하나의 미완성(未完成)의 인간으로써 봐야할 부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따라서 그의 주변에는 늘 지략(智略)을 겸비한 모사(謀士)들과 용맹한 장수들이 손권(孫權)이나 유비(劉備)에 비해 넘쳐났으며 그들의
지략(智略)과 용맹(勇猛)은 천하를 통일하는 굳건한 힘이 되었고,
솥발처럼 삼등분 된 어지러운 중국천하(中國天下)를
통일하는데 초석(礎石)을 다진 위대한 인물이 조조(曹操)이다.


각설하고...
어지러운 삼국시대(三國時代)를 거침없이 살다간 조조(曹操)라는 인간의

방대한 전 과정을 일일이 나열한들 그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짤막하게 그를 평(評)하는 유명인사들의
글들을 정리해 봤고
여기서는 조조(曹操)의 예술적(藝術的)인 면 중에서도 시심(詩心)을 들여다 보고자 하여,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단가행(短歌行)"이란 시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하며
시(詩)의 배경을 짤막하게 덧붙이고자 한다.

단가행(短歌行)은

조조(曹操)의 대표적인 명시(名詩)로
"인생길을 가면서 부르는 짧은 노래"라는 의미로 해석해도 좋을것이다.
감정이 충만하고 박자가 처량한 당시 노랫말로도 불렸던 서정시(敍情詩)이다.
조조(曹操)는 당시의 어지럽던 심국시대의 대표적 지도자로 빠쁜 와중에도 문풍(文風)의 혁신(革新)을 선도(先導)하고 개창(疥瘡)하였으며,
찬란한 문학(文學)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장본인(張本人) 이기도 하다.
특히 문학적(文學的)인 성취(成就)로 시가(詩歌)의 창작(創作)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단가행(短歌行)은 시경(詩經)의 전통을 이어받은 고풍스러우면서도
웅장하면서도 처연한 격조(格調)를 보여 영웅다운 웅지(雄志)를 펼치고 있는 시(詩)로 유명하다

 

단가행(短歌行)은

 적벽대전(赤壁大戰) 직전(直前) 장강(長江)에 백만대군을 집결하고 전투에 임하기 전(前).
선상(船上)에서 달 밝은 밤에 부른 시가(詩歌)이다.
이 시(詩)는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과 짧은 인생을 뒤돌아보며 한탄하고,
현자(賢者)를 갈망하는 심정(心情)과 공(功)을 세우려는 응대한 뜻이 함께 드러나 있기도 하다.
또한 아픔과 난리를 벗어나고싶고
친구를 그리워하며, 귀한 손님을 환영하는 등의 감정(感情)이 융합(融合)되어
의미깊은 야경(夜景)을 묘사하면서 복잡한 심정을 담아낸 조조(曹操)의 명시 중에서도 명시(名詩)로 불린다.

 

단가행(短歌行)

 

인생길을 가면서 부르는 짧은 노래

 

对酒当歌,人生几何?

술을 마시고 노래 부르나니, 인생이 얼마나 될까?

 


譬如朝露,去日苦多。

비유하면 아침 이슬같아, 가버린 세월이 정말로 많구나.


慨当以慷,忧思难忘。

응당 강개할지미, 근심스런 생각 잊기 어렵다.


何以解忧,唯有杜康。

무엇으로 시름을 풀 수 있을까, 오직 술이 있을 뿐이로다.


青青子衿,悠悠我心。

파란 그대 옷깃, 아득하기만 한 나의 마음.


但为君故,沉吟至今。

다만 그대 떄문에, 나직이 읊조리며 오늘에 이르렀다.


呦呦鹿鸣,食野之苹。

사슴이 기쁘게 울면서, 들판의 다북쑥을 뜯는다.


我有嘉宾,鼓瑟吹笙。

나에게 반가운 손님이 있기에, 거문고를 타고 생황을 부노라


明明如月,何时可掇。

달같이 밝은 덕, 어느 떄에나 가지게 될 거나?


忧从中来,不可断绝。

시름이 마음 속으로부터 나오니, 끊어 버릴 수가 없구나


越陌度阡,枉用相存。

논둑 밭둑을 지나 왕림하여 나에게 안부 물으신다.


契阔谈宴,心念旧恩。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하는 자리, 마음으로 옛 은혜를 생각한다.


月明星稀,乌鹊南飞。

달이 밝아 별이 드문데, 까막까치 남으로 나네


绕树三匝,何枝可依?

나무를 세 바퀴나 돌았지만, 어느 가지에 의지할꺼나?


山不厌高,海不厌深。

산은 높은 것을 마다하지 않고 바다는 깊은 것을 마다하지 않도다.


周公吐哺,天下归心。

주공(周公)은 씹던 음식마저 뱉고서 손님을 귀히 맞이하였기에, 천하의 인심이 그에게 돌아간게 아니겠는가~!